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소록도 갱생원에서 도쿄의 감옥으로 전범 처형된 경성제대 출신 군의관

푸른하늘김 2003. 10. 2. 22:20
소록도 갱생원에서 도쿄의 감옥으로 전범 처형된 경성제대 출신 군의관



일본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 ·100회

■ 글·김정동(문화재위원, 목원대 교수)




경성제대 출신 의사
나는 지난 여름 두 달간 도쿄에 머물렀다. 숙소는 JR 스가모(巢鴨) 역 인근이었다. 매일 스가모 역을 이용해 그 이름이 일상적이 되어 있었다. 스가모는 전후 한때 ‘스가모 프리즌(Sugamo Prison)’ 즉, 도쿄 전범 처형장이 있던 곳으로 유명했다. 《아리랑》 1997년 7월호에 「전범이 수용되어 있던 스가모 감옥」이란 글을 쓴 바 있는 나는 이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나는 평소 찾던 두 권의 책을 발견했다. 하나는 아카다 세쓰야(赤田哲也, 1923- )가 쓴 『수취인 스가모 프리즌에 재소하지 않는다』(일본, 淸進社, 1982)와 『경성대학 동창회 50년지(誌)』였다. 『경성대학 동창회 50년지』는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간 경성제대 동창회가 만든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책 모두가 아카다에 의해 쓰여지거나 편집되어 있었다.


나는 이 책에서 한 일본인 군의(軍醫)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는 서울의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일본인 미나구치 야스토시(水口安俊, 1915-49)였다. 의학부 12회 졸업생이었다. 그 미나구치가 패전 후 BC급 전범으로 스가모 감옥에서 처형되었던 것이다.(上坂冬子, 『스가모 프리즌 13호 철문』, 136-187쪽, 中公文庫, 1995)
그의 비극은 조선과 일본이 연결된 1945년 전후사의 한 모습이었다. 나는 아리랑 100회 연재물을 무엇으로 장식할까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그 군의를 택하기로 했다.

미나구치는 1915년 조선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水口爲治)는 일본 아키다 현(秋田縣) 출신인데 도쿄 쓰키지(筑地)의 공수학교(工手學校) 전공과(電工科)를 나와 조선으로 건너왔다. 경성중앙전화국 용산분국장을 지내며 6남 2녀를 낳았다. 정년하고는 북한의 오지, 아주 추운 곳의 우편국장을 지냈다. 미나구치가(水口家)는 보통 쓰는 ‘미스구치’라 하지 않고 ‘미나구치’라 했다.


미나구치는 원래 3남이었으나 형 둘이 일찍 죽는 바람에 장남 역할을 하게 되었다. 미나구치는 아버지 영향으로 용산중학을 다녔다. 그후 경성제대 예과에 들어간 것이다.
경성제국대학은 1924년 설립되었고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설치되었다. 1945년 10월 17일 미군정청이 경성제국대학을 인수, 경성대학을 설립하면서 서울대의 역사는 새로 시작되었다. 교사는 그대로 사용되었다.

미나구치는 재학 중 야구부와 아이스 하키부에 있었으며 배구부도 창단한 열성적 스포츠맨이었다. 거기 더하여 음악도 좋아해, -그 자신 만다린도 할 줄 알았다고 한다- 음악부의 지휘자 역할도 했다. 수재일 뿐 아니라 대단한 탤런트를 갖고 있던 학생이었다.
의학부 학생들은 재학 중 「토막민 조사」같은 조사활동도 했고, 소록도의 나병 갱생원에 들어가 돕기도 했다. 미나구치도 그런 일을 했다. 그 스스로 휴머니즘을 갖고 간 것이라고 했다. 소록도에 악단을 편성해 위문공연을 가기도 했다. 당시 경성제대 의학부 부장은 이마무라(今村)였는데 그도 소록도에 출입하고 있었다. 이마무라가 미나구치를 그곳에 소개한 것 같다.

