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소생을 느끼게 되였다. 60년만의 소생이다. 실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2001년 5월 11일 한센병국가배상소송 구마모도지방재판소 원고단의 조선인 이전 한센병환자는 승소직전에 이런 말을 남기였다.
한센병환자에 대한 력사상 류례 없는 일본의 국가범죄는 근 1세기동안 지속되여 왔는바 국가책임을 회피하려는 일본정부의 기도를 저지시킨 판결의 의의는 매우 크다.(한센병은 조선말로 문둥병 또는 라병 등이라고 하는데 차별어로 오해될것을 고려하여 의학용어 한센병으로 표기하며 법명, 문헌 등은 그대로 인용한다.)
공포심을 선동
한센병은 인류력사상 《공포의 병》으로 불리웠다. 그 요인은 병의 특징과 병에 대한 정치, 사회적인 시각의 두가지로 볼수 있다.
첫째로, 병의 특징으로 얼굴, 손발, 머리 등에 증상이 나타난다는것이 사람들에게 공포의식을 낳게 한 직접적요인으로 되며 동시에 병의 진행속도가 느리며 병으로 죽는자가 없기에 오래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여 공포심이 확산되였다고 볼수 있다.
둘째로, 당시 한센병에 대한 지식부족으로 유전병으로 인식된데로부터 일본에서는 한센병환자가 있는 가계를 《혈통》 으로 소외하는 사회적의식이 나타났으며 기독교에서도 《천벌병》이라 하여 병을 《악마》시하였다.
일본정부는 법의 공포와 더불어 《콜레라보다 무서운 감염병》이라고 선전하여 그 공포심을 한층 선동하였다.
료양소설치로 격리
영생격리정책은 료양소 설치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였다. 설치는 일제가 조선을 군사강점한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진행되였다.
차별과 편견에 찬 악법 《라예방에 관한 건》이 1907년에 제정되면서 그후 2년동안에 마쯔오까호요엥(아오모리현), 다마젠세이엥(도꾜도)등의 련합부립료양소가 설치되였다.
《만주사변》과 중일전면전쟁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전쟁이 본격화된 1930년대는 《라예방법》의 제정(1931년)과 함께 나가시마아이세이엥(오까야마현, 1930년)을 시발로 모든 료양소를 국가가 운영하게 되였다.(1941년)
또 모든 환자의 《강제격리》는 소위 《무라현운동》(1929년 아이찌현에서 시작, 전후 50년에도 진행)으로 강화되여 1930∼35년의 6년사이에 약 3배(3,261명부터 9,735명으로), 40년에는 당면 목표인 1만명의 《격리》가 실현되였다.
한센병료양소의 설치는 한마디로 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하여 설치된것이 아니라 《격리》자체에 목적을 두었다. 료양소의 설치와 격리의 법적근거로 된것이 바로 《라예방법》이다.
일본은 1907년의 법제정시점에서 한센균이 발병력, 감염력에 있어서 매우 미약한 균이라는 사실을 의학적으로 충분히 리해하고 있었으나 영생격리정책을 실시하였다.
한센병환자들은 병에 대한 공포와 차별의식에 의하여 사회와 친족들과도 소외되여 거리를 헤매거나 환자부락을 형성하면서 살아 갈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수치》로
19세기중엽까지 한센병환자들이 거지가 되여 일본 각지의 진쟈나 절을 방랑하고 있는것은 일반적인 모습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명치유신을 계기로 일본이 군국주의, 제국주의로 등장하게 되면서 점차 사정이 달라 지게 되였다.
구미렬강들을 하루빨리 따라 잡고 아시아의 지배를 노린 일본정부는 이미 서방나라들에서 과거의 병으로 된 한센병을 《국욕》(나라의 수치)로 보게 되면서 병에 대한 정책, 즉 환자들을 격리하고 사회에서 말살하려는 정책을 빨리 추진해야 한다는 《정치적의도》를 로골화한것이다. 1899년부터 외국인들이 일본국내를 자유로이 오갈수 있게 되여 환자들의 모습이 외국인들의 눈에 띄게 되였으며 점차 환자들을 치료 안하고 방치해 두는 일본정부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게 되였다.
