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 관계는 영원한 맞수!
우월과 콤플렉스의 상관관계
글:장팔현
한. 일 관계는 그 역사적 유구함만큼이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영원한 맞수로서 경쟁하면서 성장 발전하는 사이이다. 한국은 여러번 일본의 일방적 침략으로부터 고통 받아야 했으며 많은 문화재와 국부를 피탈 당하였다.
한국은 일본의 여명기(黎明期)에 문화를 전달 해 주고 이끌어 준 고마운 선생과 같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나쁜 이웃 때문에 번번히 고통을 당했으니 역사는 정의도 신(神)도 없는 힘만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시대처럼 느껴진다.
2천 여 년의 일본과의 교류 속에서 한 .일 관계가 평화의 시기도 많았으나 불편한 시기도 꽤 되었다. 이러한 연유는 바로 양국의 관계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항상 우월과 콤플렉스의 상관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2천 여 년의 한. 일 관계를 1승 1무 1패의 역사로 함축해서 보고자 한다. BC300년부터 AD300년 때까지 6백여 년간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 또는 전쟁을 피해 남쪽인 일본으로 떠났던 시대이다. 초기에는 단속적으로 도래해 갔지만, 한반도에서 삼국이 치열한 전쟁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일본으로의 도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는 일본 큐-슈-에서 발견된 요시노가리 유적(佐賀縣,吉野がり遺跡)에서 발굴된 인골이 당시의 일본열도 원주민보다 평균 3센티 이상 컸고 얼굴 윤곽도 확연히 달랐다. 새로운 인종의 열도 등장이며 이들이 오늘날 일본인의 직접 조상이 된다.
또한 239년 일본의 히미코가 여왕으로 군림하던 시기에 중국사신이 일본열도에 들렸던 바, 그 기록이 ≪삼국지》에 <위지 왜인전>으로 남아있다. 이 기록에 일본에는 ‘말, 소, 호랑이, 표범, 양, 까치’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239년 이전에 일본에 기마민족은 없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후 유적에는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계 마구와 유물들이 발견되니 사람의 이동은 물론 말도 함께 일본에 유입되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또한 큐-슈-의 타케하라(竹原) 고분벽화에, 배에서 말고삐를 잡고 끌어내리는 그림이 일본열도로의 말 유입을 설명해주는 좋은 근거가 될 것이다.
일본은 고대에 한반도 국가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인 후 한동안 쇄국정책을 실시한다. 이때에 급속히 일본화가 이루어지고 다시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통신사의 파견 등으로 일본과 교류를 활발히 하게된다.
일본의 이러한 문화 유입형태를 수(守)--->파(破)--->리(離)로 풀이한다. 즉, 일본은 다른 문화를 소화함에 있어 처음에는 외국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답습하는 단계(고대)를 거쳐 그 원형을 깨고 더욱 발전시켜 일본인에 맞도록 고치며(중세초기),소화단계를 거쳐 마지막에는 초기 도입된 문화의 원형을 떠나 완전히 다른 일본 고유의 문화(중세 이후)로 바뀌어 진다는 논리이다.
한. 일 관계는 고대에 한국에 의한 일방적인 우의의 시대로 1승이라 본다. 이후 10 여 차례가 넘는 통신사의 왕래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외교 우의는 1천 여 년 이어졌다.
1592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많은 피폐를 초래하였으나 이 전쟁에서는 양국 모두 승자가 없었던 무승부로 본다. 이후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로부터 1945년8월15일 까지 35년간은 일본에 패배한 시대라 볼 수 있다. 때문에 한. 일 관계를 1승1무1패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보다 국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계기는 임진왜란 이후로 보인다. 우리는 많은 인쇄기술자라든가 도자기 기술자 등 당시의 첨단 기술자를 빼앗겼고 일본은 이를 발판으로 급속히 많은 서적이 보급됨으로서 지식인이 늘어났고 도자기의 보급은 생활의 질적 향상을 가져왔다. 이러한 문화적 기반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고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일본은 무(武)를 숭상하는 사무라이의 국가요, 한국은 문(文)을 숭상하는 선비의 국가로서 이 양자의 패러다임이 균형을 이룰 때는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문화의 힘으로 일본을 누르지 못할 때는 일본의 무력만이 한반도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눌려 지내던 자존심의 회복이자 콤플렉스의 극복이었다. 임진왜란, 한일합방과 같은 침략으로 앙갚음했던 것이다.
우리가 강할 때는 우리의 문화가 일방적으로 일본으로 흘러 들어간 반면, 무 (武)의 국가인 일본이 강할 때는 일본으로부터 무력(武力)만이 흘러들어 왔던 것이다. 일본에서 한국에 줄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임진왜란이라 는 무력과 함께 고구마(孝子麻), 고추(남반초<南蕃草>), 담배(南草) 정도였다.
