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일본속의 코리언파워(2)

푸른하늘김 2003. 7. 21. 15:49
일본속의 코리언파워(2)

일본판 빌게이츠, 손정의와 한국계 스포츠 선수들

글:장팔현






우선 경제계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하고자 한다.

개인적 성향과 일본 사회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성공한 경제인들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중에서 손달원(孫達元)씨는 일본 명 야마구치 히사요시(山口久吉)로 평남 출신이며 대기업인 신일철(新日鐵)계열의 브리키 제관업(製罐業), 야마토 제관(大和製罐)의 회장으로 70년대에 귀화했으나 조국애는 대단했던 것 같다. 98년 4월 사망하기 전에도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 방북시(89년) 북한정권에 다리를 놔준 인물로 유명하다.

일본 재계에 새롭게 초신성처럼 떠오른 동포 3세, 손정의 소프트뱅크사장을 빠트릴 수 없다. 일본 명으로 손 마사요시(孫正義)라 불리는 그는 귀화했지만 그 많은 귀화자들이 일본 성씨로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을 바꾸고 싶지 않다’라고 본 성씨 사용을 고집하여 통과시켰던 인물이다.

손씨의 이러한 방식의 귀화는 많은 재일교포뿐만 아니라, 특히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는 동포 청소년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새로운 발상에 찬사를 보냈다.

그의 유학과정이나 발명에는 늘 이처럼 기발한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어찌되었건 현재 그는 ‘일본의 빌게이츠’라 불릴 정도에 이르렀으나,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숨기지 않고 당당함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일부 일본인들의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더 큰 성공을 많은 동포들 또한 바라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기라성 같은 스포츠계의 왕자들-야구 볼은 차별도 날려 보내고



스포츠계에는 특히 기라성 같은 재일동포 선수들이 많은 분야이다. 차별이 심한 일본 사회에서 고학력자라도 일본 사회에서 취직이 힘들어 야키니쿠, 김치공장, 건설업 등의 영세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고 일부가 자본을 모아 파칭코 사업에 손을 대거나 소기업을 하는 단계로 출발하던 때이다.

그 중에는 차별적 일본 사회의 중압감을 못 이겨내고 정체성 확립에 실패한 일부 젊은이들은 암흑세계로 또는 술집으로 많이 진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진출은 결국 일본 사회에서 냉대 받고 차별 받을지라도 경제적으로는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건설업과 주먹세계와 술집은 상호 연관성이 많다고 한다.

배워도 취직이 힘들고 선거권도 없으니 오로지 돈만 벌어야 그나마 대우받을 수 있었던 사회가 어쩌면 오늘날의 재일동포들을 경제적으로 성공시킬 수 있었던 자양분은 아니었던가 역설적으로 유추해 본다.

하여튼 70,8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벤츠 타는 사람들 중 절반은 조선 사람이다”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라 한다. 그처럼 돈을 악착같이 벌었다는 얘기이다.

하여튼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동포들은 열도 원주민들보다 육체적으로 뛰어난 조건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조건을 최대한 살려 스포츠계에 입문하니 차별을 발판삼아 오히려 이를 악물고 발전의 기회로 삼고 노력하니 당연히 많은 스타들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분야는 전편에 든 격투기는 물론 야구, 축구, 배구, 권투, 스모, 골프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대단한 활약을 했고 하고 있다.

최초의 한국계 프로야구 선수는 1938년 한신(阪神)에 입단한 평양출신의 박현명(朴賢明)이었다. 또한 전후 일본 최초로 완전시합을 달성한 후지모토 히데오(藤本英雄)도 부산 출신의 이팔용(李八龍)으로 알려져 있다.

전후 최초의 수위타자 역시 경상북도 출신의 카네다(金田正泰)씨로 한국명 김정태였다. 그는 한신 타이거즈의 감독을 두 번씩이나 역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본 야구사의 ‘최초’를 수식어로 할 정도로 그들은 뛰어난 재능으로 출세하였던 것이다.