나환자촌, 소록도에 들어가다
어쨌든 미나구치는 1941년 3월 의학부를 졸업 후 소록도 갱생원에 들어갔다. 전공은 안과였다.
당시 나환자는 ‘문둥이’라 불리던 시대로 천형(天刑)의 전염병이라는 인식이 강해 의사들도 잘 가려하지 않는 곳이 그곳이었다. 도시에서 의료 활동을 하길 원하던 때였으므로 그 결정은 간단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추측컨대 그는 소록도의 한 일본인 간호사 ‘K’를 사랑한 것으로 보아 재학 시 실습 때부터 좋아해 스스로 원해서 간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또한 소록도의 관사에 살며 의료뿐 아니라 다양한 탤런트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일본의 나병에 대한 대책은 1907년부터 시작되었다. 나(癩)예방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면서 였다.


그동안 나환자들은 다리 밑이나 움막에서 살거나 유랑, 걸식하는 실정이었다. 외국인 선교사나 일부 독지가에 의해 구라(救癩) 활동이 조금씩 이뤄지고 있는 정도였다. 나병은 혐오병이라 하여 집안에서 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아 정부가 그 대책을 세우게 된 것이다. 거리를 떠도는 환자가 많아 대책을 서두른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지 않은가? 문둥이라는 인식, 영화 <벤허>에서 보았던 서양 문둥이 모습….


나환자 시설은 그 대상 지역마다 설치를 반대해 병원이 들어서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병을 한센병이라 했다. 1873년 노르웨이의 의학자 헨리크 한센(G. A. Hansen)이 나균을 발견해 그 이름을 붙인 것이다. 병원이란 이름도 안 쓰고 무슨 휴양소 같은 이름을 붙였다. 그곳에 가기를 싫어하기는 환자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리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식민지 초 광주, 부산, 대구 등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사립 나병원이 있었으나 규모는 작았다. 한 예로 광주의 한 나병원은 여수로 이전하여 피크왈츠나 병원이라 하다가 여수 애양병원(愛養病院)으로 개칭되었다. 애양병원은 손양원(孫良源, 1902-50) 목사가 지켜낸 것이다. 그는 병원과 교회를 온통 나환자를 위해 베푼 것이다. 『사랑의 원자탄』이란 그의 일대기가 이를 증언해 주고 있다. 애양병원과 애양교회는 지난해 각각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보호되고 있다(2002.5.31). 나병원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이것이 처음이다. 이제 소록도 차례이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10월 일본의 선례를 들어 환자들을 일정한 장소에 격리수용 키로 하고, 남해안의 ‘섬’을 물색, 그 적지로 정한 곳이 전라남도 고흥군(高興郡) 금산면(錦山面) 소록리(小鹿里)의 소록도였다.


섬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섬 137만여 평의 약 20%에 해당하는 30여만 평의 땅과 집을 강제로 수용하여,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로 ‘소록도 자혜의원’을 설립하였다. 원래 자혜의원이란 병원은 전국에 19개가 있었는데 그 중 소록도를 한센병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병원으로 세운 것이다.

남해향 소록도의 비극
소록도의 본격적인 시작은 1917년 1월부터이다. 갱생원 본관을 비롯한 건물 47동(388평)을 점차적으로 준공하면서였다. 4월 부터는 환자 100명을 정원으로 하여 각 도로부터 후송된 환자들을 수용하기 시작하였고, 5월 17일 개원기념식을 거행하고 그해 연말까지 99명을 수용하였다. 환자는 조선인이건 일본인이건 일본식 생활을 하게 했다. 의식주 모든 것이 일본식으로 강요되었다.


이후 수용원생의 급증으로 확장공사는 계속되었다. 갱생원 병사, 직원 관사 42동과 물품 창고 2동, 광주형무소 소록도지소, 신사 그리고 소록도 일주도로도 완성했다. 전시에는 환자를 전쟁 군수물자 생산에까지 동원시키기까지 했다.

제4대 원장으로 부임한 의무관은 수호(周防正季)였다. 그는 일본 아이치 의전(愛知醫專) 출신이다. 현재의 나고야(名古屋) 대학 의학부이다. 아이치 현에서 의무관으로 근무하며 건축에 흥미를 느껴 야간학교에서 설계제도를 익혔다고 한다.