또한 1897년에 진행된 제1차 국제라학회(베를린)에서 한센병은 감염증으로 확인된것도 일본의 격리정책을 시급히 추진하는 계기로 되였다.(1899년 《나이찌쟛꾜》)
회의에서는 또한 절대격리(감염원을 격리하는 예방을 위한 격리)는 불필요하며 상대격리(병에 대한 치료를 기본으로 하는 격리)를 추진하는것이 타당하다는것, 감염력은 미약하다는것이 확인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여전히 절대격리를 실시하였으며 그를 더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였다. 력사상 절대격리를 인정한 사실은 일본외에는 찾을수 없다.
격리정책은 1929년, 31년의 2번의 법개정에 의하여 더욱 강화되여 나갔다.
법개정으로 격리를 강화하게 된것은 《우성사상》, 《민족정화》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일본이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나라들에 대한 침략전쟁을 강화한 시기 군사파쑈체제하에서 사람들을 병력과 로동력으로 총동원하면서 건강유지를 의무화하는 한편 《야마도민족》의 질을 낮추는 한센병을 배제대상으로 한것이다. 격리정책은 바로 이러한 배경하에서 진행되여 환자의 인권을 완전히 무시한 차별과 편견의 악법이였다고 할수 있다.
한센병이란?
한센병이란 한센균(라균 Mycobacterium Leprae)에 의해 주로 피부와 말초신경이 침해되는 만성전염성면역질환이다.
한센균의 특징은 첫째로 사람의 신경과 결합하기 쉬운 균이라는것, 둘째로 비교적 온도가 낮은 부분에 침범하기 쉬워 얼굴, 코, 눈, 귀 등에 변형을 나타낸다는것, 셋째로 균의 증식속도가 매우 느려 병의 발각도 늦어 진다는것, 넷째로 독성이 매우 약하여 생명의 위험은 없다는것이다.
1948년 치료약 《프로민》의 개발을 계기로 치료법이 확립되였으며 현재 초기발견, 초기치료로 후유증없이 치유되는 병이다.
한센병은 《빈곤병》, 《식민지병》이라고도 한다. 면역력이 약화되면 감염되기 쉬운데 일제식민지시기 극도의 빈곤상태에 있었던 조선에서는 환자발생률이 일본의 10배로 되였다고 한다.(《재일조선인의 처우와 현황》 법무성습소편 1955년)
감소속에서도 계속 격리
일본이《라예방법》을 제정(1934년)하고 격리정책을 실시한 기간 환자수는 확실히 감소경향에 있었다.
환자수의 추이를 보면 《법》 제정전인 1900년부터 1935년까지 30,359→23,829명으로서 약 7000명이 감소되였으며 1900년부터 40년(40년현재 환자수 11,326명)까지 약 60%이상의 환자가 감소되였다.
한마디로 한센병환자감소의 요인은 새로 걸리는 환자의 감소에 있었다.
한센병환자의 감소요인은 일반적으로 그 병에 의한 사망, 새 치료약과 의료시설정비, 국외이주, 새 환자감소 등을 들수 있다. 한센병은 감염하여도 발병률은 낮고 그 요인도 정치, 경제, 사회적인자를 가진다.
노르웨이에서는 1800년대초 나폴레온전쟁으로 하여 극도의 기아상태와 함께 한센병이 대류행하였다. 그러나 1850년대이후는 경제적인 재생기에 들어 서면서 점차 환자는 감소되였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도 강제격리실시전부터 새 환자들이 감소하고 있는것은 결과적으로 격리정책과는 다른 사회, 경제적요인을 들수 있다.
