▽‘흥수 아이’
1982년 12월 5일 충북 청원군 문의면 시현부락 두루봉에서는 석회암 채취 작업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일대에서는 1964년부터 석회암을 채취하기 위해 낮은 산을 깎아내고 있었지요.
작업중 두루봉 산봉우리의 끝자락 부분에 동굴 같은 형태가 나타났고 이내 충북대 고고학발굴팀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당시 한흥문의광산의 김흥수 전무였습니다.
“빨리 와 보십시오. 사람 이빨 같은 것이 보입니다.”
이융조(李隆助)박사팀은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이 박사 팀은 이에 앞서 1976년 한국일보 강승원 기자의 제보로 두루봉 동굴유적을 처음 조사한 이래 수차례 조사를 한 바 있었습니다. ‘큰 거’라는 직감은 맞아 떨어졌습니다.
동굴 외형은 포크레인 작업 통에 많이 파괴된 상태였고 굴 입구와 입구 안쪽의 동굴 벽 일부, 부분적인 퇴적측만 남아있었지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석기 동물화석 식물자료가 엄청 나왔습니다. 구석기 유적의 문화 성격을 그대로 간직한 동굴로 밝혀졌지요.
“유골은 2구였는데 한 개는 두개골 부위가, 다른 한 개는 가슴 위 부분이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퍼내간 흙을 쌓아놓은 곳에서 며칠간 채로 걸러낸 끝에 두개골 조각을 찾아내 한 개는 복원했지만 한 개는 영영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이후 석회암 채취 작업이 진행되면서 두루봉 동굴은 아쉽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흥수 아이’는 중성
유골의 주인공은 제보자 ‘김흥수’씨의 이름을 따 ‘흥수아이’로 명명됩니다. ‘흥수아이 1호(통칭 흥수아이)’는 이렇게 해서 고고학계에 유명인이 됩니다. 머리뼈의 해부학적 특징과 잰 값으로 볼 때 현대사람과 슬기슬기사람의 특징을 함께 갖고 있어 한민족의 기원 연구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발굴이었습니다.
‘흥수 아이’는 1일 일본 도쿄(東京)시내 메이지(明治)대 고고학박물관에서 개막된 한일 구석기 유물전에 청동상으로 복원돼 처음 공개됐습니다. 전시회는 5월말까지 진행됩니다. 흥수아이를 발굴해낸 충북대측이 이번 전시회에 맞춰 학내 전문가에 맡겨 제작한 것으로 유골 일부와 함께 보낸 것이지요.
전시장에는 흥수 아이 유골 일부와 복원상을 포함, 긁개 찌르개 주먹대패 등 한국의 구석기 유물과 복제품 등 428이 전시되었습니다. 한반도 유물과 제작수법이 거의 같은 일본 규슈(九州)일대의 구석기 유물도 나란히 전시돼 있습니다.
메이지대 고고학발굴팀은 1949년 일본 최초의 구석기 유적인 이와주쿠(岩宿)유적을 발굴하는 등 고고학 연구 분야에 있어서는 일본 최고 수준을 자랑합니다. 충북대 박물관도 단양 수양개 유적, 청원 두루봉 유적 등 일련의 선사시대 유물 발굴을 통해 세계 고고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고요. 특히 ‘수양개 유적’은 세계 고고학계에 매우 유명합니다. 한반도를 통해 일본에 구석기가 전파되는 과정을 확실히 보여준 유적이란 점에서요.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란 이름의 국제학술회의는 올해 5월15-16일 메이지대에서 열리는 데 벌써 10회째를 맞고 있습니다.
돌 판 위에 매장된 행태로 발견된 유골의 주인공은 숨질 당시 5~6세, 키는 110~120㎝, 두개골 용적은 1,260㏄ 쯤으로 추정됐습니다.
전시장에 가 보니 남녀를 구분하기 힘들어 이 박사한테 물어보았습니다.
“이 박사님, 대체 남잡닙까 여잡니까.”
이 박사는 웃으면서 ‘중성’이라며 그렇게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주었지요.
목 아래 가슴 앞으로 튀어나온 쇄골로 보아 남자일 확률이 90%라는 주장과 골반 형태가 여자 것이라는 설이 대립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양쪽 다리가 안쪽으로 휜 안짱다리 형태는 유골로 보아 확실했다고 합니다. 또 충치가 매우 심했다고 합니다.
▽ ‘흥수아이 아버지’의 눈물
‘흥수아이의 아버지’ 격인 이융조 박사는 개막식에서 인사를 하다 그만 눈물을 흘렸습니다.
“흥수아이 발굴시 가슴과 팔 주위의 흙에서는 꽃가루가 많이 발견됐습니다. 아마도 일찍 세상을 떠난 아이를 위해 부모가 꽃장식을 해준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수고해준 여러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다, 문득 꽃장식을 했을 흥수아이가 생각나 그만….”
구석기 유적 발굴시 남한강이 홍수로 범람하던 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라도 더 찾아내려 애쓰던 제자들의 모습도 어른거렸다고 합니다. 메이지대 전시장에 정리된 유물을 보며 그는 몇 번이나 “허허, 이렇게 많았나” 하며 감회에 젖었습니다. 고고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 부족 탓도 있고 돈 문제도 있고 해서 전시공간을 찾지 못해 방치된 유물이 한국에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메이지대 고고학박물관장 고바야시 사부로(小林三郞) 박사와 안비루 마사오(安蒜正雄)교수(고고학) 등과 저녁 모임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이번 충북대-메이지대 공동전시회를 위해 학교측을 설득해 2억엔(20억원)의 지원을 얻어내는데 애쓴 분들입니다. 사립대학이 1회의 전시회와 학술대회를 위해 쓴 20억원, 결코 작은 돈이 아니지요. 한국에 와서 직접 포장하고 운반하는 일들 죄다 그들 팀이 했습니다.
그들은 강조했습니다.
“양국 구석기 유물을 모아 비교해보면 과거 땅이 붙어 있었던 두 나라의 문화가 얼마나 깊은 관계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지요.”
메이지대 한일 구석기 공동전시회를 보며 한일간에는 근현대사 외에도 많은 할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월31일부로 박물관장을 그만두어 이제는 조금 시간 여유가 생긴 고바야시 박사가 아무때나 들리라고 한 생각이 납니다. 한번더 만나보고 싶은 소탈한 노인입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그는 손목에 밴드 같은 걸 끼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노인들도 패션 하나 끝내준단 말여, 크크’ 생각하면서 물었지요
“멋진데요. 부인께서 선물한 것입니까.”
“허허, 멋져? 선물은 무슨. 의사가 처방해준 거지. 자석인가 뭔가, 목걸이도 있는데 건강에 좋다고 해서요. 우리 고고학 하는 사람들은 젊은 시절 하도 땅을 많이 파서 그런지 나이들면 허리가 또래보다 약하지. 그래서 이걸 끼고 있으면 좋다고 하니까. 건강하지 않으면 고고학 못하지요.”
맘에 들면 필자한테도 하나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중년, 술도 몇잔 못하는 필자가 불쌍해 보인 모양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당구 큐대 한번 잡을 생각 안해 보고 ‘땅만 파고’ 지내온 충북대 이융조 선생은 그래도 힘이 팔팔한지 술이 술술 넘어갑니다. 이 선생님, 모쪼록 건강 잘 지키시고 앞으로도 좋은 물건, 많이 많이 파내시길 바라며 편지를 마칩니다.
일본 도쿄=도깨비뉴스 리포터 지안 jian@dk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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