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80주년 특집
치바 관음사 <위령의 종>은 어떻게 세워졌나
글:강동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관동지역에 진도 7.9의 대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이 천재지변 속에 힘없는 조선인들은 경찰과 관(官)의 조직적인 유언비어로 인해 무참히 살해당해야 했습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무슨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그렇게 이승에서의 한 많은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올 해로 학살 80주년을 맞이합니다만,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에서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있고, 세월에 묻혀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현실을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하며, 몇차례에 걸쳐 그 진실의 일단이나마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월간 아리랑'(대표 김종영)에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학살 조선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종소리
매년 9월이 되면 교민들은 치바 관음사(觀音寺)를 찾아 위령제를 올린다. 마침 관음사에는 한국 범종이 하나 있으며, 교민들이 이곳에 모여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종루에는 보화종루라고 한자로 쓰여 있다. 그러나 주변에는 이 종이 어떻게 여기에 서게 되었는지 유래를 알려줄 만한 것이 없다. 이 절의 세키야 주지를 비롯해 소수의 사람만이 '현대극장 김의경 대표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다'고 알고 있을 뿐이다.
희곡 쓰기 위해 찾아간 현장
이 종과 함께 늘 거명되던 김의경 선생은 현대극장 대표 이후 여러 활동을 거치면서 지금은 공연문화 산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있었다. 선생에게 전화를 하여 치바의 위령종과 관련하여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전화를 받고 김의경 선생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85년 9월 1일 종이 건립된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치바의 위령종을 물오온 사람이었으니, 놀라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간 누구도 관동대지진이나 치바의 위령종에 대해 물어온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관음사에 위령종이 들어서기 전 그가 치바를 찾게 된 것은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을 다룬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란 희곡을 쓰면서이다. 국내에서는 관동 지진을 다룬 유일한 작품으로 85년도에 무대 상연이 되었는데, 작품을 쓰면서 학살의 현장을 방문하고 싶어서 찾아간 곳이 치바 야치오시에 있는 학살 현장이었다.
"절 밖에 학살 현장이 있는데, 지금처럼 집이 많지 않고 밭두덕에 위령나무 팻말 몇 개가 꽂혀 있었다. 그걸보니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그길로 찾아간 것이 서울신문 동경특파원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신우식씨였다.
85년 5월 모임 발족
그는 한참 종과 종루 만들던 과정을 이야기 하다가 "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추진위원장은 신우식씨였거든."라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후 김의경 선생은 신우식 선생이 명예회장으로 있는 프레스센터 대한 언론인회를 찾았다. 위령의 종 취재를 계기로 아주 오랜 만에 두 분은 만나게 된 것 같았다.
신우식 선생은 당시 위령의 종에 새길 명문(銘文)과 자료들을 내 놓았다.
신우식 선생은 85년 5월 발족한 '관동대진재 한국인 희생자 위령의 종 보내는 모임'의 추진위원장이었으며, 당시에는 서울신문사 편집제작이사였다. 보통 정치부나 경제부가 아닌 문화부장 출신이 신문사 사장이 된 경우는 아주 드문데, 신우식 선생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신우식 선생이 가지고 있는 위령의 종 자료를 본다.
"범종 높이 1m, 무게 200kg, 종루는 여섯자 한 평 넓이에 놀이 4m로 순 한국식 건축 양식과 전통적인 단청을 입혔다. 지부에 올려진 기와 1천 장도 한국에서 가져오는 등 모든 건축 자재는 우리 것을 사용했다."
공연 열어 건립비 모금
마침 그때 서울신문사는 종로에 있는 보신각 종의 주조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함께 만들게 되었는데, 보신각 종의 100분의 1크기로, 보신각 종을 만든 성종사에서 주조했다. 서울 신문사가 보신각 종 주조 한 덕을 상당히 보았다고 김의경 선생은 회상했다.
당시 건립을 취한 추진 일정 메모에는 종 건립을 위한 목표액은 500만원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보다 6배나 많은 3천만원이 들었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모금 공연이 신라호텔에서 열렸다. 가수들의 노래 공연을 보면서 식사를 하는 티켓을 판 것이다. 가수들은 출연료 없이 공연을 했다고 한다. 공연에는 사회 뽀빠이 이상룡, 가수 이선희, 주현미, 패티김 등이 참가했다. 당시 공연장 사진을 보면 앙드레김, 극작가 차범석 씨, 동요 '반달'의 윤극영 씨, 국제한국학 연구소의 최서면 씨, 국회의원 이종찬 씨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에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김강섭 KBS악단장, 가요평론가 임백천 씨, 중앙일보 논설위원 손기상 씨, 연출가 표재순 씨 등이 공연을 많이 도왔다고 한다.