《격리》정책의 전위부대 《일본라학회》는 1995년 《예방법페지를 위한 통일견해》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919∼35년까지의 한센병환자들의 년령구성을 보면 청장년환자의 감소와 상대적으로 로년환자의 증가를 확인》하면서 격리와 무관하게 새 환자들이 확실히 감소하고 있으며 《한센병자체의 종식》을 인정하면서도 《격리정책을 계속하였다.》
이처럼 예방을 위한 격리정책과 실지 환자들이 감소되였다는 사실은 무관한것임은 명백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953년 《라예방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도 96년까지 계속 존재하였다.
1996년 4월 드디여 《라예방법의 페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한세기동안 계속된 차별과 편견의 법이 막을 내리게 되였다. 한세기동안이나 계속된 법의 존재는 이전호에서 언급한 《격리》를 강화한 의도와 충분히 관련되여 있다고 할수 있다. 동시에 제1차대전이 시작된 이듬해 《격리》와 함께 《단종수술》(1915년)이라는 반인륜적범죄가 감행된 사실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다른 식민지나라에서도
한센병정책은 일본국내에 한한것은 아니였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된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그 정책은 시행되였다.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조선총독부는 1916년 《소록도자혜원》을 개설했으며 대만총독부는 1930년 《락생원》을 개설하고 34년 《라예방법》을, 35년에는《조선라예방법령》을 각각 공포하였다.
《만주국》에서는 39년 《라료양소관제》를 시행하여 《동강원》을 개설하였다.
1920∼30년대에 걸쳐 일본의 태평양점령지역인 나우루를 비롯한 미크로네시아서도에는 《남양청》에 의한 료양소(팔라우, 사이판, 야프의 섬들)가 설치되였다.
당시 팔라우섬에서 한센병이 발각된 동포환자는 《한주일에 20명정도의 조선인들이 섬에 이주하여 많은 사람들이 병에 감염되였다.》고 하였으며 《당시 팔라우섬 앞바다의 무인도는 〈라도〉라고 불리웠다.》고 하였다. 그 섬은 환자들만이 생활하였다고 한다.(필자증언수집 다마젠세이엥 1997년)
1943년 나우루섬에서 일본군은 환자들을 통채로 배 한척에 실어 놓고는 그들에게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하는 극악한 학살행위를 감행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사람들의 시체도 확인할수 없었다고 한다.(《International Journal of LEPROSY》 16권 4호 1948년)
《라예방법》은 병의 예방보다는 처음부터 《정치적의도》가 강한 《법》이였다.
《법》과 《격리》는 예방을 구실로 《〈야마또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고 유일한 〈가미노구니〉이며 한센병은 〈나라의 수치〉, 〈히노마루의 오점〉》이라는 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다.(《젠간꾜뉴스》) 1995년 1월 1일) 조선에 대한 식민지정책과 아시아태평양지역에 대한 침략전쟁하에서 《민족정화》와 군국주의파쑈사상은 《인간의 정신구조》를 바꾸어 한센병환자들을 차별과 편견의 생지옥으로 몰아 넣었다.
◇ ◇
한센병재판이 시작된 당시(1998년) 원고단 성원에게 《당신들은 우리의 세금으로 부양을 받는데 도대체 국가소송이란 말도 안돼. 죽어! 죽어!》라는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한다. 일본사회의 차별의식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2002년 9월 17일사건이후 일본언론을 비롯한 일부 세력들이 일본사회를 민족배타주의로 선동하고 있는데 이것은 본질에 있어서 지난 시기 한센병환자들에게 취해 진 정책과 사회적의식에서 동질적양상을 띠고 있다.
