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1.5m 관동대지진 묘사 두루마리그림 11장면 완전 공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80주년 특집
글:강동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관동지역에 진도 7.9의 대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이 천재지변 속에 힘없는 조선인들은 경찰과 관(官)의 조직적인 유언비어로 인해 무참히 살해당해야 했습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무슨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그렇게 이승에서의 한 많은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올 해로 학살 80주년을 맞이합니다만,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에서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있고, 세월에 묻혀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현실을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하며, 몇차례에 걸쳐 그 진실의 일단이나마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월간 아리랑'(대표 김종영)에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30여년 전부터 오사카 고등재판소 북쪽 정면 쪽에 아제쿠라(あぜくら)라는 고미술품 골동품점을 경영하고 있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 일본 근대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는 다다씨는 자료 수집을 위해, 골동품 아침 시장에 자주 나가곤 한다.
1996년 11월 25일도 그는 교토(京都)의 기타노텐만큐(北野天滿宮)의 골동품 시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고오베 지진으로 불탄 민가에서 나온 물건들이 많이 나와 있었고, 전국에서 골동품업자들이 모여 들었다.
화제의 '관동대지진 두루마리 그림(關東大震災繪卷)'도 나와 있었으나, 고오베 지진의 큰 피해 탓인지 인기가 없었고 팔리지 않았다.
한 노점에서 이 그림을 발견한 다다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두루마리를 펼치자 엄청난 장면이 나타났다. 손이 떨렸다. 조선인이 학살되었다는 것은 역사 공부로 인식했으나, 사진이나 그림으로 학살 장면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귀중한 자료라고 여겨 흥분했다."고 말한다.
대학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역사 공부를 하는 자는 밝히고 싶지 않은 역사적인 사실이라도 은폐해서는 안 된다."고 배운 그는 곧바로 역사전문 연구기관 오사카시사편찬소(大阪市史編纂所)에 가져가 감정을 받고 공개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11월 11일 다다씨는 오사카시사편찬소의 소개로 오사카인권박물관을 방문, 쩖 관동대지진을 묘사한 두루마리 그림이라는 점 쩗 조선인이 그려져 있는 점 쩘 대지진이라는 비상사태 속에서 인권을 표현한 귀중한 자료라는 점을 박물관의 나가마게이코(仲間惠子)씨에게 설명했다. 덧붙여 그림 끝부분에 '동도대진재과안록(東都大震災過眠錄)다이쇼(大正) 13년 3월 중순, 하쿠도생사어상(白洞生寫於上)토기(土氣)향천진초사(鄕天眞草舍)'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동도대진재과안록'은 그림 제목, '다이쇼 13년 3월 중순'은 완성 연도(1924년), '하쿠도생사어상'의 하쿠도는 화가의 아호, '토기'는 지명, '향천진초사'는 화가가 속한 회파(會派)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토기'(土氣)는 치바(千葉)시에 존재하는 지명이라고 했다.