400승 투수로 유명한 한국계 카네다 쇼이치(金田正一: 한국명 김정일)씨, 그도 비록 귀화는 했지만 자신이 한국계임을 숨기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끔 TV에 나와 얘기하는 것을 보아도 배짱 있고 솔직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카네다 투수와 나가시마나 왕정치와의 대결은 지금도 명승管?회자되고 만화의 주제가 되거나 대담거리가 될 정도이다. 그는 아무리 유명한 타자라거나 승리와 관련된 중요한 시합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를 했던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장훈은 비록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라는 통성명을 사용하고 있으나 귀화하지 않고 항상 입 바른 말 하기로 유명하다. 3000개의 안타 기록으로 유명하며 70년대 한국의 라디오 방송에서도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널리 방송되던 일도 있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자이언츠 시절 일본인 인기 넘버원이자 아직도 사랑받고 있는 나가시마나 중국계 왕정치에 비해서 손색없는 실력 발휘에도 불구하고 인기 면에서는 기대에 못 미친 감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의 한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은 일본인들이 볼 때 매우 불편했을 것임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그런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장훈 선수에게는 한국인이라는 어떠한 확실한 정체성을 어려서부터 몸으로 체득한 것 같다.

그는 현재도 야구해설가로 활동 중이며 일요일 TV 프로그램에 고정출연자로 얼굴을 비치고 있다. 아직도 일요일 아침마다 ‘카쯔(활력을 불어넣으라고 외치는 소리)’를 외치는 것을 보면 활기왕성하다.

츄니찌(中日) 감독에서 현재는 한신 타이거즈 감독으로 올해 센트럴리그 수위를 달리고 있는 호시노 센이치(星野仙一)씨 역시 한국계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잘 생긴 외모와 괄괄하고 불같은 성격은 일본인 같지 않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을 정도다. 조용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의 전 쿄징(巨人)의 나가시마 감독과 대조를 이루나 지금 일부지역에선 신과 같은 존재로 인기 절정이다.

현역시절에도 나가시마 타자에게는 절대로 질 수 없다는 각오로 볼을 던졌다고 한다. 나가시마 타자에게 홈런을 얻어맞고 글러브를 던지며 분해하는 모습이 아직도 종종 방영될 정도로 일본 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는 오랫동안 츄니치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감독을 거치면서 나고야 지역에서 명성을 쌓음은 물론 현재는 오오사카, 고베를 중심으로 한 한신 타이거즈 팀의 본거지인 간사이(關西) 지역에서 그야말로 카미사마(신적 존재)적 존재로 군림 중이다. 오오사카 지역 경제는 물론 일본 경제를 살린다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이다. 다만 그는 일본 현지주의로서 그가 한국계라고 스스로 주장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어려서 부친을 잃었다고 한다.

서광남씨는 타쯔카와(達川光男)란 성씨에서 나타나듯이 달성(대구)서씨임을 스스럼없이 나타내고 있다. 히로시마 감독을 역임하고 현재는 NHK 야구 해설위원으로 지내고 있는데, 이 분은 언변이 좋고 임기응변이 아주 능한 분으로 해설도 아주 재미있게 하고 있다.

김지헌(카네모토:金本知憲) 선수는 줄곧 히로시마 선수로서 4번과 5번을 주로 맡고 있는 현역 선수로 장타를 많이 치는 선수이다. 이밖에도 유명 야구선수는 수도 없이 많다. 이름만 열거해도 유우토오 미치요(有藤道世: 김유세), 아라이 히로마사(新井宏昌:박종률), 미우라(新浦壽夫: 김일융), 후쿠시(福士明夫:장명부), 카네무라(金村義明: 김의명- 탈렌트로 활동 중)는 물론 고국으로 돌아와 해태에서 야구를 했던 주동식(宇田東植)과 김무종(木本茂美) 선수도 있다.

이밖에 츄니치에서 선 동열 선수와 호흡을 맞추던 포수로 현재는 요코하마로 이적한 나카무라(강무지) 선수도 한국계로 알려져 있고 쿄징(巨人)의 거포 키요하라(淸原和博) 선수도 한국계라는 소문이 있다.






골프

골프선수로서 아오키 이사오(靑木功)도 한국계로 소문나 있다.

이밖에도 57년 제 5회 캐나다컵에서 일본인 최초로 우승한 나카무라(中村寅吉)도 한국계이며 그의 제자로서 역시 한국계인 야스다 하루오(安田春雄)와 카네코(金子柱憲:김주헌) 선수가 있으며 현재 필드에서 맹활약 중이다.