"식사표는 2만 5천원에 팔았는데, 신라호텔에 준 비용이 2만원이야. 1백만원 벌기 위해 1천만원 쓴 꼴이랄까. 공연으로 돈은 많이 모으지 못했어."
공연외에도 보신가종의 모형을 팔아 보탰다. 그럼에도 돈은 별로 모으지 못했다고 두 분은 입을 모았다.
종루 재료는 모두 한국에서 가져와
종은 이렇게 경비를 모아 만들었으나, 운반비가 모자랐다. 종은 부산까지 내려가 요코하마 항을 거쳐 운반되었다. 그런데 이 운반비가 적지 않았다. 운반비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을 때 당시 보험협회 사장이던 홍순길 씨가 비용을 부담했다. 운반비가 5백만원이나 들었다고 한다.
종루를 짓는데는 현재 공주민속박물관의 심우성 관장이 도맡아 진행했다.
"종루는 한국 나무와 한국 흙, 한국 기와로 만들었고 단청도 순 조선식 자연 염료로 하였다. 단청, 목수, 기와는 분야에서 최고의 기능공들이 했다."(김의경)
글씨는 소설가이며, 옛 민중일보 편집 국장을 하다 진보당 사건으로 투옥 경험이 있는 송지영 씨가 KBS 사장할 때 쓴 것이다. " 보화(普化)란 불교 용어로 좀 풀이가 어려운데 그런 사건이 있게 한 과거 일본 국민의 감정, 우리 국민의 감정을 푸는 그런 뜻이 담긴 것으로 알고 있다."고 김의경 선생은 말했다.
제막식에 한 · 일 인사 200여 명 참석
제막식은 9월 1일이었다. 종루의 지붕 꼭대기가 미완성인 채로 이루어진 제막식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약 200명의 인사들이 참석했다. 국경과 종파를 넘어 한국과 일본 승려들이 참석해 불공을 올렸고, 재일 무용가 박정자 씨가 살풀이 춤을 추었으며, 당시 정순일 공사가 제막식에 참석했다.
"종을 제막하면서, 관음사 주지에게 종을 매년 구월 초하루 12시에 한 번만 쳐달라고 부탁했지. 그런데 지금 전기로 연결해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치고 있대, 허허" (김의경)
김의경 선생은 "다른 사람을 착취해서 종을 만들었다"고 표현했다. '착취'해서 종을 만들어 놓고, 그 준공기도 만들지 못했다고 '착취당한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떨치지 못했다. 그리고 80주년이 될 때는 준공기 동판을 만들고 수리도 한 번 하고 싶다고 했다.
준공기는 만들지 못햇지만, 당시 신우식 위원장은 준공기에 새길 위령의 종의 유래를 적은 명문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명문은 ' 억울하게 죽은 한국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종을 봉헌한다. 묻혔던 역사는 뜻있는 일본인들이 치부를 캐내 '선인습래(鮮人襲來)'란 유언비어의 허구성과 슬픈 진상을 세상에 드러냈다. 어두운 역사를 슬퍼할 지언정 오늘의 일본인을 꾸짓고 싶지 않다. 광복 40주년, 한일협정 20년(관동대진재 62주년)에 이 종을 바치면서 이 메아리가 한국 · 일본인의 가슴에 닿아 서로 뜨겁게 손잡는 진원이 되길 바란다.'고 되어 있다.
이 명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되어 있다.
"편안히 잠드소서. 과오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겠으니."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약속을 지키고 있는지,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물음이 긴 여운으로 남았다.
「관동대진재」 80주년 추모제 행사
·일시 2003년 8월 31일 12시~15시.
·장소 일본 치바현 야치요시 소재 관음사 경내.