이를 토대로 작가를 비롯한 두루마리 그림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구름 속을 헤매는 둣한 조사속에 11월 17일 동경으로 향했다. 관동대지진에 대한 조사·연구 자료수집을 하고 있는 기관들을 방문했다. 동경도 공문서관(東京都公文書館)에서는 그림에 그려져 있는 장면이 현재 동경도 고토구(江東區) 부근인 점,당시 재난을 당한 어린이들이 그린 문집 속에도 두루마리 그림에 그려진 장면과 같은 모습이 그려져 있음을 알았다. 동경도 현대미술관에서는 화가 하쿠도(白洞)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현대 일본 두루마리 그림전집 13(現代日本繪卷全集13)'(小學館)에 있는 가타야마난뿌(堅山南風)의 대진재실사회권을 보고 하쿠토의 그림 구성과 흡사해서 놀랐다. 그러나 가타야마난뿌(堅山南風)의 그림에는 자경단은 등장하지만 조선인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
"작가의 실마리는 잡히지 않은 채 유일한 단서는 치바(千葉)의 토기(土氣)라는 지명뿐이었다. 관세음보살상이 그려져 있는 점으로 종교 관계자가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 하에 토기 부근의 사찰에 전화로 문의했다. 본수사(本壽寺)에는 전후(戰後)에 그려진 '천녀의 그림(天女の圖)'이 있는데 화가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치바의 토기에 내려 도서관으로 갔으나 공교롭게도 휴관이라, 옆에 공민관(公民館)으로 갔다. 직원인 사도우(佐藤正明)씨에게 경위를 설명하고 1923년경 하쿠도라는 화가가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전화로 여기저기 연락하여 하쿠도를 알고 있다는 그 지방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그후 이케다(池田敏男) 관장이 계속 조사를 하며 윤곽을 잡아갔어요. 조사 1개월 후에 겨우 유족을 만나 가야하라하쿠도(萱原白洞, 후에 黃丘로 개명)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화가 가야하라 하쿠도, 27세 때 지진체험 그려
가야하라하쿠도의 본명은 다케오(竹尾). 1896년 2월 18일 가가와현 아야우다군(香川縣 綾歌郡)에서 태어나, 1951년 5월 10일 54세로 타계. 초등학교 교원을 거쳐 20세경 상경하여 일본 화가인 야마우치 다몬(山內多門)에게 사사했다.
토기(土氣)에 살 때, 아호는 하쿠도(白洞). 이사한 후에는 고큐(黃丘)로 개명했다. 대지진 당시 동경도 신주쿠(당시 東京都新宿區柏木町) 부근에 살고 있던 27세의 하쿠도는 지진으로 치바시 토기의 친지의 집에 옮겨가, 직접 체험한 대지진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며 '관동대지진두루마리그림' 제작에 들어갔다고 유족은 전했다.
조선에 스케치 여행을 가서 그린 백두산 그림도 있다. 하쿠도는 호탕한 성격으로 술을 좋아하고 폭 넓게 많은 사람과 교제했던 사람으로, 금전 등 세속의 욕심과는 무연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정식명은 동도대진재과안록(東都大震災過眼錄).
가로 45cm, 세로 11.5m의 그림에는, 지진 직후의 동경도 고도쿠(江東區), 스미다구(墨田區) 부근의 상황이 11장면에 걸쳐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최초에는, 중생의 액운을 구하고 인간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이 그려있다(그림1).
이어 사람 찾는 간판을 들고 부모친지를 찾는 사람들(그림2).
가옥을 잃고 이불 등을 깔고 길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습(그림3).
일본 칼과 죽창 곤봉을 든 사람들과 민간인에 의해 조직된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장면(그림4).
손을 뒤로 묶인 채 연행되는 저고리 차림의 조선인 남녀의 모습(그림5), 사회봉사라고 쓰인 식료배급소 모습(그림6).
이어지는 장면에는 상부에 푸른 하늘을 떠올리는 묘사가 있고, 초등학교 수업 광경이 그려져 있다. 교단에는 '다이쇼(大正) 12년 9월 1일 오전 11시 52분 관동대지진 동경은 큰 화재'라고 쓰여 있다(그림7).
대지진 직후의 교통수단인 마차의 모습(그림8).
피해지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그림9).
화장(火葬)과 승려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장례식 모습(그림10).
향불 연기 속에 승천하는 모습(그림11) 등 화폭에는 지진 후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등장 인물은 총수 140명에 달한다. 복장별로 보면 검은색, 하늘색 제복을 입은 소방단이 81명, 평상복(일본옷) 차림 54명, 모자를 쓰고 흰 제복을 입은 재향군인이 4명, 한복을 입은 사람이 2명이다.
140명 중 무기를 지닌 사람은 71명으로 약 반수이다. 나머지 69명 중 사체 및 쓰러져 있는 사람, 손을 뒤로 묶인 사람, 습격당하는 사람, 끌려가는 사람이 33명이다.
그외 36명은 무기를 갖고 있지 않지만, 학살 장면을 향해 가는 도중, 또는 현장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등장 인물의 6할은 무기 소지에 관계 없이 학살에 가담했다고 할 수 있다. 140명 중 여성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끌려가는 조선인 단 한 명으로 그외는 전부 남성이다.
