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실물 칠지도(七支刀)를 보고!

푸른하늘김 2004. 2. 4. 17:04

 

칠지도는 369년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글:장팔현
 
 
 
필자는 칠지도가 백제와 왜국 간의 고대 한.일 관계를 밝혀 줄 중요한 금석문으로 보고 석사논문은 물론 박사학위 논문으로 썼다. 그러나 앞, 뒷면에 금상감으로 새겨진 61자에 대한 해석은 한일 양국 학자들의 시각차에 따라 미묘하게 굴절되고 있다. 일본학자들은 대부분 백제로부터의 ‘헌상품’으로 보고 있고, 한국 학자들은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명문을 풀이하고 있다.

필자는 칠지도 연구를 하는 사람으로서 10여 차례가 넘게 칠지도가 신보(神寶)로 소중히 보관 돼 있는 이소노가미(石上)신궁을 찾았다. 연구 틈틈이 찾아가거나,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을 안내해서 가기도 했다. 2001년 찾아 갔을 당시 칸누시(神主-신궁의 주인)에게 칠지도를 연구하는 한국 유학생이라 밝히고 칠지도를 보여달라 하니, “벌써 2년 전에 오오사카 박물관에서 공개했다”한다. “그럼 또 언제 공개합니까?”하고 필자가 물으니,“언제 공개할지 모릅니다”라고 대답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올해 나라 국립박물관에서 2월8일까지 공개하니, 연구자로서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올해만도 벌써 1월15일 날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칠지도에 대하여 설명 해 주었고, 한 재야사학자분의 간곡한 부탁으로 내일도 또 가보게 된다. 예상외로 금상감된 명문은 신경 써서 보면 분명하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뚜렷이 보였다. 옆에 모조품으로 만든 흰색갈의 ‘모조 칠지도’를 보니, 과연 백번이나 두드려가며 만든 명품임을 금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칠지도는 양날에 세 가지가 달려있는 특이한 검(劍)으로 명문에도 나와 있듯이, ‘백병 물리치는(생벽백병)’것이라 했으니, 이 부분만 보면 이는 도교(道敎) 색채가 짙은 주술적 의미를 담은 검이라 할 수 있다. 무당이 굿할 때 신을 부르기 위해 대나무를 흔들듯이, 이러한 역할을 하던 것이 칠지도이며, 이 검만 가지고 있어도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선 칠지도 명분부터 보자!

“태화4년 5월16일 병오정양 조백련강 칠지도 생벽백병 의공공후왕 OOOO작,

선세이래 미유차도 백자왕(백제왕)세자 기생성음 고위왜왕지조 전시후세

(泰和四年 五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鍊鋼七支刀 生辟百兵 宜供供侯王 OOOO作,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聲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일본어로 된 논문을 번역하여 발표해야하나, 아직도 게을러서 못하고 있다. 다만 우선 한 가지 밝히고 싶은 것은 태화4년(泰和四年)이 중국의 동진 연호(年號)일 수 없음을 간단히 밝히고자한다.

한일 양국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부분만은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신공49년이라 하여, 50년 전까지도 일본은 이것을 증거로 ‘임나일본부’의 증거나 되는 것처럼 주장했다. 당시 관정우(菅政友-칸 세이유)나 호시노 히사시(星野恒) 같은 일본 학자들은 ‘태화’를 태시(泰始)’나 태초(泰初)’로 읽고 이 해가 바로 신공49년이며, 서기 249년이라 주장했다. 이를 억지춘향격으로 ‘일본서기’에 맞추다보니, 249년에 백제왕세자가 만들어 252년(신공52년)에 신공황후에게 헌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 기년이 ‘삼국사기’보다 정확치 않기에 이를 2주갑(60갑자 두 번)을 내려, 백제 왕세자(근구수왕)이 369년에 만들어 372년에 헌상했다고 기년을 ‘삼국사기’에 맞추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벌써 ‘일본서기’의 신뢰성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태화4년’이 동진 연호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당연히 369년제가 아님을 설명한다.

첫째: 금석문에 글을 새기기는 힘들기에 일부터 동진의 연호인 ‘태화(太和)’를 획수도 많고 새겨 넣기도 힘든 ‘태화(泰和)’의 ‘태(太)’를 ‘태(太)’로 하지 않았음이다. 오히려 무령왕이 503년에 일본의 계체 천황(남제왕)에게 보낸 우전팔번경(隅田八幡鏡) 명문에 ‘백상동(白上同-흰 색깔의 질 좋은 구리(銅)’라 했듯이, ‘구리(銅)’라 새기지 않고 쇠금변(金)을 생략하고 발음만 같은 ‘같을 동(同)’으로 새겨 넣은 예가 있다. 구리거울 명문에는 종종 있는 실례(實例)이다. 같은 구리거울 명문의 마지막 문장인 ‘이백한(二百旱)’의 ‘한(旱)’도 구리거울 원료가 되는 구리단괴 ‘200덩어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도 ‘간(桿)’이라 해야 할 것을 나무목 변을 생략하고 오른쪽 글자만 새겨 넣은 것이다. 이밖에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발견되는 구리거울 명문 속에 ‘자손번창(子孫繁昌)’을 ‘자손번창(子孫番昌 )’이라하고, ‘길상(吉祥)’의 ‘상(祥)’을 좌측 변인‘시(礻)’자를 생략하고 ‘양(羊)’으로 표기한 예도 부지기수다.

둘째:369년에 백제와 동진 간에는 국교가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372년 정월에 첫 교섭이 있었다. 왜국과의 첫 수교도 ‘일본서기’는 366년으로 보나 ‘삼국사기’백제본기는 39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또한 천관우씨 주장처럼 처음 가야에서 백제를 게 된 것을 본국 야마토 정권이 처음부터 접촉한 것으로 왜곡했을 가능성이다.

셋재: 동진의 해서공(海西公)은 371년11월에 칠지도를 왜국에 전하기도 전에 폐제(廢帝)가 되어 중국 동진의 연호가 바뀌어 있었다는 점이다.

넷째: 처음 백제 사신이 동진에 간 372년 정월에는 간문제(簡文帝)로 연호는 함안(咸安)2년이었다는 점이다.

다섯째: 왜국왕에게 줄 것이 명문에 분명히 나와 있는데도 369년에 만들어 372년에 주었다함은 어불성설이다. 그동안 3년이나 시간이 흘렀으며, 당시 백제 수도에는 동진에서 백제사신과 함께 동진 사신도 와 있었는데, 어찌 폐제가 된 임금의 연호가 새겨진 검(칠지도)을 왜국에 보낼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칠지도가 369년 제품도 아니고, 더군다나 372년에 왜국왕에게 헌상했다함은 어불성설이라는 점이다.

논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차후에 자세히 밝히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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