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하라의 똥배짱
잘못 인정은 곧 죽음?
글:장팔현
28일 ‘한 . 일합방은 조선인이 원해서 했다’는 이시하라 토-쿄- 도지사의 망언에 우리 정부도 나서고 있다. 31일 주일 조세형 대사가 타케우치 유키오 외무차관을 방문, 항의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했다하나, 오히려 외무차관이라는 자는 ‘이시하라 개인의 일로 일본정부의 입장이 아니다. 때문에 정부로서도 한계가 있다’고 발뺌하고 있으니, 그 국민에 그 정부라 아니할 수 없다. 일개인에게 대하여 이래라, 저래라 일본정부가 압력을 넣는 것도 무리라 하는데, 그는 엄연히 인구 천만 명이 훨씬 넘는 일본의 수도로서 대표도시이자, 심장부의 수장으로서 공인(公人)이라는 점이다. 그의 말은 곧 토-쿄-인을 대표하는 말이요, 일본인구 10%가 넘는 대표자로서의 중차대한 역사인식이라는 점이다.
일본 정부에서조차 그런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으니 참으로 앞날이 걱정된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허울아래, 일본인다운 인권 챙기기라 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다. 세계2차대전의 패전으로 미국이 심어준 자유 민주주의 체제라는 말장난 속에 그들의 역사인식에 관한 이중 잣대는 이처럼 휘둘러지는 것이다. 일본인다운 면모이다.
그처럼 자국민에 대한 보호와 인권, 자유는 중요시하면서 인접국에 끼친 무력행사에 대한 협박과 합방 그로 말미암은 엄청난 학살과 재산적 피해에 대하여 사죄는 고사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는 뻔뻔한 인사를 두둔하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 아니 정치철학이나 세계평화에 대해서 세계인으로부터의 존경은 고사하고 지지도 받지 못하는 일본정부 아닌가? 나아가 인접국가와의 성실한 교린을 외면하는 처사이다. 역사를 날조하고 망언하는 우익인사가 거대도시의 수장으로 있다니, 정말로 걱정되고 한심할 따름이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국민은 보호하되 타국, 타 국민은 업신여겨도 된다는 말인가? 역사의 날조와 왜곡에는 방조 내지는 관심조차 없는 일본이 무슨 세계의 리더국이 되겠다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꿈꾸는가?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공인이 겨우 그런 낮은 수준의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문제요, 그와 같은 저열한 역사 인식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은 민족에게 세계역사를 꾸려갈 방향타 역할까지 준다면 그것은 분명 세계2차대전에서 경험했듯이 또다시 엄청난 인류의 비극으로 이어질 것이다. 일본인, 일본국의 낮은 역사인식, 철학이 없음을 안다면 일본은 아무리 경제대국일지라도 세계를 이끌 리더국으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시하라는 ‘한일합방은 조선인이 원해서 했다’고 망언을 하고도 한국민에 대한 사죄는커녕 오히려 비아냥하듯 묘한 얼굴로 반복 강조함으로서 딴에는 지조와 뚝심 있는 정치인으로 일본인에게 비쳐지고 있으며, 이는 곧 인기로 다시 연결된다는 점이다. 아니, 이시하라 본인이 이러한 교묘한 똥배짱 전술로 일본국민들에게 사랑받고 지지받고 우익의 거두로서 총리에 가장 유력한 인물로 추앙 받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일본인의 속내를 거침없이 그 누구, 그 어느 나라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고도 속 시원히 밝혀준다고 일본인들은 내심 반기는 것이다.
보통의 일본인은 겉으로 보기에 얌전하고 남 앞에서 절대로 남들을 비난할 수 없는 소심한 성격인데, 이시하라는 분명 그런 일본인이 아닌 것이다. 아니 일본인들이 보기에 그는 평시에 천시 받고 무례하다고 느낄 정도로 속내를 다 까발리는 미숙한 성격의 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분명히 일본인의 속성을 파괴한 일탈자이자, 무뢰한임을 일본인들이 알지만, 그러나 그는 보통의 일본인들이 전혀 하지 못할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구 해대는 사나운 투견인 것이다. 그 유명하다는 시코꾸(四國) 도사견에 견줄 만하다.