(日本國千葉縣八千代市 高津 觀音寺)
daipapa25@hotmail.com 김수종
http://www.onekorea.jp (한국어) 재일 코리안 인터넷 신문
http://www.jp.onekorea.jp (일본어) 재일 코리안 인터넷 신문

치바 관음사 <위령의 종>은 어떻게 세워졌나
글:강동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관동지역에 진도 7.9의 대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이 천재지변 속에 힘없는 조선인들은 경찰과 관(官)의 조직적인 유언비어로 인해 무참히 살해당해야 했습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무슨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그렇게 이승에서의 한 많은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올 해로 학살 80주년을 맞이합니다만,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에서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있고, 세월에 묻혀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현실을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하며, 몇차례에 걸쳐 그 진실의 일단이나마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월간 아리랑'(대표 김종영)에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학살 조선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종소리
매년 9월이 되면 교민들은 치바 관음사(觀音寺)를 찾아 위령제를 올린다. 마침 관음사에는 한국 범종이 하나 있으며, 교민들이 이곳에 모여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종루에는 보화종루라고 한자로 쓰여 있다. 그러나 주변에는 이 종이 어떻게 여기에 서게 되었는지 유래를 알려줄 만한 것이 없다. 이 절의 세키야 주지를 비롯해 소수의 사람만이 '현대극장 김의경 대표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다'고 알고 있을 뿐이다.
희곡 쓰기 위해 찾아간 현장
이 종과 함께 늘 거명되던 김의경 선생은 현대극장 대표 이후 여러 활동을 거치면서 지금은 공연문화 산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있었다. 선생에게 전화를 하여 치바의 위령종과 관련하여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전화를 받고 김의경 선생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85년 9월 1일 종이 건립된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치바의 위령종을 물오온 사람이었으니, 놀라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간 누구도 관동대지진이나 치바의 위령종에 대해 물어온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관음사에 위령종이 들어서기 전 그가 치바를 찾게 된 것은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을 다룬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란 희곡을 쓰면서이다. 국내에서는 관동 지진을 다룬 유일한 작품으로 85년도에 무대 상연이 되었는데, 작품을 쓰면서 학살의 현장을 방문하고 싶어서 찾아간 곳이 치바 야치오시에 있는 학살 현장이었다.
"절 밖에 학살 현장이 있는데, 지금처럼 집이 많지 않고 밭두덕에 위령나무 팻말 몇 개가 꽂혀 있었다. 그걸보니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그길로 찾아간 것이 서울신문 동경특파원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신우식씨였다.
85년 5월 모임 발족
그는 한참 종과 종루 만들던 과정을 이야기 하다가 "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추진위원장은 신우식씨였거든."라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후 김의경 선생은 신우식 선생이 명예회장으로 있는 프레스센터 대한 언론인회를 찾았다. 위령의 종 취재를 계기로 아주 오랜 만에 두 분은 만나게 된 것 같았다.
신우식 선생은 당시 위령의 종에 새길 명문(銘文)과 자료들을 내 놓았다.
신우식 선생은 85년 5월 발족한 '관동대진재 한국인 희생자 위령의 종 보내는 모임'의 추진위원장이었으며, 당시에는 서울신문사 편집제작이사였다. 보통 정치부나 경제부가 아닌 문화부장 출신이 신문사 사장이 된 경우는 아주 드문데, 신우식 선생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신우식 선생이 가지고 있는 위령의 종 자료를 본다.
"범종 높이 1m, 무게 200kg, 종루는 여섯자 한 평 넓이에 놀이 4m로 순 한국식 건축 양식과 전통적인 단청을 입혔다. 지부에 올려진 기와 1천 장도 한국에서 가져오는 등 모든 건축 자재는 우리 것을 사용했다."
공연 열어 건립비 모금
마침 그때 서울신문사는 종로에 있는 보신각 종의 주조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함께 만들게 되었는데, 보신각 종의 100분의 1크기로, 보신각 종을 만든 성종사에서 주조했다. 서울 신문사가 보신각 종 주조 한 덕을 상당히 보았다고 김의경 선생은 회상했다.
당시 건립을 취한 추진 일정 메모에는 종 건립을 위한 목표액은 500만원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보다 6배나 많은 3천만원이 들었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모금 공연이 신라호텔에서 열렸다. 가수들의 노래 공연을 보면서 식사를 하는 티켓을 판 것이다. 가수들은 출연료 없이 공연을 했다고 한다. 공연에는 사회 뽀빠이 이상룡, 가수 이선희, 주현미, 패티김 등이 참가했다. 당시 공연장 사진을 보면 앙드레김, 극작가 차범석 씨, 동요 '반달'의 윤극영 씨, 국제한국학 연구소의 최서면 씨, 국회의원 이종찬 씨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에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김강섭 KBS악단장, 가요평론가 임백천 씨, 중앙일보 논설위원 손기상 씨, 연출가 표재순 씨 등이 공연을 많이 도왔다고 한다.
