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 여름 밤의 신사 연극과 김구미자

푸른하늘김 2003. 7. 24. 16:52
한 여름 밤의 신사 연극과 김구미자

글: 유재순


지난 주 일요일 저녁, 일본 친구들과 오랜만에 연극을 보았다. 그것도 신사(花園神社) 내에 설치된 텐트에서.
사실 텐트에서 공연하는 연극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텐트연극’ 이라면 연극연출가이자 영화감독인 재일동포 김 수진 씨가 주재하는 ‘신주쿠 양산박’이 해마다 여름이면 일본 전국을 돌며 텐트를 치고 공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무대 스케일도 커서 웬만한 극단은 흉내도 못 낼 정도로 특수장치도 뛰어나다.
하지만 ‘신주쿠 양산박’처럼 도시공간을 이용한 빈터가 아닌 신사 내에서 텐트를 치고 공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놀란 것은 공연장에 모인 관객들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부채 하나씩을 들고 수백 미터의 줄을 서고 있었다.
헌데 공연장 입구에 특이하게도 커다란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난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 그 공고문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재일동포로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 연극배우 김 구미자의 이야기가 써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연배우인 김 구미자가 급병으로 부득이하게 연극 출연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공고였다. 사실 난 연극을 보러 오면서도 그녀가 출연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소속된 극단 공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왜 타 극단의 공연에 출연했는지 그 이유를 금방 알아 차릴 수가 있었다. 이날 공연하는 작품의 시나리오와 연출자가 다름아닌 정 의신 씨였던 것이다.
정 의신 씨는 김 구미자와 마찬가지로 재일동포 3세로 ‘신주쿠 양산박’의 창단 멤버. 역시 같은 재일동포인 최 양일 감독이 연출한 ‘달은 어디에 떠 있나’로 그 해 50여 개의 일본 영화상을 모두 휩쓴 영화 시나리오를 쓴 이가 바로 정 의신 씨였다.
이들 멤버 중 정 의신과 김 구미자가 한 여름 밤의 텐트 연극에서 다시 모인 것이었다. 그런데 급병으로 출연을 못한다니. 그래서 우리를 초대한 출연 배우에게 넌지시 그 이유를 물었다.
‘갑자기 연극 무대에서 쓰러져 긴급 입원, 그리고 발견된 병명…’
난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쯤 퇴원하여 집에 있을 것이라는 배우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메세지를 남겨달라는 그녀의 목소리만 흘러 나왔다.
이윽고 공연 시작. 착잡한 마음으로 공연장에 들어갔다.
이 날 공연한 내용은 ‘20세기 소년소녀창가집’이란 타이틀처럼, 비록 가난하지만 꿈이 있었던 20세기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성인이 되어 그 꿈을 잃어버린 비애를 그린 작품이었다.
만약 김 구미자가 쓰러지지 않고 이 무대에 섰다면 더욱 더 공연이 빛났을 텐데 쓰린 마음이 아려왔다. 연극, 영화배우로서, 그리고 한 여성으로서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던 너무나 성실하기만 했던 그녀.
일본인으로부터 차별 받는 것이 싫어 부모가 일부러 일본이름으로 지어 준 ‘가네 구미코(金久美子)’란 이름을 본인이 구태여 한국식으로 ‘김구미자’로 불러 달라고 일본 매스컴 앞에서 당당하게 밝힐 정도로 자기 정체성과 주관이 뚜렷했던 그녀. 그런 그녀가 지금 중병에 걸려 있단다.
이 날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우리 일행은 그녀의 중병이 제발 ‘말기’가 아닌 ‘초기발견’임을 간절히 바라면서, 한국식당에서 한없이 쓴 한국소주를 밤새도록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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