일찍이 루스 . 베네딕트가 간파했듯이 일본인은 ‘국화와 칼’이라는 부드러움과 함께 날카롭고 예리한 칼을 품은 사무라이들이다. 아울러 ‘부끄러움의 문화’를 가지고 있기에 부끄럽다고 생각될 때 그들은 얼굴이 화끈거려 참지 못하고 여차 없이 할복자살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끄러운 과거사는 하루빨리 자국 역사에서 지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그것을 이사하라와 같은 우익인사들이 대신 처리 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때문에 일본인들이 부끄러운 역사 때문에 할복할 일은 없어지는 것이니, 일본인들에게 있어 이시하라 같은 우익인사들이 얼마나 고맙겠는가? 그들은 소심하고 정직한 일본인들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이시하라는 사무라이국가인 일본에 있어 어느새 오다 노부나가를 능가하는 일탈자로서 파괴자로서 개혁자로서 소심한 보통의 일본인들에게 비쳐지는 것이다. 거대한 이미지의 영웅으로 보이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물론 환상이자, 잘못된 인식이지만, 보통의 일본인들은 그러한 판단을 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것이다. 속으로는 부끄럽지만 인접국의 이유 있는 비판과 일본 정치가들의 망언에 대한 사죄 요구에는 어쨌든 귀를 막고 누군가가 나서주기를 바라는 심리이다. 그 역할을 용감무쌍한 이시하라가 대신 해주고 있으니, 그를 지지하는 일본인들은 얼마나 심리적 안정을 크게 얻겠는가?
일본인들에게 있어 ‘구린 곳은 덮개로 가리는 것이자, 과거는 잊혀진 것이다.’ 분명 이시하라는 인접국으로부터 비판받고 있는 선조들의 부끄러운 역사조차도 자랑스러운 역사로 다시 바꿔 써가는 유명 소설가인 것이다. 이시하라는 보통의 일본 시민이 입에 담지도 못할 엄청난 얘기를 아주 당당히 떳떳이 주장하고 있으니 얼마나 자주적이고 자랑스러운가? 오다 노부나가를 넘어 토요토미 히데요시요, 이토 히로부미 아니겠는가? 때문에 이시하라를 지지하는 다수의 일본인들도 역사인식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공범인 셈이다. 그러기에 일본 정부의 이시하라에 대한 압력이 필요한 것이고 사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시하라의 망언은 ‘남경대학살이 날조됐다’는 것에서부터 ‘제3국인’발언 등 인접국과 아시아 멸시로 가득 찬 전형적 수구, 우익인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가 사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니 모욕을 당한 당사자나 당사국의 맹렬한 반대와 사죄요구가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오만해지고 더욱 굳은 진지한 얼굴 표정으로 전장의 장수라도 되는 것처럼 비장한 각오로 또다시 남 염장 지르는 ‘반복강조’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바로 그의 지조이자, 신념으로 비쳐져 일본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덩달아 그의 인기만 자꾸 올라가는 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시하라는 바로 이러한 무모하고도 뻔뻔한 전술로 아직도 일본인들에게는 영웅이자, 그동안 말 못하고 부끄러움에 고개 숙이던 일본 국민들에게 면죄부를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역사적 치부를 감추기 위해 우익인사와 일부 국민이 스와핑 하면서 자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일궈 온 일본인 선조들에 대한 이웃 국가의 정당한 비판에 이시하라는 망언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말 못하는 소심한 일본인을 대표하여 그가 대신 일본인의 속내를 밝힘으로서 용맹한 저격수로서 한껏 뽐내며 자랑하고픈 것이다. 할말을 했다는 자못 진진한 얼굴 모습으로 일본인들을 향해 ‘나 잘했지’하는 철부지인 것이다. 일본인만 안중에 있지, 인접국 사람들이나 세계인들은 보이지 않고 다만, 인기관리 차원에서 이웃은 이용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이나 중국에서 일부 일본 극우인사들의 역사 날조 및 왜곡에 대하여 비판하면 비판 할수록 이사하라 류의 망언전문가들은 자신들이 건 싸움에 말려들었다고 기뻐하며, 더욱더 전신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이상체질인 것이다.