"식사표는 2만 5천원에 팔았는데, 신라호텔에 준 비용이 2만원이야. 1백만원 벌기 위해 1천만원 쓴 꼴이랄까. 공연으로 돈은 많이 모으지 못했어."
공연외에도 보신가종의 모형을 팔아 보탰다. 그럼에도 돈은 별로 모으지 못했다고 두 분은 입을 모았다.
종루 재료는 모두 한국에서 가져와
종은 이렇게 경비를 모아 만들었으나, 운반비가 모자랐다. 종은 부산까지 내려가 요코하마 항을 거쳐 운반되었다. 그런데 이 운반비가 적지 않았다. 운반비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을 때 당시 보험협회 사장이던 홍순길 씨가 비용을 부담했다. 운반비가 5백만원이나 들었다고 한다.
종루를 짓는데는 현재 공주민속박물관의 심우성 관장이 도맡아 진행했다.
"종루는 한국 나무와 한국 흙, 한국 기와로 만들었고 단청도 순 조선식 자연 염료로 하였다. 단청, 목수, 기와는 분야에서 최고의 기능공들이 했다."(김의경)
글씨는 소설가이며, 옛 민중일보 편집 국장을 하다 진보당 사건으로 투옥 경험이 있는 송지영 씨가 KBS 사장할 때 쓴 것이다. " 보화(普化)란 불교 용어로 좀 풀이가 어려운데 그런 사건이 있게 한 과거 일본 국민의 감정, 우리 국민의 감정을 푸는 그런 뜻이 담긴 것으로 알고 있다."고 김의경 선생은 말했다.
제막식에 한 · 일 인사 200여 명 참석
제막식은 9월 1일이었다. 종루의 지붕 꼭대기가 미완성인 채로 이루어진 제막식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약 200명의 인사들이 참석했다. 국경과 종파를 넘어 한국과 일본 승려들이 참석해 불공을 올렸고, 재일 무용가 박정자 씨가 살풀이 춤을 추었으며, 당시 정순일 공사가 제막식에 참석했다.
"종을 제막하면서, 관음사 주지에게 종을 매년 구월 초하루 12시에 한 번만 쳐달라고 부탁했지. 그런데 지금 전기로 연결해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치고 있대, 허허" (김의경)
김의경 선생은 "다른 사람을 착취해서 종을 만들었다"고 표현했다. '착취'해서 종을 만들어 놓고, 그 준공기도 만들지 못했다고 '착취당한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떨치지 못했다. 그리고 80주년이 될 때는 준공기 동판을 만들고 수리도 한 번 하고 싶다고 했다.
준공기는 만들지 못햇지만, 당시 신우식 위원장은 준공기에 새길 위령의 종의 유래를 적은 명문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명문은 ' 억울하게 죽은 한국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종을 봉헌한다. 묻혔던 역사는 뜻있는 일본인들이 치부를 캐내 '선인습래(鮮人襲來)'란 유언비어의 허구성과 슬픈 진상을 세상에 드러냈다. 어두운 역사를 슬퍼할 지언정 오늘의 일본인을 꾸짓고 싶지 않다. 광복 40주년, 한일협정 20년(관동대진재 62주년)에 이 종을 바치면서 이 메아리가 한국 · 일본인의 가슴에 닿아 서로 뜨겁게 손잡는 진원이 되길 바란다.'고 되어 있다.
이 명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되어 있다.
"편안히 잠드소서. 과오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겠으니."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약속을 지키고 있는지,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물음이 긴 여운으로 남았다.
「관동대진재」 80주년 추모제 행사
·일시 2003년 8월 31일 12시~15시.
·장소 일본 치바현 야치요시 소재 관음사 경내.
(日本國千葉縣八千代市 高津 觀音寺)
daipapa25@hotmail.com 김수종
http://www.onekorea.jp (한국어) 재일 코리안 인터넷 신문
http://www.jp.onekorea.jp (일본어) 재일 코리안 인터넷 신문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승부의 흐름, 이제는 '6자 회담'이다 (0) | 2003.08.02 |
|---|---|
| "목표? 그야 자주 민주 평화 통일이지." (0) | 2003.07.31 |
|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80주년 특집.1 (0) | 2003.07.28 |
| 총 11.5m 관동대지진 묘사 두루마리그림 11장면 완전 공개 (0) | 2003.07.28 |
| "일본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을 탐구하는 건축사학자 김정동 선생 (0) | 2003.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