왜 연행 되어가는 4명 중 남녀 2명은 한복을 입고 있을까?
그림의 의의
처음 두루마리그림을 본 나카마씨는 "저고리를 입은 조선인의 연행 장면과 소방단의 제복 및 일본옷을 입은 사체를 복장만을 보고 그대로 해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근현대사 연구자인 마츠오(松尾)씨에게 두루마리그림을 보이자 "학살 장면을 향해 연행되고 있는 인물이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은 박해 받는 조선인을 명시하기 위한 것"이라며 학살 장면의 사체가 소방단의 제복 또는 일본옷을 입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당시 심한 차별을 받고 있던 재일 조선인이, 하물며 대지진 후 '조선인이 방화했다.''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유언비어 속에 조선인 학살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하에서 한복을 입고 있을 리가 있겠는가.
치바의 나라시노(習志野) 수용소에 있던 조선인 수십 명의 사진이 남아 있는데 한복을 입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며 산재해 있는 일본옷을 입은 사체는 일본인에 의해 학살당한 조선인임을 지적하였다."고 했다. 그 후 이 장면에 그려진 한사람 한사람을 조사하고, 그 상황을 자세하게 관찰해 가면서 '조선인 식별 자료에 관한 건(朝鮮人識別資料=關スル件)' 등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의식을 나타내는 자료를 읽으며, 자신의 고찰이 불충분하고, 학살된 것은 조선인이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그림을 발견한 다다씨는 "관동대지진 후 사람들의 행동, 민중의 상황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점, 그 중에서도 조선인 학살 묘사가 발견되어 역사의 증거를 뒷받침하게 되었다."고 작품의 중요성을 말하며 "역사를 알린다는 점에서 전시할 장소만 있다면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공개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80주년 특집
글:강동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관동지역에 진도 7.9의 대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이 천재지변 속에 힘없는 조선인들은 경찰과 관(官)의 조직적인 유언비어로 인해 무참히 살해당해야 했습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무슨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그렇게 이승에서의 한 많은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올 해로 학살 80주년을 맞이합니다만,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에서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있고, 세월에 묻혀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현실을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하며, 몇차례에 걸쳐 그 진실의 일단이나마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월간 아리랑'(대표 김종영)에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30여년 전부터 오사카 고등재판소 북쪽 정면 쪽에 아제쿠라(あぜくら)라는 고미술품 골동품점을 경영하고 있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 일본 근대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는 다다씨는 자료 수집을 위해, 골동품 아침 시장에 자주 나가곤 한다.
1996년 11월 25일도 그는 교토(京都)의 기타노텐만큐(北野天滿宮)의 골동품 시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고오베 지진으로 불탄 민가에서 나온 물건들이 많이 나와 있었고, 전국에서 골동품업자들이 모여 들었다.
화제의 '관동대지진 두루마리 그림(關東大震災繪卷)'도 나와 있었으나, 고오베 지진의 큰 피해 탓인지 인기가 없었고 팔리지 않았다.
한 노점에서 이 그림을 발견한 다다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두루마리를 펼치자 엄청난 장면이 나타났다. 손이 떨렸다. 조선인이 학살되었다는 것은 역사 공부로 인식했으나, 사진이나 그림으로 학살 장면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귀중한 자료라고 여겨 흥분했다."고 말한다.