당사국이나 해당 국민들의 망언에 대한 사죄요구는 오히려 그들 우익인사들에게 인기유지를 시켜주는 보약이자, 잊혀져 가던 인기조차 급상승 시키는 좋은 재료가 되는 것이다. 아니 아무 이슈가 없어도 선거철이 다가오면, 어설픈 피에로가 항상 인기를 먹고 살듯이 어릿광대는 분연히 일어나 망언으로 시비를 거는 것이다. 인접국민을 자극할만한 염장 지르는 소리로 말썽을 일으킴으로서 하급 탈렌트의 작전은 성공하는 것이다. 요번 이시하라의 망언이 그런 사안이다.
일본인들의 날조되고 비뚤어진 역사인식에 대하여 우리의 정당한 비판조차 거두절미하는 일본정부나 이시하라 본인은 분명 석고대죄하고 사죄해야할 것이다.
분명 일본은 지금 잘못 나아가고 있다. 지도자나 국민이나 인류의 보편적 시각을 상실한 채 오로지 자국민의 이익과 억지를 부려서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묘한 역사인식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힘세지만 고약하고 철부지인 이웃을 두고 있는 셈이다.
이시하라가 망언에 대한 사죄는 고사하고 재차 망언을 강조함은 ‘지는 해’로 비유되는 일본인들의 서글픈 속내의 표현이자, 영광스러운? 과거로의 회귀를 바라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침몰하면서도 이러한 망언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 문제는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일본 국민성’으로 보아, 우리가 강해져야만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잘못 인정은 곧 죽음?
글:장팔현
28일 ‘한 . 일합방은 조선인이 원해서 했다’는 이시하라 토-쿄- 도지사의 망언에 우리 정부도 나서고 있다. 31일 주일 조세형 대사가 타케우치 유키오 외무차관을 방문, 항의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했다하나, 오히려 외무차관이라는 자는 ‘이시하라 개인의 일로 일본정부의 입장이 아니다. 때문에 정부로서도 한계가 있다’고 발뺌하고 있으니, 그 국민에 그 정부라 아니할 수 없다. 일개인에게 대하여 이래라, 저래라 일본정부가 압력을 넣는 것도 무리라 하는데, 그는 엄연히 인구 천만 명이 훨씬 넘는 일본의 수도로서 대표도시이자, 심장부의 수장으로서 공인(公人)이라는 점이다. 그의 말은 곧 토-쿄-인을 대표하는 말이요, 일본인구 10%가 넘는 대표자로서의 중차대한 역사인식이라는 점이다.
일본 정부에서조차 그런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으니 참으로 앞날이 걱정된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허울아래, 일본인다운 인권 챙기기라 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다. 세계2차대전의 패전으로 미국이 심어준 자유 민주주의 체제라는 말장난 속에 그들의 역사인식에 관한 이중 잣대는 이처럼 휘둘러지는 것이다. 일본인다운 면모이다.