한센병판결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게 했다는 측면에서 재일동포들의 과거문제에 있어서도 큰 의의가 있다고 할수 있다. 한센병환자들의 투쟁을 계승하여 침략전쟁과 식민지지배의 동포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차원의 사죄와 보상을 꼭 달성해야 할것이다. 김귀동(조선대학교 력사지리학부 조수)
한센병환자의 현황
일본 각지에는 국립 13개, 사립 3개의 합계 16개의 료양소가 있는데 이곳 입소자수는 모두 4,090명이다. 입소자의 년령구성을 보면 60살이상이 92%, 70살이상이 66%이다. 년간사망자수는 한개 중규모료양소시설에 해당되는 200명을 넘는다고 한다.(00년 후생성 발표)
료양소에 있는 조선인동포환자는 전체의 5.6%, 230명이다.
50년대부터 60년대사이의 동포환자수는 630명안팎이였으나 89년부터 99년까지의 10년간에 약 100명을 넘는 동포환자들이 사망하였으며 최근 한해동안에 10명이상이 사망하고 있다.
현재 동포환자들은 80살이상의 고령자, 중도장애자가 대다수를 차지한다.(《재일조선, 한국인한센병환자동맹》 2002년통계자료)
조선의 한센병시설
20세기초 조선의 한센병시설은 광주, 부산, 대구 등 3곳에 있었다. 외국인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료양원이였다. 그러나 규모와 수용인원이 작은것과 관련하여 대부분의 환자들은 다리밑에서 생활하거나 류랑, 걸식하는 생활처지에 있었다.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환자들은 국가체면을 더럽힌다고 하여 이들을 일정한 장소에 격리수용할 방침을 세워 1916년 소록도에 《소록도자혜원》을 설치하였다. 현재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개칭되였다.
김귀동 (조선대학교 력사지리학부 조수)
1969년 11월 28일 남. 1994년 3월 조선대학교 력사지리학부 졸업. 1996년 3월 조선대학교 연구원졸업. 현재 조대 력지학부 조수. 론문 《남조선의 공업화와 환경문제-대구수절오염사건을 중심으로》 등을 발표.
조선신보에서
daipapa25@hotmail.com 김수종입니다.
http://www.onekorea.jp 재일코리안 인터넷 신문
2001년 5월 11일 한센병국가배상소송 구마모도지방재판소 원고단의 조선인 이전 한센병환자는 승소직전에 이런 말을 남기였다.
한센병환자에 대한 력사상 류례 없는 일본의 국가범죄는 근 1세기동안 지속되여 왔는바 국가책임을 회피하려는 일본정부의 기도를 저지시킨 판결의 의의는 매우 크다.(한센병은 조선말로 문둥병 또는 라병 등이라고 하는데 차별어로 오해될것을 고려하여 의학용어 한센병으로 표기하며 법명, 문헌 등은 그대로 인용한다.)
공포심을 선동
한센병은 인류력사상 《공포의 병》으로 불리웠다. 그 요인은 병의 특징과 병에 대한 정치, 사회적인 시각의 두가지로 볼수 있다.
첫째로, 병의 특징으로 얼굴, 손발, 머리 등에 증상이 나타난다는것이 사람들에게 공포의식을 낳게 한 직접적요인으로 되며 동시에 병의 진행속도가 느리며 병으로 죽는자가 없기에 오래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여 공포심이 확산되였다고 볼수 있다.
둘째로, 당시 한센병에 대한 지식부족으로 유전병으로 인식된데로부터 일본에서는 한센병환자가 있는 가계를 《혈통》 으로 소외하는 사회적의식이 나타났으며 기독교에서도 《천벌병》이라 하여 병을 《악마》시하였다.
일본정부는 법의 공포와 더불어 《콜레라보다 무서운 감염병》이라고 선전하여 그 공포심을 한층 선동하였다.
료양소설치로 격리
영생격리정책은 료양소 설치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였다. 설치는 일제가 조선을 군사강점한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진행되였다.
차별과 편견에 찬 악법 《라예방에 관한 건》이 1907년에 제정되면서 그후 2년동안에 마쯔오까호요엥(아오모리현), 다마젠세이엥(도꾜도)등의 련합부립료양소가 설치되였다.