그는 1921년 조선으로 건너 와 경기도 위생과장이 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경무국 산하에 위생과를 두고 의무관을 배치했는데 지방 관서도 마찬가지였다. 위생과는 전염병 예방이 그 주임무였다.
수호는 소록도에서 원장(1933.9.1-1942.6.20)으로 근무하던 시절 대강이 만들어졌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소록도 원장은 소록도의 왕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막강한 힘으로 소록도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는 섬안에 벽돌공장을 만들고 직접 벽돌을 구워 시설재로 쓰게 했다. 이 벽돌 중 일부가 목포, 나주, 광주 등 전라도 일대에 팔려 나가 자체 운영자금으로 쓰였다.


그가 재임 중이던 1934년 병원 명칭은 조선총독부 나요양소 소록도 갱생원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는 재임 중 이곳을 ‘낙원’으로 만들겠다고 공언, 공원화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 흔적이 남은 것이 현재의 중앙공원이다.

그즈음 총독은 우가키였는데 그는 “조선에 있어서 3대 명소는 금강산, 경주의 고적, 소록도 갱생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소록도를 ‘남해의 평화향’이라 쓴 글도 있다. 김갑수(金甲洙)가 1937년 쓴 「나병환자가 살고 있는 남해의 평화향」(《조광》, 1927. 7)이 그것이다. 글은 간호부장(看護婦長) 박복순(朴福順) 양이 안내해 소록도를 돌아보는 르포 형식으로 쓰였다. 매우 세밀하게 쓰인 글이다.
그 후 소록도는 나병 시인 한하운(韓何雲, 1920-75)의 ‘황톳길’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선착장으로 이어지는 소록도의 황톳길…”

소설가 이청준(李淸俊, 1939- )도 1975년, 『당신들의 천국』을 발표, 소록도를 실명으로 해 관심을 갖게 했다.
원장이 주인공인데 그 주인공이 수호아닌가 생각된다. 소설은 나환자들에게 천국과도 같은 새 땅을 만들어 주려는 원장과 환자 사이의 의욕과 실패과정을 그린 것인데, 여기서 낙원이란 이름이 천국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원작은 주인공이 주정수인데 아마 그 일본인 원장의 이름을 빌린 것 같다.

수호 원장은 욕심이 지나쳐 자신의 생전, 동상을 세웠고 환자들에게 참배까지 하게 했다. 1942년 6월 20일, 그는 환자 이춘상(李春相)에게 척살되었다. 그는 원장의 동상을 참배하는 보은감사일(報恩感謝日)에 식도를 가슴에 품고 직원, 원생 약 3천여 명과 함께 동상 앞 광장(현 구라탑 자리)에서 원장을 죽였다.


이춘상은 법정에서, “원장이 총애하는 사또(佐藤) 간호장이 원장의 앞잡이가 되어 확장공사 등 각종 사업에 동료 원생들을 혹독하게 사역시켰기 때문에 원장을 살해하여 여론화되면 이 기회에 소록도의 비참한 생활을 적나라하게 폭로 공개하여 시정을 바라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동기를 진술했다. 간호장 사또는 수의학교 출신으로 경기도 위생과에 근무했었다.


수호 원장의 후임은 니시키(西龜三圭)였는데 그는 총독부 경무국 위생과장을 하다 왔다. 전임자의 의전 선배였고 고위자였다. 니시키의 원장 재임기간은 1942년 8월 1일부터 1945년 8월 20일까지였다. 해방이 되며 그는 일본으로 도망갔는데 전범재판 때 미나구치의 증인으로 나오기도 했다. 미나구치는 소록도에 근무 중 그 두 원장과 함께 했었던 것이다.


그 소록도가 지금 급변하고 있다. 고흥군은 지난 해 ‘소록도를 국제적 해양관광단지로 개발할 계획’이라고 했다. 골프장과 호텔, 콘도를 짓겠다고 한다. 이제 도로가 놓이고 대로가 뚫릴 것이다. 정신없는 짓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복지부가 ‘관광지 개발은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하루속히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 조치해야 할 일인 것이다.