그처럼 자국민에 대한 보호와 인권, 자유는 중요시하면서 인접국에 끼친 무력행사에 대한 협박과 합방 그로 말미암은 엄청난 학살과 재산적 피해에 대하여 사죄는 고사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는 뻔뻔한 인사를 두둔하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 아니 정치철학이나 세계평화에 대해서 세계인으로부터의 존경은 고사하고 지지도 받지 못하는 일본정부 아닌가? 나아가 인접국가와의 성실한 교린을 외면하는 처사이다. 역사를 날조하고 망언하는 우익인사가 거대도시의 수장으로 있다니, 정말로 걱정되고 한심할 따름이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국민은 보호하되 타국, 타 국민은 업신여겨도 된다는 말인가? 역사의 날조와 왜곡에는 방조 내지는 관심조차 없는 일본이 무슨 세계의 리더국이 되겠다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꿈꾸는가?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공인이 겨우 그런 낮은 수준의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문제요, 그와 같은 저열한 역사 인식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은 민족에게 세계역사를 꾸려갈 방향타 역할까지 준다면 그것은 분명 세계2차대전에서 경험했듯이 또다시 엄청난 인류의 비극으로 이어질 것이다. 일본인, 일본국의 낮은 역사인식, 철학이 없음을 안다면 일본은 아무리 경제대국일지라도 세계를 이끌 리더국으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시하라는 ‘한일합방은 조선인이 원해서 했다’고 망언을 하고도 한국민에 대한 사죄는커녕 오히려 비아냥하듯 묘한 얼굴로 반복 강조함으로서 딴에는 지조와 뚝심 있는 정치인으로 일본인에게 비쳐지고 있으며, 이는 곧 인기로 다시 연결된다는 점이다. 아니, 이시하라 본인이 이러한 교묘한 똥배짱 전술로 일본국민들에게 사랑받고 지지받고 우익의 거두로서 총리에 가장 유력한 인물로 추앙 받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일본인의 속내를 거침없이 그 누구, 그 어느 나라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고도 속 시원히 밝혀준다고 일본인들은 내심 반기는 것이다.
보통의 일본인은 겉으로 보기에 얌전하고 남 앞에서 절대로 남들을 비난할 수 없는 소심한 성격인데, 이시하라는 분명 그런 일본인이 아닌 것이다. 아니 일본인들이 보기에 그는 평시에 천시 받고 무례하다고 느낄 정도로 속내를 다 까발리는 미숙한 성격의 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분명히 일본인의 속성을 파괴한 일탈자이자, 무뢰한임을 일본인들이 알지만, 그러나 그는 보통의 일본인들이 전혀 하지 못할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구 해대는 사나운 투견인 것이다. 그 유명하다는 시코꾸(四國) 도사견에 견줄 만하다.
일찍이 루스 . 베네딕트가 간파했듯이 일본인은 ‘국화와 칼’이라는 부드러움과 함께 날카롭고 예리한 칼을 품은 사무라이들이다. 아울러 ‘부끄러움의 문화’를 가지고 있기에 부끄럽다고 생각될 때 그들은 얼굴이 화끈거려 참지 못하고 여차 없이 할복자살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끄러운 과거사는 하루빨리 자국 역사에서 지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그것을 이사하라와 같은 우익인사들이 대신 처리 해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때문에 일본인들이 부끄러운 역사 때문에 할복할 일은 없어지는 것이니, 일본인들에게 있어 이시하라 같은 우익인사들이 얼마나 고맙겠는가? 그들은 소심하고 정직한 일본인들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인 셈이다.
이시하라는 사무라이국가인 일본에 있어 어느새 오다 노부나가를 능가하는 일탈자로서 파괴자로서 개혁자로서 소심한 보통의 일본인들에게 비쳐지는 것이다. 거대한 이미지의 영웅으로 보이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물론 환상이자, 잘못된 인식이지만, 보통의 일본인들은 그러한 판단을 하기에도 겨를이 없는 것이다. 속으로는 부끄럽지만 인접국의 이유 있는 비판과 일본 정치가들의 망언에 대한 사죄 요구에는 어쨌든 귀를 막고 누군가가 나서주기를 바라는 심리이다. 그 역할을 용감무쌍한 이시하라가 대신 해주고 있으니, 그를 지지하는 일본인들은 얼마나 심리적 안정을 크게 얻겠는가?