대학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역사 공부를 하는 자는 밝히고 싶지 않은 역사적인 사실이라도 은폐해서는 안 된다."고 배운 그는 곧바로 역사전문 연구기관 오사카시사편찬소(大阪市史編纂所)에 가져가 감정을 받고 공개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11월 11일 다다씨는 오사카시사편찬소의 소개로 오사카인권박물관을 방문, 쩖 관동대지진을 묘사한 두루마리 그림이라는 점 쩗 조선인이 그려져 있는 점 쩘 대지진이라는 비상사태 속에서 인권을 표현한 귀중한 자료라는 점을 박물관의 나가마게이코(仲間惠子)씨에게 설명했다. 덧붙여 그림 끝부분에 '동도대진재과안록(東都大震災過眠錄)다이쇼(大正) 13년 3월 중순, 하쿠도생사어상(白洞生寫於上)토기(土氣)향천진초사(鄕天眞草舍)'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동도대진재과안록'은 그림 제목, '다이쇼 13년 3월 중순'은 완성 연도(1924년), '하쿠도생사어상'의 하쿠도는 화가의 아호, '토기'는 지명, '향천진초사'는 화가가 속한 회파(會派)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토기'(土氣)는 치바(千葉)시에 존재하는 지명이라고 했다.
이를 토대로 작가를 비롯한 두루마리 그림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구름 속을 헤매는 둣한 조사속에 11월 17일 동경으로 향했다. 관동대지진에 대한 조사·연구 자료수집을 하고 있는 기관들을 방문했다. 동경도 공문서관(東京都公文書館)에서는 그림에 그려져 있는 장면이 현재 동경도 고토구(江東區) 부근인 점,당시 재난을 당한 어린이들이 그린 문집 속에도 두루마리 그림에 그려진 장면과 같은 모습이 그려져 있음을 알았다. 동경도 현대미술관에서는 화가 하쿠도(白洞)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현대 일본 두루마리 그림전집 13(現代日本繪卷全集13)'(小學館)에 있는 가타야마난뿌(堅山南風)의 대진재실사회권을 보고 하쿠토의 그림 구성과 흡사해서 놀랐다. 그러나 가타야마난뿌(堅山南風)의 그림에는 자경단은 등장하지만 조선인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
"작가의 실마리는 잡히지 않은 채 유일한 단서는 치바(千葉)의 토기(土氣)라는 지명뿐이었다. 관세음보살상이 그려져 있는 점으로 종교 관계자가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 하에 토기 부근의 사찰에 전화로 문의했다. 본수사(本壽寺)에는 전후(戰後)에 그려진 '천녀의 그림(天女の圖)'이 있는데 화가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치바의 토기에 내려 도서관으로 갔으나 공교롭게도 휴관이라, 옆에 공민관(公民館)으로 갔다. 직원인 사도우(佐藤正明)씨에게 경위를 설명하고 1923년경 하쿠도라는 화가가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전화로 여기저기 연락하여 하쿠도를 알고 있다는 그 지방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그후 이케다(池田敏男) 관장이 계속 조사를 하며 윤곽을 잡아갔어요. 조사 1개월 후에 겨우 유족을 만나 가야하라하쿠도(萱原白洞, 후에 黃丘로 개명)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화가 가야하라 하쿠도, 27세 때 지진체험 그려
가야하라하쿠도의 본명은 다케오(竹尾). 1896년 2월 18일 가가와현 아야우다군(香川縣 綾歌郡)에서 태어나, 1951년 5월 10일 54세로 타계. 초등학교 교원을 거쳐 20세경 상경하여 일본 화가인 야마우치 다몬(山內多門)에게 사사했다.
토기(土氣)에 살 때, 아호는 하쿠도(白洞). 이사한 후에는 고큐(黃丘)로 개명했다. 대지진 당시 동경도 신주쿠(당시 東京都新宿區柏木町) 부근에 살고 있던 27세의 하쿠도는 지진으로 치바시 토기의 친지의 집에 옮겨가, 직접 체험한 대지진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며 '관동대지진두루마리그림' 제작에 들어갔다고 유족은 전했다.
조선에 스케치 여행을 가서 그린 백두산 그림도 있다. 하쿠도는 호탕한 성격으로 술을 좋아하고 폭 넓게 많은 사람과 교제했던 사람으로, 금전 등 세속의 욕심과는 무연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정식명은 동도대진재과안록(東都大震災過眼錄).
가로 45cm, 세로 11.5m의 그림에는, 지진 직후의 동경도 고도쿠(江東區), 스미다구(墨田區) 부근의 상황이 11장면에 걸쳐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최초에는, 중생의 액운을 구하고 인간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이 그려있다(그림1).