《만주사변》과 중일전면전쟁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전쟁이 본격화된 1930년대는 《라예방법》의 제정(1931년)과 함께 나가시마아이세이엥(오까야마현, 1930년)을 시발로 모든 료양소를 국가가 운영하게 되였다.(1941년)
또 모든 환자의 《강제격리》는 소위 《무라현운동》(1929년 아이찌현에서 시작, 전후 50년에도 진행)으로 강화되여 1930∼35년의 6년사이에 약 3배(3,261명부터 9,735명으로), 40년에는 당면 목표인 1만명의 《격리》가 실현되였다.
한센병료양소의 설치는 한마디로 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하여 설치된것이 아니라 《격리》자체에 목적을 두었다. 료양소의 설치와 격리의 법적근거로 된것이 바로 《라예방법》이다.
일본은 1907년의 법제정시점에서 한센균이 발병력, 감염력에 있어서 매우 미약한 균이라는 사실을 의학적으로 충분히 리해하고 있었으나 영생격리정책을 실시하였다.
한센병환자들은 병에 대한 공포와 차별의식에 의하여 사회와 친족들과도 소외되여 거리를 헤매거나 환자부락을 형성하면서 살아 갈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수치》로
19세기중엽까지 한센병환자들이 거지가 되여 일본 각지의 진쟈나 절을 방랑하고 있는것은 일반적인 모습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명치유신을 계기로 일본이 군국주의, 제국주의로 등장하게 되면서 점차 사정이 달라 지게 되였다.
구미렬강들을 하루빨리 따라 잡고 아시아의 지배를 노린 일본정부는 이미 서방나라들에서 과거의 병으로 된 한센병을 《국욕》(나라의 수치)로 보게 되면서 병에 대한 정책, 즉 환자들을 격리하고 사회에서 말살하려는 정책을 빨리 추진해야 한다는 《정치적의도》를 로골화한것이다. 1899년부터 외국인들이 일본국내를 자유로이 오갈수 있게 되여 환자들의 모습이 외국인들의 눈에 띄게 되였으며 점차 환자들을 치료 안하고 방치해 두는 일본정부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게 되였다.
또한 1897년에 진행된 제1차 국제라학회(베를린)에서 한센병은 감염증으로 확인된것도 일본의 격리정책을 시급히 추진하는 계기로 되였다.(1899년 《나이찌쟛꾜》)
회의에서는 또한 절대격리(감염원을 격리하는 예방을 위한 격리)는 불필요하며 상대격리(병에 대한 치료를 기본으로 하는 격리)를 추진하는것이 타당하다는것, 감염력은 미약하다는것이 확인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여전히 절대격리를 실시하였으며 그를 더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였다. 력사상 절대격리를 인정한 사실은 일본외에는 찾을수 없다.
격리정책은 1929년, 31년의 2번의 법개정에 의하여 더욱 강화되여 나갔다.
법개정으로 격리를 강화하게 된것은 《우성사상》, 《민족정화》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일본이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나라들에 대한 침략전쟁을 강화한 시기 군사파쑈체제하에서 사람들을 병력과 로동력으로 총동원하면서 건강유지를 의무화하는 한편 《야마도민족》의 질을 낮추는 한센병을 배제대상으로 한것이다. 격리정책은 바로 이러한 배경하에서 진행되여 환자의 인권을 완전히 무시한 차별과 편견의 악법이였다고 할수 있다.
한센병이란?
한센병이란 한센균(라균 Mycobacterium Leprae)에 의해 주로 피부와 말초신경이 침해되는 만성전염성면역질환이다.
한센균의 특징은 첫째로 사람의 신경과 결합하기 쉬운 균이라는것, 둘째로 비교적 온도가 낮은 부분에 침범하기 쉬워 얼굴, 코, 눈, 귀 등에 변형을 나타낸다는것, 셋째로 균의 증식속도가 매우 느려 병의 발각도 늦어 진다는것, 넷째로 독성이 매우 약하여 생명의 위험은 없다는것이다.
