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급상승하는 엔화가치에 기업들 걱정 크지만 다른 대책 강구할 시간 충분해
지난 11월19일 도쿄 외환시장에서는 오후 6시30분께 엔화가치가 달러당 107엔대 중반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 직후 얼마 안 있어 엔화가치가 급락하는 일이 벌어졌다. 불과 30분 만에 엔화가치가 달러당 109엔대로 떨어진 것이다. 엄청나게 큰손이 시장에 개입해 엔화를 대규모로 팔아치우고 있다는 게 뻔히 눈에 보일 정도였다. 큰손은 역시 일본은행이었다. 엔화를 사들이는 세력에게 단기간에 거액의 손실을 입힘으로써 엔 매입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 위한 전형적인 대규모 시장개입을 단행했던 것이다. 이날 일본은행이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인 규모는 무려 181억달러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외환보유고의 7분의 1에 이르는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다.
사진/ 도쿄 긴자거리의 전광판에 외환 시장 뉴스 속보가 흐르고 있다.
일본은행의 시장개입은 강력하나…
일본 경제의 회복과 함께 엔화가치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엔화가치는 1985년 9월 이른바 ‘플라자 합의’ 이후 본격적인 상승기를 맞았다. 당시 달러당 250엔대이던 엔화는 1995년 5월 달러당 83엔대까지 쉬지 않고 상승했다. 그러나 엔화가치의 엄청난 급등에도 일본의 제조업은 큰 타격을 입지 않는 저력을 과시했다. 엔고는 비록 거품경제를 키우기는 했지만, 거품 붕괴 이후에도 엔화가치는 결코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다. 달러가치에 비해 엔의 상대적인 약세는 2002년 초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2002년 2월을 기점(달러당 133엔)으로 다시 엔 강세 시대로 돌아섰다.
올 들어 뚜렷해진 엔고 현상은 지난 9월20일 선진7개국(G7) 정상회담 이후 더욱 두드러져 마침내 심리적 저지선으로 여겨지던 110엔대가 무너진 상태다. 미국과 일본의 경기 상황으로만 보면 엔이 특별히 강세를 보일 이유는 없다. 미국의 경기 상황이 더 좋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도 외환시장 개입의 명분을 거기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막대한 경상·재정 적자가 문제다. 특히 미국의 재정적자는 통제 수준을 넘어섰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골드만삭스는 부시 정부의 대규모 감세정책과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재정 지출의 확대 등으로 올해 미국의 재정적자가 5천억달러 규모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달러에 대한 불안감을 키우고 상대적으로 엔과 유로의 가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한 나라의 통화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은 구매력이 그만큼 커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일본의 수출업체들로서는 엔고가 달가울 리 없다. 엔화가치의 상승이 수출업체의 채산성을 나쁘게 만들기 때문이다. 수출 증가를 배경으로 이제 막 회복기에 들어선 경제가 엔고로 인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우려도 팽배하다. 일본은행의 시장개입은 기업들의 이런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일본은행의 조사에서 일본 기업들은 적정 엔화가치 수준을 달러당 117엔으로 전망할 정도다. 이는 ‘예상’이라기보다 ‘기대’에 가깝지만, 많은 기업들이 급격한 엔고를 얼마나 우려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 관계자는 “일본 재계는 엔화가치가 달러당 110~120엔 수준이 적당하다고 본다”고 전했다.
미국의 산업계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시장 개입을 비판하지만, 미국 정부도 일본의 시장개입을 용인하고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미국 정부로서도 달러가치가 급락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재정적자를 메워주고 있는 해외로부터의 자금유입이 크게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급격한 엔고를 저지하기 위한 일본은행의 시장개입은 돈을 들이는 만큼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올 들어 10월까지 일본은행이 시장에서 팔아치운 엔화는 무려 16조2천억엔(약 180조원)에 이른다. 8월 말부터 9월 말 사이에는 월간 기준으로 최고액인 4조4573억엔의 시장개입을 단행했다. 그러나 8월 이후 급격한 엔고 추세는 쉽게 꺾이지 않고 있다.
사진/ 엔고는 일본 경제에 단기적인 충격은 적지만, 중장기적으로 물가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퇴근길의 일본인들.
외국인의 주식시장 움직임이 좌우할 듯
외국인들의 일본 주식 매입은 엔고를 부추기는 통로다. 앞으로 엔화가치의 추이도 일본 주식시장에서 외국인들의 움직임에 크게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주식시장의 닛케이평균지수는 지난 4월28일 연중 최저치인 7607엔을 기록한 뒤 급등을 시작해 10월20일 1만1161엔까지 무려 46%나 상승했다. 기업의 수익성 회복에 따라 외국인들이 주식을 대거 사들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엔고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알카에다의 도쿄 테러 경고와 이라크 주재 일본대사관에 대한 총격 사태, 연말 결산을 앞둔 미국 투자가들의 이익실현 움직임이 맞물리면서 닛케이지수는 지난 11월17일 1만엔이 다시 무너졌다. 그럼에도 일본의 증시분석가들은 “주식시장이 확실한 조정 국면에 진입했지만, 중장기적인 상승 추세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다”고 입을 모은다.
일본의 외환시장 참가자들도 일본의 경기회복이 가시화되는 한 정부가 시장개입을 통해 엔고 추세를 저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최근 미국 검찰이 적발한 투자신탁 부정 사건과 이라크 테러사태의 악화로 인해 달러는 주요 통화에 비해 약세를 보일 수밖에 없는 국면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의 시장개입이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올해 중에 달러당 105엔까지 엔고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시장 내 다수파의 견해”(11월21일)라고 전했다.
사진/ 기업수익 회복에 따라 외국인 투자자들이 일본 주식시장으로 몰려든 것이 엔고의 배경이 됐다. 한 빌딩 로비의 경제뉴스 TV.
엔화가치의 상승이 일본 경제에는 과연 얼마나 악영향을 주는 것일까 흔히 적정환율이라고 불리는 실질실효환율은 일본은행의 계산으로 현재 달러당 120엔 안팎이다. 이미 엔은 고평가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노무라종합연구소는 자체 모델로 분석한 결과 내년에 엔-달러 환율이 105엔 수준으로 떨어질 경우 실질 경제성장률이 0.7%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또 달러당 100엔 수준까지 떨어지면 성장률이 0.9%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보면, 실제 성장률 감소 효과는 이런 계산결과보다 적을 것이라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일본 국내 기업과 해외 자회사 사이의 무역(기업 내 무역)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90년 14.5%에서 2000년 28.5%로 늘어나 환율변동이 경제에 주는 단기적 효과는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일본경제 저력 확인하는 상징 될 수도
문제는 엔고가 일본 경제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이다. 부정적인 견해는 일본이 다시 한번 잃어버린 10년을 맞을 수도 있다는 우려로까지 이어진다. 엔고가 디플레 압력을 가중시킨다는 근거에서다. 노무라연구소 다카히데 일본경제실장은 “과거 경험으로 보면 엔고 진행 이후 수년간 일본 기업들은 해외생산·투자비율을 높여왔다”며 “엔고는 중장기적으로 디플레 압력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엔고 추세가 어느 수준까지 이어질지 전망하기는 이르고, 거품경제를 이미 경험한 일본이 다른 대책을 강구할 시간도 아직은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엔고는 일본 경제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상징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더욱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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