전범적 사실
1937년 11월 7일 마이니치 신문(每日新聞)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도했다.
“일제 때인 1936년 부터 40년 사이에 소록도 갱생원에서 한센병 환자인 남성 8백 40명이 반강제로 불임수술을 받은 사실이 최근 발견된 ‘소록도 갱생원 연보’에 의해 확인됐는데 그 전원이 조선인이었다.”

불임수술은 단종술(斷種術)이라 하는데 반인륜적 행위였다. 소록도에서의 단종술은 1936년 부터 행해 졌다. 당시 이곳에는 의사 10명과 간호원 50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미나구치도 그 수술을 행한 자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반인륜적 의료행위를 했던 것이다. 1940년 이후 1945년 패망 때까지는 아마 더 많은 시술이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가 병역면제가 가능한데도 군대를 지원해 간 것이다. 그는 1943년 전쟁 말기 군의예비원이 된 것이다. 단종술을 행한 것에 대한 부담 때문에 군대로 도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미나구치는 조선부로( 虜)수용소 제 1분소, 속칭 인천수용소의 육군 군의 소위로 배치되었다. 부대장은 노구치(野口 讓) 대령이었다. 조선인 약 40명도 이곳에 끌려와 경비병과 노무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미나구치는 위생부에 속했다.


그때 그는 인천에서 나카무라가(中村家)에 하숙을 했다고 한다. 그 집은 같은 군의였던 나카무라의 집이었다. 그는 패전 4개월 전 쯤 쓰다영학숙(津田英學塾) 출신인 유키코(雪子)와 결혼했다. 처는 춘천 상공회의소 두취의 딸이었다.

그가 일하던 인천 포로수용소에는 미군, 영국군, 오스트라리아인 5-60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싱가포르에 영국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는데 싱가포르가 미군에 함락 당하자 그 포로수용소를 급히 인천으로 옮겼던 것이다. 포로들은 인천의 전매국에서 강제노동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 용산에는 또 다른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패전 전 새로 만든 것인데 카타구라(片倉)제사의 건물을 차용한 것이다. 포로들은 붉은 벽돌조 3층 창고 건물에 수용되었다. 그 옆의 사무소 건물은 장교가 그리고 병졸과 군속들은 운동장 쪽의 작은 집을 사용했다. 포로들이 병졸과 군속보다 좋은(?) 건물을 사용했다. 추위 때문이었다고 한다. 현재의 미군부대 내이다. 인천 포로수용소보다는 조건이 좋았다. 조선에 온 포로들은 남방에서부터 왔는데 급히 급조된 수용소에 들어간 것이다.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항복했다. 연합군 포로들은 승전국 군인이 되었다. 반대로 일본군은 패전군으로서 체포되어야 했다.
1945년 9월 점령군으로 미 제 1군의 선발대가 김포 비행장을 통해 들어 왔다. 조선호텔을 접수한 미군 장교들은 이곳에서 패전 일본군과 교섭을 했다. 그들의 첫 작업은 연합군 포로의 석방, 일본군의 무장해제 그리고 일본군이 쓰고 있는 군용 건물 중에서 우선 연합군의 숙소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일들은 도쿄의 연합군사령부에서 내는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포로수용소는 대부분 미군의 손에 넘어 갔다. 미군이 군형무소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스가모 감옥에서
포로수용소의 일본군은 증거 은폐를 할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악질적 장졸들 11명만 체포되어 인천소년형무소에 구속되었다. 3개월 정도 지난 후 미군 MP의 호송 하에 요코하마로 갔고 이어 도쿄의 스가모 감옥에 들어갔다. 서울에서는 재판조차 못해 본 것이다.


미나구치도 전후 인천에서 미 8군에 체포되어 일본으로 보내졌다. 스가모 감옥에 수용된 것이다. 그 후 1945년 12월 27일 요코하마에서 재판을 받고 1949년 2월 12일 ‘부로학대사망기여( 虜虐待死亡寄與)’라는 죄목으로 스가모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진다.