이어 사람 찾는 간판을 들고 부모친지를 찾는 사람들(그림2).
가옥을 잃고 이불 등을 깔고 길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습(그림3).
일본 칼과 죽창 곤봉을 든 사람들과 민간인에 의해 조직된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장면(그림4).
손을 뒤로 묶인 채 연행되는 저고리 차림의 조선인 남녀의 모습(그림5), 사회봉사라고 쓰인 식료배급소 모습(그림6).
이어지는 장면에는 상부에 푸른 하늘을 떠올리는 묘사가 있고, 초등학교 수업 광경이 그려져 있다. 교단에는 '다이쇼(大正) 12년 9월 1일 오전 11시 52분 관동대지진 동경은 큰 화재'라고 쓰여 있다(그림7).
대지진 직후의 교통수단인 마차의 모습(그림8).
피해지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그림9).
화장(火葬)과 승려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장례식 모습(그림10).
향불 연기 속에 승천하는 모습(그림11) 등 화폭에는 지진 후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등장 인물은 총수 140명에 달한다. 복장별로 보면 검은색, 하늘색 제복을 입은 소방단이 81명, 평상복(일본옷) 차림 54명, 모자를 쓰고 흰 제복을 입은 재향군인이 4명, 한복을 입은 사람이 2명이다.
140명 중 무기를 지닌 사람은 71명으로 약 반수이다. 나머지 69명 중 사체 및 쓰러져 있는 사람, 손을 뒤로 묶인 사람, 습격당하는 사람, 끌려가는 사람이 33명이다.
그외 36명은 무기를 갖고 있지 않지만, 학살 장면을 향해 가는 도중, 또는 현장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등장 인물의 6할은 무기 소지에 관계 없이 학살에 가담했다고 할 수 있다. 140명 중 여성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끌려가는 조선인 단 한 명으로 그외는 전부 남성이다.
왜 연행 되어가는 4명 중 남녀 2명은 한복을 입고 있을까?
그림의 의의
처음 두루마리그림을 본 나카마씨는 "저고리를 입은 조선인의 연행 장면과 소방단의 제복 및 일본옷을 입은 사체를 복장만을 보고 그대로 해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근현대사 연구자인 마츠오(松尾)씨에게 두루마리그림을 보이자 "학살 장면을 향해 연행되고 있는 인물이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은 박해 받는 조선인을 명시하기 위한 것"이라며 학살 장면의 사체가 소방단의 제복 또는 일본옷을 입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당시 심한 차별을 받고 있던 재일 조선인이, 하물며 대지진 후 '조선인이 방화했다.''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유언비어 속에 조선인 학살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하에서 한복을 입고 있을 리가 있겠는가.
치바의 나라시노(習志野) 수용소에 있던 조선인 수십 명의 사진이 남아 있는데 한복을 입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며 산재해 있는 일본옷을 입은 사체는 일본인에 의해 학살당한 조선인임을 지적하였다."고 했다. 그 후 이 장면에 그려진 한사람 한사람을 조사하고, 그 상황을 자세하게 관찰해 가면서 '조선인 식별 자료에 관한 건(朝鮮人識別資料=關スル件)' 등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의식을 나타내는 자료를 읽으며, 자신의 고찰이 불충분하고, 학살된 것은 조선인이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그림을 발견한 다다씨는 "관동대지진 후 사람들의 행동, 민중의 상황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점, 그 중에서도 조선인 학살 묘사가 발견되어 역사의 증거를 뒷받침하게 되었다."고 작품의 중요성을 말하며 "역사를 알린다는 점에서 전시할 장소만 있다면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공개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80주년 특집 .2 (0) | 2003.07.28 |
|---|---|
|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80주년 특집.1 (0) | 2003.07.28 |
| "일본속의 한국 근대사 현장"을 탐구하는 건축사학자 김정동 선생 (0) | 2003.07.28 |
| 한. 일 관계는 영원한 맞수! (0) | 2003.07.25 |
| 일본 중세의 영웅 3걸 비교 (0) | 2003.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