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다치하라'가 된 김윤규

푸른하늘김 2004. 3. 26. 00:15
'다치하라'가 된 김윤규, "우린 아무도 그를 뭐라 할 수 없다"

도쿄 주오(中央)구 쓰키지(築地) 아사히신문사 도쿄 본사에서 바라보면 코앞에 국립 암센터 중앙병원이 보입니다. 그곳에서 54세에 식도암으로 숨진 한국 출신의 유명 소설가이자 수필가였던 다치하라 세이슈(立原正秋·1926-1980)를 가끔 생각해봅니다. 얼마전 김윤규(金胤奎)가 본명인 그의 묘지가 있는 가마쿠라(鎌倉)를 찾아갔습니다.

△즈이센지(瑞泉寺)를 찾아
가마쿠라는 일본 중세 무인정권 시대, 최고실력자인 쇼군(大將)의 통치기구인 바쿠후(幕府)가 있던 곳이라 유적도 많고 오래된 식당도 많은 관광명소지요. 절 즈이센지, 서천사는 가마쿠라 시내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 산기슭에 있습니다. 늦겨울의 매화, 봄이 오는 길목의 개나리, 늦봄을 수놓는 아지사이(水菊), 단풍 등 철 마다 아름다운 자태로 불자(佛者)뿐 아니라 관광객, 연인들을 불러 모으는 곳이지요.

자동차가 비켜 다니기 힘든 좁은 길을 900m쯤 올라가야 한다기에 차를 운전해 동행한 주일 한국대사관 이진석 교육관과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걷기로 했습니다. 하늘을 덮은 듯한 거대한 목련 나무의 탐스런 봉우리며 야생 딸기의 눈송이처럼 하얀 꽃, 가게 앞을 온통 꽃으로 장식한 조그만 수공품점 등이 따순 햇살을 받아 봄 정취를 더해줍니다.

서천사 입구에서 300엔 입장료를 내려하자 관리인이 꽃을 든 모습을 보고 ‘참배객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니 참배객은 무료라고 합니다. 괜히 기분 좋은 거 있죠.
경내에는 일본의 절이 대개 그렇듯 넓은 묘역이 있었습니다. 반 평 쯤 되는 직사각형 땅에 비석 하나 달랑 서 있는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묘역이 들어선 골짜기 맨 위에서 두 번째 줄, 왼쪽 끝 양지바른 곳에 ‘立原家之墓’ 비석이 서 있었습니다. 싱싱한 꽃다발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누군가 다녀간 모양입니다. 꽃다발을 놓고 묵념을 올리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연고도 없는 한국인이 몇 명이나 여기를 찾아왔을까 하면서요. 뒤돌아서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무얼 찾아 그리 헤매다 그는 갔는고. 나는 헤매고 있는고.

▽ 즈이센지(瑞泉寺)의 1~3월 : 꽃이 핀 풍경 (출처: http://www.kamakura-burabura.com/)
    

    


△어머니의 존재
경북 안동에서 대처승 아들로 태어난 김윤규는 6살 때 부친을 여읩니다. 친척 집에서 자라던 그는 일본으로 훌쩍 떠나버린 어머니를 찾아 11살 때 일본에 건너옵니다. 처절하게 힘든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그를 와세다대 법학부 학생(1945년 입학)으로 키웁니다. 학창시절 친구들은 그를 갑부 아들로 알았답니다. 언제나 고급 천으로 된 옷에, 고급 구두에, 비싼 가방을 들고 다녔기에. 훗날 초고급 식당 아니면 가지 않은 미식가로 소문난 것을 보면 개인적 취향도 작용했을 터이나 상당부분은 ‘나는 못 먹고 못 입어도 자식 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키우겠다’는 강렬한 조선의 어머니 정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배자의 땅 일본에서 얕잡아 보이지 않게 하려고 말입니다.

고교생 시절부터 습작을 쓴 그는 법률학 강의 보다 문학부 강의에 더 흥미를 느낍니다. 문재를 갖춘 것은 틀림없었고 이내 신인에게 주어지는 아쿠타카와(芥川)상 후보에 들었지만 탈락, 좌절감도 맛봅니다. 하지만 1966년 40세때 기성작가의 작품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나오키(直木)상을 받으며 소설가로 성공했습니다. 문예지 ‘와세다문학’ 편집장을 오래 맡으며 많은 작가와 평론가를 배출시키기도 했구요.

또 일간지에 농염한 정사를 감칠맛 나게 묘사한 연애소설을 연재하며 많은 여성 팬을 확보합니다. TV드라마로 만들어진 작품도 많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어진 젊은 여성과의 연애는 종종 소설의 소재가 되었지요. 한편으로 그는 일본 전통문화에 대한 천착을 바탕으로 뛰어난 수필도 남깁니다. 조선 출신임을 숨기고 싶어서였을까, 그는 일본인 이상으로 일본의 전통을 파고들었고 일본식 정원 등을 소재로 한 글 가운데 일부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합니다. 돈과 문장가로서의 명성, 모두를 얻고자 했던지 그는 대중문학과 순수문학 사이의 ‘중간소설’에 뜻을 두고 영혼과 육신을 너무 일찍 소진해버린 것 같습니다.

다치하라는 김윤규가 썼던 필명 가운데 하나였지요. 그는 죽음으로 향하고 있던 시점에서 이를 자신의 성으로 결정하고 개명 수속을 마쳤습니다. 이전까지는 일본인 부인의 처가 성을 이어 받았지요. 일본 국적은 결혼 때 갖게 되었고요. 김윤규도 아니고, 처가 성도 아닌 제3의 성씨 다치하라. 그의 아들 다치하라 우시오(立原潮)는 일찍이 요리에 취미를 느끼고 해외 유학 등 노력을 거듭한 끝에 유명한 요리사가 되어 현재 도쿄시내에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가게 이름이 바로 ‘다치하라(立原)’입니다.

△다치하라와 국적
소설가 ‘김윤규’란 존재는 사실 한국에도, 일본에도 없습니다. 다만 다치하라 세이슈가 있을 뿐이지요. 그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패망의 길로 접어들던 무렵 일기장에 “일본도, 조선도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에게 당시 일본이란 조선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국가를 침략하고 약탈하고 차별하는 못된 가해자로 증오의 대상이었는지 모릅니다. 한편으로 조선은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는 가난하고 불쌍한 나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요. 그는 일본 사회에서 출세한 뒤에도 결코 고향을 찾아간 적이 없습니다. 과거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일까요.

일본 사회의 핍박 속에서도 민족혼과 언어와 풍습과 국적을 지킨 숱한 재일 한국인이 있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김윤규의 행적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이들이, 오늘의 평안한 시대감각으로 쉽게 논평할 일은 아닌 듯 싶군요.

하여튼, 이제 세상은 그 시절과 다르지요. 변했지요. ‘21세기의 종주국’이 된 나라 국적을 얻으려고 ‘원정 기획 출산’도 하는 마당이니. 일본 재일교포 사회 만해도 3,4세는 대부분 한국말을 모릅니다. 피는 8분이 1, 16분의 1만 한국이고요. 결혼 등으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하지만 어느 누가 그들에게 이러저런 잔소리 할 자격이 있는지 자문해봅니다. 한국 정부는 일본에 민족학교 한 개 지어준 게 없습니다. 한국, 한국인이 그들 재일한국인에게 해준 게 없기는 다치하라 세이슈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일본 도쿄=도깨비뉴스 리포터 지안 jian@dkbnews.com
김윤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