배구

배구 선수로는 1974년의 제20회 뮌헨 올림픽에 시라이 타카꼬(白井貴子)란 일본 이름으로 출전한 윤정순이 있다. ‘아시아의 대포’란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고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도 참가 했으며 77년 배구 월드컵에 출전, 일본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그녀의 활약상만 기억하는 일본인들이 엄청난 일본 배구계의 귀화 종용과 이를 고뇌하던 윤정순 선수가 있었음은 잘 모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귀화를 거부하고 92년과 96년 올림픽 대표 참가조차 스스로 거부한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양성태(楊成太)였다. 96년 아틀랜타 올림픽 예선에서 패퇴한 일본감독조차 양성태의 부재를 못내 아쉬워하고 서운해 했다 한다.



축구

축구에도 일본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하시라타니(柱谷) 형제가 있다. 그들은 80,90년대 최순호 선수 등이 활약하던 시절 한국을 이기고자 무던히 애썼지만, 94년 ‘도하의 비극’을 아직도 아쉬워하며 공한증에 애태우던 일본 대표 시절 선수들이었다.

일본 축구 수준이 형편없던 시절 ‘재일조선인축구단’은 일찍이 ‘무관의 왕자’, ‘환상의 팀’으로 군림했다 한다. 국적문제로 공식 행사는 가질 수 없었지만, 당시의 톱 클래스의 실업팀과 일본 각 팀과의 전적을 볼 때 승률이 90% 이상이었다고 하니 대단한 실력이었던 것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일본 팀 자체의 수준이 바닥이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현재는 J리그에서 김광정, 박성기, 박강조, 현신철 등 본명으로 뛰는 선수들이 부쩍 늘고 있는 상황이다.



복싱

복싱에는 수도 없는 인물들이 많았다.

일제 시대 제주도 출신의 현 해남(玄海男)이 1929년에 일본 밴텀급에 그리고 37년에는 일본 페더급 왕자로 등극했다. 45년 전에는 김정연(코바야시 노부오). 김사성(미쯔야마 이치로오) 등 7인의 전 일본 챔피언이 한국인이었다. 그 중에서도 서정권 선수는 일본선수로는 최초의 세계 랭커로 기록돼 있다.

전 후에도 천리마 계덕(김계덕-金啓德, 전 일본 미들급 왕자), 김귀하(미들급 왕자-카네다 모리오(金田森男)와 박구웅(아라이 히사오(新井久雄-주니어 웰터급 왕자) 등이 맥을 잇다가 현재는 홍창수(현 주니어 웰터급 왕자) 선수가 맹활약하고 있다.








스모

스모는 한국인이 적응하기에 쉬운 운동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씨름 기술에 인위적으로 몸무게 늘리기에 성공한다면 천하장사도 가능했던 종목이다.

스모는 거푸집 모양의 인공적 파워 불리기에 비해 기술이 우리의 씨름이나 몽골씨름에 비해 적은 것 같다. 일제 시대의 한국인 스모선수들의 성공과 현재 몽골 선수들의 승승장구를 볼 때 그렇다.

이 스모 계에도 알려진 요코즈나(천하장사)만도 50대의 사다노야마(佐田の山)와 51대 요코즈나 타마노우미(玉の海) 그리고 57대 미에노우미(三重の海)등 수없이 많지만 밝혀지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꽤 있다고 한다.

현재는 김성택 선수가 일본에 건너가 열심히 천하장사를 향해 좋은 성적으로 돌진해 가고 있는 중이다.



마라톤

마라톤 선수로는 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출전을 위해 조선적에서 한국적으로 바꾸고 한국대표 선발전에 참여해 6위를 했던 김철언(金哲彦-키노시타 테쯔히코)씨가 있다. 그는 한국대표로는 뽑히지 못하고 말았지만, 아리노모리 유우꼬(有森裕子)의 코치로 참가했다. 아리노모리는 그 때 은메달을 땄으며, 96년 아틀랜타 올림픽 때는 김철언씨가 감독으로 참가, 동메달을 획득함으로서 그는 지도자로의 변신에 성공, 강한 빛을 발하고 있다.

스포츠 분야는 일본 사회의 차별 속에서도 자신의 육체적 능력으로 성공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분야중의 하나였다. 이 분야에서 많은 재일동포들이 피나는 노력으로 스타로 발돋움했음은 우연이 아닌 각고의 노력과 승부근성 덕택이다. 이에 한 가지 더 보탠다면 근거 없는 일본인들의 우월감과 텃세가 오히려 한국인들의 오기와 분발을 재촉, 한국인의 우월함을 입증시켜준 결과가 되었으니 이 아니 역설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