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그러고 보니 벌써 10년째네요"

푸른하늘김 2003. 9. 2. 23:58
"그러고 보니 벌써 10년째네요"


동북아시아의 평화 축제로 자리 잡고 있는 통일 마당


글:박철현







"처음에 통일 마당을 개최했을 때는 한 100명정도 모였나? 완전히 집안잔치였죠. 그런데 지금 보세요. 계속 꾸준하게 해 온 보람이 있어요. 이젠 완전히 통일과 평화, 그리고 연대를 위한 축제로 자리 잡았지요. 힘들지만 이렇게 모여주신 여러분들이 재미있게 즐기고, 가슴으로 느끼는 통일 마당이 되었으면 합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31일, 모처럼 시원한 소나기가 내려 대지를 촉촉하게 적셨다. 그리고 일본 동경의 아라카와구에 자리잡은 구진사 소학교에서는 벌써 10년째를 맞이하는 '제 10차 통일 마당'이 그 촉촉함과 더불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정신 계승과 국가보안법 철폐, 그리고 한민족의 평화적 통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역설한 한통련 도쿄본부 양병용 위원장의 개회 선언으로 막이 오른 이번 통일마당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전쟁없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기원하는 축제의 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양 위원장의 개회선언후, 동경조선 제1초중급학교에 다니는 앳띤 여학생들이 소고춤을 추면서 회장 분위기를 달구었고, 청중들은 박수를 치면서 그들에게 화답하고,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면서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다.







회장 주변에는 불고기와 파전을 비롯한 비싸다고 소문난 한민족 전통음식들이 아주(?) 싼 값에 제공되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정신대 할머니들과 효순이 미선이 살해 사건에 관한 플래카드와 벽보들이 걸려 있었다.

정신대 할머니들의 8월 도일 투쟁에 관한 사진을 유심히 쳐다 보고 있던, 닛포리에 산다는 타카가와(高川)씨는 "이것(정신대 할머니들의 투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참 일본인으로서 부끄럽죠. 일본 정부가 빨리 사죄를 해야 될텐데 말이죠(本当に日本人として恥ずかしいんですよ。日本政府が早く謝罪をしないとだめですよね。)"라고 한숨을 내쉰다.

갑자기 무대에서 "앞으로 또다시 앞으로"라는 민중가요가 들려 온다. '시티즌'이라는 상표로 유명한, 일본에 적을 둔 시계 제조 회사의 일방적인 생산공장 위장폐업에 맞서 220일간 한국에서 투쟁을 계속해 오다가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일본 본사와 직접 면담을 하기 위해 건너왔다고 하는 "한국시티즌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다.

결의에 찬 눈빛과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위장 폐업 철폐, 고용 승계"를 외치면서, 일본 내의 진보적인 노동조합 단체들과 함께 투쟁을 외치는 한국 시티즌 노동조합의 김기선(41) 부위원장은 일본 본사의 일방적인 행태에 분노를 감출 수 없다면서 지금의 심경을 털어 놓았다.



"올해 1월 22일입니다. 갑자기 회사측에서 일방적으로 위장폐업을 했어요. 경영상의 문제를 들어서 말이죠. 기존의 어용노조 위원장과 한국 생산 공장의 사장은 도주를 했고요. 회사에 물어보았죠. 웬 폐업이냐? 78년도에 건설되어서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이 잘 굴러 오고 있는데, 아무리 경영자지만 어떻게 종업원들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폐업신고를 할 수 있느냐 이건 경영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 도의의 문제 아닙니까?"

"더 기가 막힌 건 해외 생산 공장을 철수시키겠다는 일본 본사측이 중국에 생산공장을 다시 차렸다는 겁니다. 우리한테 한 이야기를 다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어 버린 우리가 무얼 해야 합니까? 오죽하면 흔히 관리직이라고 하는 공장장도 우리와 같이 투쟁하겠습니까?"

