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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에게 인권과 평화 가르쳐요" |
동경 오비린 대학 신현석 목사 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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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박철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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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학교 다큐멘터리를 통해 일본사회와 재일사회의 경계를 물었던 동경외국어대학의 신명직 교수, 일본의 우경화를 경계하며 북한에는 핵이 없다고 단언한 오사카 경제대학의 요시다 야스히코 교수에 이어, 이번에 만난 사람은 기독교주의 대학으로 이름이 높은 동경 오비린 대학의 신현석(70) 목사이다.
정신대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에서 진행한 지난 2000년 4월 29일, 30일 양일간에 걸쳐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진행된 "국제학생성노예모의재판"를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당시 흥분되고 떨리는 음성으로 일본 천황에 유죄를 내린 일본인 학생 검사를 비롯하여 일본측 학생들을 조직하고, 그들에게 일본이 태평양 전쟁당시 저질렀던 인권 야만의 역사를 교육시킨 사람. 그가 바로 신현석 목사이다.
동경글로리아 교회, 동경중앙신학원, 동경오비린 대학, 미 루이지애나 침례대학(Louisiana Baptist University) 등 고희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력적으로 교단과 강단에 서고 있는 그를 11월 2일 동경 시내 코이와에서 만났다.
- 먼저 간단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신현석입니다. 1933년(생)이니까, 한국 나이로 71살이네요. 일본에는 65년도에 건너 왔습니다. 원래는 계명대 음대를 다니고 있었고, 일본에서도 음대쪽 공부를 계속 하려고 했었는데, 당시 성가대 활동을 하던 교회의 목사님과 선배들의 권유로 동경신학대학 대학원으로 전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미국 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에서 학위를 받고 선교 활동 및 대학강의를 계속 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글로리아 교회 주임목사, 오비린 대학의 강단에 서고 있습니다."
- 오비린 대학이라면 시미즈 야스죠 선생이 세운 학교라고 알고 있는데요. "네. 시미즈 야스죠 선생을 아시는 분들이 많죠. 북경의 성자라고 불린 분이시니까. 1930년대 일제 식민지 정책이 광폭하게 진행되었을 때, 민족차별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을 때 그것에 정면으로 반대하셨죠.
당시 시미즈 선생이 중국에 세운 숭정학원을 다닌 중국인, 한국인, 조선족들은 시미즈 선생의 평등주의와 인권을 고려하는 발언 및 행동들에 대해 감사하다고 합니다. 오비린 대학은 그런 시미즈 선생의 기독교에 기반한 인권, 사랑, 평화의 가치관이 그대로 묻어 있는 학교입니다.
저 역시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기독교학을 가르치면서 인권과 사랑, 평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은 일본 근대사의 시각교정을 더 많이 시키지만요(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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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박철현 | - 신 목사님은 정대협과 동시에 진행한 2000년 모의법정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졌습니다만, 그 이전부터 활발하게 현실 참여 운동을 전개해 왔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부터 인권이나 평화 등의 단어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하더라도 전쟁이 끝난 후라서 인권이나 평화 같은 단어들이 사치로 느껴졌을 때죠.
그런데 일본에 건너오니 이게 정말 차별이 심하더군요. 물론 저한테 잘 해주신 일본인 목사님들, 집사님들, 선배들도 많습니다만, 일상적인 사회의 분위기란 게 있지 않습니까? 그 분위기가 재일동포는 차별받는게 당연하다는 분위기였던 것이죠."
- 운이 좋은 케이스군요. 주위에 좋은 분들만 계셔서.(웃음) "그렇게 되나? 그런데 일본인들은 개인적으로는 다들 잘 해줘요. 적대감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좀 그런 사람들이겠지. 일장기 들고 거리를 휘젓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일부 경거망동하는 것은 그나마 괜찮아요. 다만, 그것들이 국가의 정책으로 되고 그러면 문제가 되죠. 옛날만 하더라도 지문날인, 외국인등록 등에서 재일동포들이 받은 차별이 많았으니까."
- 그러면 현실참여를 하기 시작한 것은 재일동포들의 차별이나 그런 것들에 분노했기 때문이다라고 봐도 되겠네요. "막연하게는 그렇죠. 그렇지만, 저로서는 동경신학대에서 오히려 그런 계기들이 많이 생겨난 게 아닐까 합니다만."
-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동경신학대가 일본의 신학관련 3대 대학 중에 가장 리버럴하고 래디컬하니까.(웃음) 그리고 그때 당시 학교에 다니면서 이래저래 연을 튼 것이 나중에 현실참여를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고요. 사람이 없으면 안되니까요."
-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쯤입니까? "가와사끼의 이인하 목사님이 활발하게 시민사회 운동이나 발언들을 하고, 저 역시 그분과 인연이 있었습니다만, 제가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시모노세끼에 있었던 76년부터입니다. 최창화 목사님이라는 일본 인권 운동가들의 역사에 거대한 흔적을 남긴 분이 계신데, 그분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각지의 70여명의 조선인, 일본인 목사, 지식인들이 결합한 '재일 한국 조선인 인권 획득 투쟁 연합회(이하 연합회)'가 현실참여의 시초가 되겠네요."