1948년 치료약 《프로민》의 개발을 계기로 치료법이 확립되였으며 현재 초기발견, 초기치료로 후유증없이 치유되는 병이다.
한센병은 《빈곤병》, 《식민지병》이라고도 한다. 면역력이 약화되면 감염되기 쉬운데 일제식민지시기 극도의 빈곤상태에 있었던 조선에서는 환자발생률이 일본의 10배로 되였다고 한다.(《재일조선인의 처우와 현황》 법무성습소편 1955년)
감소속에서도 계속 격리
일본이《라예방법》을 제정(1934년)하고 격리정책을 실시한 기간 환자수는 확실히 감소경향에 있었다.
환자수의 추이를 보면 《법》 제정전인 1900년부터 1935년까지 30,359→23,829명으로서 약 7000명이 감소되였으며 1900년부터 40년(40년현재 환자수 11,326명)까지 약 60%이상의 환자가 감소되였다.
한마디로 한센병환자감소의 요인은 새로 걸리는 환자의 감소에 있었다.
한센병환자의 감소요인은 일반적으로 그 병에 의한 사망, 새 치료약과 의료시설정비, 국외이주, 새 환자감소 등을 들수 있다. 한센병은 감염하여도 발병률은 낮고 그 요인도 정치, 경제, 사회적인자를 가진다.
노르웨이에서는 1800년대초 나폴레온전쟁으로 하여 극도의 기아상태와 함께 한센병이 대류행하였다. 그러나 1850년대이후는 경제적인 재생기에 들어 서면서 점차 환자는 감소되였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도 강제격리실시전부터 새 환자들이 감소하고 있는것은 결과적으로 격리정책과는 다른 사회, 경제적요인을 들수 있다.
《격리》정책의 전위부대 《일본라학회》는 1995년 《예방법페지를 위한 통일견해》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919∼35년까지의 한센병환자들의 년령구성을 보면 청장년환자의 감소와 상대적으로 로년환자의 증가를 확인》하면서 격리와 무관하게 새 환자들이 확실히 감소하고 있으며 《한센병자체의 종식》을 인정하면서도 《격리정책을 계속하였다.》
이처럼 예방을 위한 격리정책과 실지 환자들이 감소되였다는 사실은 무관한것임은 명백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953년 《라예방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도 96년까지 계속 존재하였다.
1996년 4월 드디여 《라예방법의 페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한세기동안 계속된 차별과 편견의 법이 막을 내리게 되였다. 한세기동안이나 계속된 법의 존재는 이전호에서 언급한 《격리》를 강화한 의도와 충분히 관련되여 있다고 할수 있다. 동시에 제1차대전이 시작된 이듬해 《격리》와 함께 《단종수술》(1915년)이라는 반인륜적범죄가 감행된 사실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다른 식민지나라에서도
한센병정책은 일본국내에 한한것은 아니였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된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그 정책은 시행되였다.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조선총독부는 1916년 《소록도자혜원》을 개설했으며 대만총독부는 1930년 《락생원》을 개설하고 34년 《라예방법》을, 35년에는《조선라예방법령》을 각각 공포하였다.
《만주국》에서는 39년 《라료양소관제》를 시행하여 《동강원》을 개설하였다.
1920∼30년대에 걸쳐 일본의 태평양점령지역인 나우루를 비롯한 미크로네시아서도에는 《남양청》에 의한 료양소(팔라우, 사이판, 야프의 섬들)가 설치되였다.