"그래서 왔어요. 한국에서 아무리 투쟁해 봐도, 대답 없는 메아리입니다. 그래도 일본내의 전노협(전국 노동자 협의회), 전노련(전국 노동자 연합), 일한민중네트워크등의 진보적인 노동, 시민단체들이 도와주시고 연대의 의지를 표명해 주셔서 도움이 됩니다. 9월 3일 타나시에 있는 일본 본사앞에서 직접 투쟁을 벌일 계획입니다. 이번에 저희는 끝장을 볼 생각으로 왔습니다."

한국 시티즌 노동조합의 연대 공연이 끝난 후, 재일동포 어머니들의 서클인 '노래회', '장고서클'의 민족 동요, 장고 연주을 지나 '요츠와 쥬곤의 집'이라고 하는 언더그라운드 일본인 가족 밴드의 평화 콘서트가 1부의 대미를 장식했다.

내빈 소개가 이어지는 동안, 제1회 통일마당에서 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재일한국청년동맹 도쿄본부 박명철 위원장을 만나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사람들도 많이 오고, 뿌듯하실 것 같은데 소감이 어떻습니까?
"역시 처음에 시작했을 때는, 오늘 모이신 분들의 약 1/3, 1/4정도 밖에 안 오셨죠. 시간도 2시간 정도 짧았고, 프로그램도 그다지 많지 않았고. 시간 어떻게 때우나 하는 걱정도 했었죠. 가족들의 잔치 였다고 해야 하나?(웃음) 그런데 지금 보세요. 한 10년동안 통일마당 행사가 계속 열리고 호응이 좋고 그러니까, 정말 많은 분들이 모여 주셔서 너무 기분 좋습니다. 이젠 4시간도 짧아요."

-통일 마당 행사의 경우, 비슷비슷하지만 매년 주제가 다른데요. 이번 통일 마당은 어떻습니까?
"주제는 6·15 남북공동선언의 정신 계승과 국가보안법의 철폐입니다만, 보다 깊은 주제는 동아시아의 평화, 그리고 차별없는 사회입니다. 일본내에서 재일동포가 받는 차별은 물론, 부락민들이 받는 차별, 그외 사회적 약자들이 부당하게 받고 있는 대우를 없애자는 것이죠. 그래서 종국적으로는 민족과 국경을 넘어 한일관계의 우호와 더불어 반전과 평화가 자리잡은 동북아시아를 기원한다는 것이 이번 통일 마당의 주제입니다."

-한청이 주도적으로 통일 마당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위원회에도 결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니에요. 우리만 한다고 해서 되겠습니까?(웃음) 지금은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같이 하지 않으면 반쪽짜리 행사가 될 정도로 너무나 많은 도움들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전수도 도쿄 수도 노동조합이 이번 행사에 '같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매년 통일 마당은 8월 마지막주에 열리는 데요. 이유가 있습니까?
"예. 우선은 관동대지진에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는 뜻도 있고요. 아무래도 학생들이 아직 방학이니까 방학의 마지막에 즈음해서 가족들끼리 손에 손잡고 놀러와서 신나게 놀면서 자연스럽게 이것저것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서요."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어요. 그래도 또 내년을 생각하면서 이겨내야죠. 통일마당만 기다리고 계신다는 분들도 많으시니까."(웃음)

내빈 소개가 끝나고 자연스럽게 2부 순서로 넘어 간다. 일본 국제태권도협회 아라카와 도장의 생도들이 '태권도'라는 이름이 한글로 쓰여진 도복을 입고 나와 각종 시범을 보인다. 강인하고 실전적인 남쪽의 품세와, 춤을 추듯 자연스럽지만 속은 강인한, 내강외유의 북한 태권도를 동시에 시연한다. 일본에서 보는 태권도는 38선의 경계를 넘어, 하나가 된다.