일본인들에게 있어 ‘구린 곳은 덮개로 가리는 것이자, 과거는 잊혀진 것이다.’ 분명 이시하라는 인접국으로부터 비판받고 있는 선조들의 부끄러운 역사조차도 자랑스러운 역사로 다시 바꿔 써가는 유명 소설가인 것이다. 이시하라는 보통의 일본 시민이 입에 담지도 못할 엄청난 얘기를 아주 당당히 떳떳이 주장하고 있으니 얼마나 자주적이고 자랑스러운가? 오다 노부나가를 넘어 토요토미 히데요시요, 이토 히로부미 아니겠는가? 때문에 이시하라를 지지하는 다수의 일본인들도 역사인식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공범인 셈이다. 그러기에 일본 정부의 이시하라에 대한 압력이 필요한 것이고 사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시하라의 망언은 ‘남경대학살이 날조됐다’는 것에서부터 ‘제3국인’발언 등 인접국과 아시아 멸시로 가득 찬 전형적 수구, 우익인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가 사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니 모욕을 당한 당사자나 당사국의 맹렬한 반대와 사죄요구가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오만해지고 더욱 굳은 진지한 얼굴 표정으로 전장의 장수라도 되는 것처럼 비장한 각오로 또다시 남 염장 지르는 ‘반복강조’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바로 그의 지조이자, 신념으로 비쳐져 일본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덩달아 그의 인기만 자꾸 올라가는 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시하라는 바로 이러한 무모하고도 뻔뻔한 전술로 아직도 일본인들에게는 영웅이자, 그동안 말 못하고 부끄러움에 고개 숙이던 일본 국민들에게 면죄부를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역사적 치부를 감추기 위해 우익인사와 일부 국민이 스와핑 하면서 자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일궈 온 일본인 선조들에 대한 이웃 국가의 정당한 비판에 이시하라는 망언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말 못하는 소심한 일본인을 대표하여 그가 대신 일본인의 속내를 밝힘으로서 용맹한 저격수로서 한껏 뽐내며 자랑하고픈 것이다. 할말을 했다는 자못 진진한 얼굴 모습으로 일본인들을 향해 ‘나 잘했지’하는 철부지인 것이다. 일본인만 안중에 있지, 인접국 사람들이나 세계인들은 보이지 않고 다만, 인기관리 차원에서 이웃은 이용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이나 중국에서 일부 일본 극우인사들의 역사 날조 및 왜곡에 대하여 비판하면 비판 할수록 이사하라 류의 망언전문가들은 자신들이 건 싸움에 말려들었다고 기뻐하며, 더욱더 전신에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이상체질인 것이다.
당사국이나 해당 국민들의 망언에 대한 사죄요구는 오히려 그들 우익인사들에게 인기유지를 시켜주는 보약이자, 잊혀져 가던 인기조차 급상승 시키는 좋은 재료가 되는 것이다. 아니 아무 이슈가 없어도 선거철이 다가오면, 어설픈 피에로가 항상 인기를 먹고 살듯이 어릿광대는 분연히 일어나 망언으로 시비를 거는 것이다. 인접국민을 자극할만한 염장 지르는 소리로 말썽을 일으킴으로서 하급 탈렌트의 작전은 성공하는 것이다. 요번 이시하라의 망언이 그런 사안이다.
일본인들의 날조되고 비뚤어진 역사인식에 대하여 우리의 정당한 비판조차 거두절미하는 일본정부나 이시하라 본인은 분명 석고대죄하고 사죄해야할 것이다.
분명 일본은 지금 잘못 나아가고 있다. 지도자나 국민이나 인류의 보편적 시각을 상실한 채 오로지 자국민의 이익과 억지를 부려서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묘한 역사인식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힘세지만 고약하고 철부지인 이웃을 두고 있는 셈이다.
이시하라가 망언에 대한 사죄는 고사하고 재차 망언을 강조함은 ‘지는 해’로 비유되는 일본인들의 서글픈 속내의 표현이자, 영광스러운? 과거로의 회귀를 바라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침몰하면서도 이러한 망언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 문제는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일본 국민성’으로 보아, 우리가 강해져야만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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