21세기의 한. 일 관계는 이제 우리가 하기나름이다. 산업패턴이 대량생산의 제조업 시대에서 ‘빨리빨리’라는 국민성도 장점이 되는 정보화 산업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건너가는 일본인의 심성으로는 도저히 정보화 산업시대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21세기는 또다시 우리가 일본을 넘을 수 있는 것이다.
daipapa25@hotmail.com 김수종
http://www.onekorea.jp (한국어) 재일 코리안 인터넷 신문
http://www.jp.onekorea.jp (일본어) 재일 코리안 인터넷 신문

우월과 콤플렉스의 상관관계
글:장팔현
한. 일 관계는 그 역사적 유구함만큼이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영원한 맞수로서 경쟁하면서 성장 발전하는 사이이다. 한국은 여러번 일본의 일방적 침략으로부터 고통 받아야 했으며 많은 문화재와 국부를 피탈 당하였다.
한국은 일본의 여명기(黎明期)에 문화를 전달 해 주고 이끌어 준 고마운 선생과 같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나쁜 이웃 때문에 번번히 고통을 당했으니 역사는 정의도 신(神)도 없는 힘만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시대처럼 느껴진다.
2천 여 년의 일본과의 교류 속에서 한 .일 관계가 평화의 시기도 많았으나 불편한 시기도 꽤 되었다. 이러한 연유는 바로 양국의 관계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항상 우월과 콤플렉스의 상관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2천 여 년의 한. 일 관계를 1승 1무 1패의 역사로 함축해서 보고자 한다. BC300년부터 AD300년 때까지 6백여 년간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 또는 전쟁을 피해 남쪽인 일본으로 떠났던 시대이다. 초기에는 단속적으로 도래해 갔지만, 한반도에서 삼국이 치열한 전쟁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일본으로의 도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는 일본 큐-슈-에서 발견된 요시노가리 유적(佐賀縣,吉野がり遺跡)에서 발굴된 인골이 당시의 일본열도 원주민보다 평균 3센티 이상 컸고 얼굴 윤곽도 확연히 달랐다. 새로운 인종의 열도 등장이며 이들이 오늘날 일본인의 직접 조상이 된다.
또한 239년 일본의 히미코가 여왕으로 군림하던 시기에 중국사신이 일본열도에 들렸던 바, 그 기록이 ≪삼국지》에 <위지 왜인전>으로 남아있다. 이 기록에 일본에는 ‘말, 소, 호랑이, 표범, 양, 까치’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239년 이전에 일본에 기마민족은 없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후 유적에는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계 마구와 유물들이 발견되니 사람의 이동은 물론 말도 함께 일본에 유입되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또한 큐-슈-의 타케하라(竹原) 고분벽화에, 배에서 말고삐를 잡고 끌어내리는 그림이 일본열도로의 말 유입을 설명해주는 좋은 근거가 될 것이다.
일본은 고대에 한반도 국가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인 후 한동안 쇄국정책을 실시한다. 이때에 급속히 일본화가 이루어지고 다시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통신사의 파견 등으로 일본과 교류를 활발히 하게된다.
일본의 이러한 문화 유입형태를 수(守)--->파(破)--->리(離)로 풀이한다. 즉, 일본은 다른 문화를 소화함에 있어 처음에는 외국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답습하는 단계(고대)를 거쳐 그 원형을 깨고 더욱 발전시켜 일본인에 맞도록 고치며(중세초기),소화단계를 거쳐 마지막에는 초기 도입된 문화의 원형을 떠나 완전히 다른 일본 고유의 문화(중세 이후)로 바뀌어 진다는 논리이다.
한. 일 관계는 고대에 한국에 의한 일방적인 우의의 시대로 1승이라 본다. 이후 10 여 차례가 넘는 통신사의 왕래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외교 우의는 1천 여 년 이어졌다.
1592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많은 피폐를 초래하였으나 이 전쟁에서는 양국 모두 승자가 없었던 무승부로 본다. 이후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로부터 1945년8월15일 까지 35년간은 일본에 패배한 시대라 볼 수 있다. 때문에 한. 일 관계를 1승1무1패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보다 국력이 약해지기 시작한 계기는 임진왜란 이후로 보인다. 우리는 많은 인쇄기술자라든가 도자기 기술자 등 당시의 첨단 기술자를 빼앗겼고 일본은 이를 발판으로 급속히 많은 서적이 보급됨으로서 지식인이 늘어났고 도자기의 보급은 생활의 질적 향상을 가져왔다. 이러한 문화적 기반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고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일본은 무(武)를 숭상하는 사무라이의 국가요, 한국은 문(文)을 숭상하는 선비의 국가로서 이 양자의 패러다임이 균형을 이룰 때는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문화의 힘으로 일본을 누르지 못할 때는 일본의 무력만이 한반도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눌려 지내던 자존심의 회복이자 콤플렉스의 극복이었다. 임진왜란, 한일합방과 같은 침략으로 앙갚음했던 것이다.
우리가 강할 때는 우리의 문화가 일방적으로 일본으로 흘러 들어간 반면, 무 (武)의 국가인 일본이 강할 때는 일본으로부터 무력(武力)만이 흘러들어 왔던 것이다. 일본에서 한국에 줄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임진왜란이라 는 무력과 함께 고구마(孝子麻), 고추(남반초<南蕃草>), 담배(南草) 정도였다.
21세기의 한. 일 관계는 이제 우리가 하기나름이다. 산업패턴이 대량생산의 제조업 시대에서 ‘빨리빨리’라는 국민성도 장점이 되는 정보화 산업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건너가는 일본인의 심성으로는 도저히 정보화 산업시대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21세기는 또다시 우리가 일본을 넘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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