부로는 포로라는 뜻이다. 당시 포로수용소 소속 의사는 대개 생체해부실험에 대한 죄악으로 처벌되었는데 그는 범죄 행위가 포로학대였다. 그들 스스로도 후쿠오카의 구슈대(九州大)에서 생체 해부 했던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정도이다. 포로학대는 포로에게 줄 약품을 투여하지 않고 의료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약품은 인천 도립병원과 적십자병원에서 온 것인데 횡령했다는 것이다.


미나구치는 인천에 있으면서 치료기구, 약 등을 소록도 갱생원으로 보냈던 것 같다. 그것이 그가 약을 빼돌린 혐의가 된 것일지 모른다.
그는 스가모 감방에서 고향 조선을 회상한다. 그의 인생 전부였던 산하를 그리워한다.

인천 집에 두고 온 책도 생각한다. 군산 출장을 갔을 때를 회고하기도 한다. 특히 소록도의 병사(病舍)와 평소 걷던 그 길들을 생각해 낸다. 의학서적과 역사서, 성경 등을 읽으며 회한을 달랜다. 찬송과 「고린도 전서」 16장을 특히 좋아했다.
소록도에 있는 간호사 K로부터 감옥으로 온 그림엽서를 보며… ‘아름다운 소록도’를 그리워한다.
감옥에서 쓴 그의 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48년 4월 9일(금)
신문은 하마마쓰(浜松)에서의 센징과 일본인과의 대충돌을 크게 보도하고 있다. 조선인!!
나는 30여년을 조선에 살며 그 눈으로 조선인을 봐왔다. 거기에서는 장점과 단점이이라는 민족적인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추운 바람을 맞고 낡고 더러운 옷을 걸친 수많은 조선인이 눈앞에 떠오른다.

4월 29일(목)
일본에 와 있는 조선인이 나쁜 일을 해 신문에 실리고 있다. 우리의 목사 라이안 대위를 사살한 것도 센징인 것 같다. 조선인이라 하면 소생에게는 다종다양한 모습으로 관련되어 생각이 나고 머리에 떠오른다. 지금쯤 우이동(牛耳洞)의 계류에 진달래가 만개하고 있겠지….

사형집행은 대개 금요일 새벽 무렵에 이뤄졌다. 사형수들에게 목요일 밤은 참담한 날이 된다. 더구나 그날 식사에 사시미가 나오면 그날이 처형날인 것이다.
미나구치는 목요일 밤 스가모 프리즌 사형수동(5C동)으로부터 나와 동북 쪽 모서리에 있는 처형장으로 간다. 콘크리트 담의 ‘13호’라 찍힌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13계단의 끝에 교수대가 있다.
그는 소록도의 간호사 K에게 유서를 썼다. 1949년 2월 11일 오후 11시 35분이다.

아름다운 소록도에서 당신의 지도, 원조에 감사합니다.

다음날 2월 13일자 일본의 신문들은 처형 사실을 보도했다.


“전시 중 전시법규와 관습을 위반해,… 원(元) 군의 중위 미나구치 야스토시(조선 인천에서의 포로학대)는 12일 이른 아침, 미 제 8군의 손에 의해 스가모 구치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소위였는데 중위로 오보하고 있다. 보통 사형집행은 일본의 원지, 석원도(石垣島) 해군경비대에서 온 처형 팀이 시행했는데 이 날은 미 제 8군이라 했다.
미나구치는 아마 불행한 조선 출신 군의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 땅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은 그였다. 일본인이지만 일본은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는 체포되어 처음 일본 땅을 밟은 것이고 그나마 교도소였다. 그는 33년 9개월을 살다가 갔다. 지금 그의 이름은 이케부쿠로(池袋)의 호국사(護國寺) 전범처형자 동판에만 남아 있다.

동경전쟁재판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한 전범자는 911명이었다. 그들은 교수형이나 총살형을 당했다. 그 외 구금 중 이런 저런 사유로 죽은 사람은 151명이다. 합계 1,062명이다. (『전쟁재판 처형자 1천』, 신인물왕래사, 277쪽, 1993)

그런데 전후 전범들은 모두 부활했다. 야스쿠니 신사 뿐 아니다. 일본의 도처에 국수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오늘 스가모 역전의 신문도 우익의 소리를 담은 기사뿐이다.



월간 아리랑 arirang21@arirang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