- 주로 어떤 활동을 한 단체인가요? "무슨 집회나 강연회, 세미나 같은 것을 개최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구체적인 거 몇 가지만 이야기하자면 '이름 제대로 부르기 운동'이 기억에 남네요. NHK 방송국과 벌인 1엔 소송사건도 당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요.
일본정부나 매스컴에서 조선인의 이름을 자기 멋대로 등록시키고 인용하고 그런 것들에 대해 바로잡자는 운동입니다. 예를 들어 '최'라는 성을 가진 사람을 '최'라는 것으로 발음하지 않고 지네들 방식으로 '사이'로 읽어 버리는 것이죠. 이름이라는 것이 뭡니까? 가장 기본적인 개인의 정체성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맘대로 바꾸어 버리니 이게 열받는 것입니다.
심지어 NHK의 인권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우리 이야기를 다루었지요. 우리가 하고 있는 운동을 다루면서 그 안에 이름 제대로 부르기 운동도 소개되었어요. 그런데도 '박'은 '보쿠'로 나오고, '최'는 '사이'로 나왔습니다. 1엔 소송 사건은 바로 이것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 그런데, 1엔은 뭔가요? "손해배상 청구금액입니다. 상징성을 담은 금액이죠. 우리 이름은 당신들에게는 아무 쓰잘데기 없는 1엔 정도의 가치로만 판단될지 모르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거죠."
- 이겼나요? "물론, 졌죠(웃음). 하지만, 그 사건이 일본 매스컴의 지면에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일본인들이 많이 관심을 보이고, 일본인 사회 단체들이 저희 쪽에 결합했구요. 저희 쪽으로서는 많은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요?"
- 정신대 문제는 어떻게 알고 참여하시게 되었습니까? "1992년에 처음으로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 방문했었습니다. 저도 나이가 있으니까, 정말 제 누님 같은 분들, 제 동년배들이 일본 근대사의 희생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니 참을 수가 없었죠. 그래서 그때 발벗고 그분들의 일정에 저희들이 결합을 했습니다.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통역도 지원하고, 같이 활동하던 일본 시민 단체들과 결합시키고 그러면서 인연이 시작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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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모의 법정 팜플렛과 연합회 팜플렛(1983년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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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박철현 |
| - 일본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감추고 싶은 일일 수도 있는데. "그게 바로 일본 역사 교과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일본 역사 교과서를 보면 근대사는 가르치지 않아요. 딱 메이지유신까지만 가르치죠. 항상 학기 말이 되어버리고 이것저것 시험 공부하다보면 교과를 진행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저는 안 가르치는 것도 왜곡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과거에 대해 제가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과거를 망각하는 것은 현재의 눈을 감는 것이라고요.
한 학기에 약 400명 정도가 제 과목을 수강하는데 학기말 리포트를 보면 약 100명 정도가 변화되었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저는 이런 게 다 교육과 학습의, 그리고 기독교적 인권·평화, 신앙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 정신대 관련 모의법정에 일본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참가할 수 있게끔 지대한 노력을 기울이셨는데요. "원래는 학생들이 안 하려고 했어요. 이유는 저도 압니다. 결국에는 천황의 죄를 선고해야 하니까. 아무리 천황이 지금 힘이 없고, 상징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그래도 천황인데, 그에게 죄를 선고한 다는 것은 암묵적으로나마 용서할 수 없는 행위로 인식되어 있거든요.
사실 그때 검사역을 맡았던 일본 학생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존과 양심의 고민을 했었다고 그후 감상 리포트를 작성했었어요. 저는 정신대 문제 역시 해결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학생들의 치열한 고민, 일본 현대사에 대한 반성 등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더 큰 보람이기도 합니다."
- 앞으로는 어떤 활동들을 해 나가실 생각이십니까? "저는 목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비현실참여 마인드는 배격합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널리 주님의 정신을 설파하고, 그들에게 평화와 인권, 평등을 가르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과 한국간의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 역시 그 평화와 인권에 일조를 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일본 국내의 문제인,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부락민 차별, 아이누족 천대 등 현실적인 문제를 비롯, 여성, 장애인, 아이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쏟을 생각입니다.
다음달이 인권의 달인데 인권주간에 세미나과 집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바우넷 재팬을 비롯하여, 인권문제를 고민하는 많은 단체들이 참가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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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박철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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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취재 가방 안에 있던 옛날 신문을 훑어보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한기총의 친미집회 현장, 그리고 그곳에서 울부짖고 있는 조용기 목사의 사진이 컬러로 게재되어 있다.
사회참여를 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조용기 목사나 신현석 목사나 마찬가지일테다. 그런데 그 둘의 삶의 방식은 왜 이렇게 극과 극일까 하는 생각, 그리고 조용기 목사는 한 마디만 해도 거대보수언론에서 다루고 그러는데, 일본에서 근 30년간 묵묵히 사회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신현석 목사는 왜 차디찬 외면을 받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스산한 아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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