당시 팔라우섬에서 한센병이 발각된 동포환자는 《한주일에 20명정도의 조선인들이 섬에 이주하여 많은 사람들이 병에 감염되였다.》고 하였으며 《당시 팔라우섬 앞바다의 무인도는 〈라도〉라고 불리웠다.》고 하였다. 그 섬은 환자들만이 생활하였다고 한다.(필자증언수집 다마젠세이엥 1997년)
1943년 나우루섬에서 일본군은 환자들을 통채로 배 한척에 실어 놓고는 그들에게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하는 극악한 학살행위를 감행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사람들의 시체도 확인할수 없었다고 한다.(《International Journal of LEPROSY》 16권 4호 1948년)
《라예방법》은 병의 예방보다는 처음부터 《정치적의도》가 강한 《법》이였다.
《법》과 《격리》는 예방을 구실로 《〈야마또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고 유일한 〈가미노구니〉이며 한센병은 〈나라의 수치〉, 〈히노마루의 오점〉》이라는 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다.(《젠간꾜뉴스》) 1995년 1월 1일) 조선에 대한 식민지정책과 아시아태평양지역에 대한 침략전쟁하에서 《민족정화》와 군국주의파쑈사상은 《인간의 정신구조》를 바꾸어 한센병환자들을 차별과 편견의 생지옥으로 몰아 넣었다.
◇ ◇
한센병재판이 시작된 당시(1998년) 원고단 성원에게 《당신들은 우리의 세금으로 부양을 받는데 도대체 국가소송이란 말도 안돼. 죽어! 죽어!》라는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한다. 일본사회의 차별의식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2002년 9월 17일사건이후 일본언론을 비롯한 일부 세력들이 일본사회를 민족배타주의로 선동하고 있는데 이것은 본질에 있어서 지난 시기 한센병환자들에게 취해 진 정책과 사회적의식에서 동질적양상을 띠고 있다.
한센병판결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게 했다는 측면에서 재일동포들의 과거문제에 있어서도 큰 의의가 있다고 할수 있다. 한센병환자들의 투쟁을 계승하여 침략전쟁과 식민지지배의 동포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차원의 사죄와 보상을 꼭 달성해야 할것이다. 김귀동(조선대학교 력사지리학부 조수)
한센병환자의 현황
일본 각지에는 국립 13개, 사립 3개의 합계 16개의 료양소가 있는데 이곳 입소자수는 모두 4,090명이다. 입소자의 년령구성을 보면 60살이상이 92%, 70살이상이 66%이다. 년간사망자수는 한개 중규모료양소시설에 해당되는 200명을 넘는다고 한다.(00년 후생성 발표)
료양소에 있는 조선인동포환자는 전체의 5.6%, 230명이다.
50년대부터 60년대사이의 동포환자수는 630명안팎이였으나 89년부터 99년까지의 10년간에 약 100명을 넘는 동포환자들이 사망하였으며 최근 한해동안에 10명이상이 사망하고 있다.
현재 동포환자들은 80살이상의 고령자, 중도장애자가 대다수를 차지한다.(《재일조선, 한국인한센병환자동맹》 2002년통계자료)
조선의 한센병시설
20세기초 조선의 한센병시설은 광주, 부산, 대구 등 3곳에 있었다. 외국인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료양원이였다. 그러나 규모와 수용인원이 작은것과 관련하여 대부분의 환자들은 다리밑에서 생활하거나 류랑, 걸식하는 생활처지에 있었다.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환자들은 국가체면을 더럽힌다고 하여 이들을 일정한 장소에 격리수용할 방침을 세워 1916년 소록도에 《소록도자혜원》을 설치하였다. 현재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개칭되였다.
김귀동 (조선대학교 력사지리학부 조수)
1969년 11월 28일 남. 1994년 3월 조선대학교 력사지리학부 졸업. 1996년 3월 조선대학교 연구원졸업. 현재 조대 력지학부 조수. 론문 《남조선의 공업화와 환경문제-대구수절오염사건을 중심으로》 등을 발표.
조선신보에서
daipapa25@hotmail.com 김수종입니다.
http://www.onekorea.jp 재일코리안 인터넷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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