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타 공항의 세관원
김치예요?(キムチですか?)
글:박철현
나리타공항에서 울며겨자먹기로 나리타 익스프레스(Narita Ex.)라는 이름의 쾌속전철 티켓을 끊은 저는, 지하로 내려가서 전철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긴 아무리 비싸다고 하더라도 공항에서 계속 살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참, 그때 보안검색대를 지날 때 기억이 어슴프레 떠오르는군요. 사각 안경의 약간은 대머리에 신경질적인 얼굴을 한 세관원 녀석. 잘 있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도착했을 때 인천공항도 그랬지만 나리타공항 역시 엄청나게 한산했습니다. 얼마 전 사스(SARS)때문에 중국이나 홍콩 가는 비행기편이 거의 망했듯이 그 때는 쌍동이 빌딩 테러의 영향으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편이 정말 텅텅 비었죠.
서양인들도 별로 안보이고. 마치 국내선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한·중·일이야 얼굴만 봐서는 국적구분 안되니까요. 테러의 영향으로 검색/보안 검문도 강화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저 같은, 딱 보기에도 가난한 유학생 필링의 꾀죄죄한 청년의 짐까지 다 풀러보는 걸 봐서는 말 다했죠. 그런데, 이 얘기를 시간이 지난 다음 나중에 제 와이프(일본인입니다. 일본에서 만나 결혼했습니다.)한테 하니까 충분히 일리가 있다는 말을 하긴 하더군요.
"오빠 인상이 좀...음....그렇잖아...."
그 세관원 아저씨가 저의 일본생활의 꿈이 담긴 여행용 가방을 송두리채 탈탈 털어 검사를 하더군요. 이불도 삐져 나오고, 신라면, 면도기, 팬티류의 속옷까지 다 뒤지는게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제 머리 속에 주입되었던 <일본인=나쁜사람>의 공식이 막 인수분해를 지맘대로 하다가, 결국 한마디해야지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뭐라고 해야 저 인간이 충격을 먹을까 생각하는 것이었는데, 그때 당시 제가 일본어로 배운 것이라고 해봐야 <일본어 3개월만 하면 된다>류의 책 안에 나오는 아주 정숙한 교과서적인 단어들 밖에 없었던지라 그다지 충격을 줄 수가 없겠더라구요.
한 20초간 어떤 말을 쓸까 하면서 주욱 생각하는데, 갑자기 일본 가기 전에 한국에서 보았던 오오토모 카츠히로의 애니메이션 "아키라(アキラ)"에서 실험실에서 빠져 나온 테츠오가 카네다에게 외친 단어가 떠오르더군요. 그리고 자신있게 외쳤습니다.
"고노야로(この野?!)"
순간 모든 것이 스톱모션 걸린 듯한 흑백화면으로 몽타쥬 편집이 되어, 세관대 주위를 감쌌습니다. 양쪽의 세관원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제 뒤에서 기다리던 어느 여자 분은 자기가 들고 있던 짐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더군요. 뭐냐? 이 이상한 분위기는….
물론 지금이야 그때의 그 요상한 분위기의 정체에 대해서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일본은 원래 욕이 별로 없는 나라거든요.
한국이야 워낙 단어도 잘 발달되어 있고, 조합력도 뛰어나고 무엇보다 한국인들이 이 욕에 대해서 별로 거부감도 안 가진다는 것과 게다가 상상력마저 풍부한 바람에 자신의 입맛대로 맞는 욕을 창조해내기도 하는데, 일본은 워낙에 사람들이 순진해서인지 언어가 모자란 건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욕이 별로 없습니다.
제일 심한 욕이 '빠가야로(馬鹿野?'(영어로 치면 퍽유랑 같은 등급의 욕입니다. 미국 애들한테 퍽유하면 큰일나는 거 아시죠?)이고, 뭔가 분하고 억울할 때 혼자말로 혹은 상대방에게 내 뱉는게 '칙쇼(畜生)', 그리고 지역에 따라 틀리지만 [아호(アホ)]가 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일본어는 한국어와 달라서 단어로 이루어진 욕은 이정도 밖에 없죠. 다만 기분에 따라서 자신이 구사하는 문장이 달라지고, 호칭이 변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너>라는 의미의 일반적인 표현인 <아나타(あなた)>가 기분에 따라서는 <테메에(てめえ)>라는 단어로 치환되어 문장이나 회화에 쓰이는 것이죠.
위의 '고노야로'는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단어 중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제가 일본 생활을 주욱하면서 느낀 어감 상 "고노야로"라는 욕은 제일 심한 욕이라고 일컬어지는 "빠가야로" 보다 한급 아래이고, "칙쇼"보다는 한급 위의 욕이었던 겁니다.
그런 심한 욕을 생전 처음 보는, 그것도 이상한 인토네이션으로 외치는 외국인 녀석. 분위기가 썰렁해질 수밖에 없죠. 안 그래도 9.11 테러 때문에 모두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판에 말이죠.
그런데 그 세관원 아저씨가 저를 휙 쳐다보더니만 씨익 웃었습니다. 지금도 그 웃음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그때는 '고노야로'라는 단어가 나쁜건지, 좋은건지 몰랐기 때문에, '아! 이 양반 고노야로로는 충격을 안 먹는군'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말입니다.
여행용 가방 심사가 끝난 후, 제가 매고 있던 배낭용 가방을 풀어보라고 하더군요. 검정색 비닐 봉지를 보더니만 뭐냐구 물어봅니다. "홧? 홧?" 종가집 김치 팩을 검정 비닐 안에다가 넣어 놓았었는데, 그 검정비닐이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나 봅니다. 제가 열어서 보여줬죠. 그러니까,
"키무치데스까?(キムチですか?)"라고 바로 알더군요. 그러면서 웃는 얼굴로 김치를 쳐다보더군요.
왜 쳐다보지? 또 머리 속에서는 복잡다단한 인수분해 과정이 펼쳐지고, 저는 그 김치팩 중에서 제일 조그만 녀석 하나를 그 녀석에게 건넸습니다.
"고레, 프레젠또..(これ、プレゼント…)"
그렇습니다. 저는 그가 웃길래 하나 달라는 소린 줄 알았던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저도 이해불가능한 녀석입니다. 그 세관원은 그냥 웃는 것이 습관화된 맘씨 좋은 일본인 세관원에 불과했던 건데, 저 혼자서 욕도 하고, 갑자기 김치 팩도 선물하고 뭐 그랬던 것입니다.
아무튼 그 세관원은 제가 김치 건네면서 선물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엄청나게 당황하더니만, 다 가방에 집어넣으라고 그러면서 그냥 통과시켜 주더군요. 어이없는 해프닝이었지만, 저의 나리타에 대한 인상, 아니 일본에 대한 첫인상은 그렇게 다가 왔습니다.
살인적인 물가와 웃는 것이 주특기인 세관원 아저씨.
그 세관원 아저씨 아마 지금도 나리타의 어느 곳에서 계속 저와 같은 일본어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웃어 가면서 이것저것 검색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신주쿠행 나리타 익스프레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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