태권도 시범이 끝나고, 한청과 조청, 즉 재일 한국인 3세들과 재일 조선인 3세들이 무대위에 서서 퍼포먼스를 벌인다. 민족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어진 38선의 경계가 이곳 현해탄 너머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는 화합의 장을 연출한다. 그리고 그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부르는 '바다처럼'. 민족의 통일과 아시아의 평화가 성큼 다가온 것 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이번 축제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두 그룹이 무대위에 오른다. 오키나와 출신으로 1977년 '하이사이오지상'으로 데뷔한 이래 오키나와 밴드의 선구자라고 불리우고 있으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꽃을(꽃)'으로 오리콘 챠트는 물론, 해외의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키나 쇼키치'. 그리고 지난 6월 '오! 통일 코리아' 콘서트에서 윤도현 밴드와 더불어 열광의 무대를 연출한 '금강산 가극단 향'이 그 주인공들이다.

키나 쇼키치는 무대위에 올라서자 마자 마이크를 쥐고 포효한다.

"세계에서 민족간의 분쟁이 있는 곳은 한반도 밖에 없다. 그러나 38선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지금 이곳 일본에서 우리는 38선을 넘어 하나가 되고 있다. 민족간의 정쟁, 인종간의 차별을 넘어서서 동북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힘쓰는 한민족, 일본민족이 되길 기원하며,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사랑의 꽃이 피길 진심으로 바란다."

오키나와 특유의 민요풍 연주가 관객들을 일으켜 세운다. 덩실덩실 춤추는 관객들이 무대위로 오르고 비로소 무대와 객석간의 거리는 사라지고, 한국의 북과 오키나와의 북은 절묘한 화음으로 서로 호응한다. 오리지널 '아리랑'과 자신이 번역한 일본어 가사의 '어레인지 아리랑'으로 스테이지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그를 만났다.



-이런 축제에 참가한 기분 어떻습니까?
"살아 있다는 기분과 향기를 느낀다. 비로소 내가 살아있다는 그런 느낌, 그리고 인간만이 뿜어낼 수 있는 인간의 향기(웃음)"

-오키나와 출신으로써 오키나와의 독특한 음악을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 알린 선구자라고 까지 불리고 있는데.
"무슨 그런 농담을(웃음). 오키나와의 아픔을 초월하고자 노력할 뿐이에요. 세계 평화와 동북아시아 평화, 차별없는 일본 사회,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통일."

-일본의 정치인들이 점점 우익화 되어가고 있는데.
"엄청나게 위험해요. 정치가들은 다 바보들. 특히 일본의 정치인들은 바보투성이죠. 어떻게 하면 자기네들 자리나 연명해 볼려고 하는 족속들이지. 밸런스를 잡지 못하는 양반들이지."

-앞으로 어떤 음악을 해 나가고 싶으세요?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음악."

그리고, 통일 마당의 피날레를 장식한 "금강산 가극단 향"은 드럼이 가미된 예의 4인조 장구 연주로 관객들을 감동의 늪으로 빠뜨린다. 장새납 연주가 추가 되고, 앞서 한청과 조청의 젊은이들이 향의 연주가 끝날 즈음 어느새 갈아입었는지 사물놀이 복장을 하고 객석을 한바퀴 돈다.




모두들 일어나서 사물놀이 패들과 어울린다. 끝나지 않는 수십가지 버전의 '아리랑'과 '뱃놀이'의 후렴구를 다 같이 합창하면서 원을 그리면서 춤을 춘다. 어린아이를 목마태운 젊은 주재원 아버지와 엊그제 유학왔다는 갓 스무살 넘은 유학생과, 7년전부터 통일 마당만큼은 구경한다는 65살 재일동포 어르신과, 한글을 전혀 말하지 못하지만 마음은 한민족이라고 부끄럽게 얘기하는 재일동포 3세 여자아이.

강강술래는 계속되고, 뱃놀이의 후렴구는 끊이지 않는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니 모두들 하나가 된 그 광경을 휘영청 밝은 달이 내려다 보고 있다. 8월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