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핏속을 관통하는 사대의 나쁜 맥을 끊어라
이제는 우리의 자주성을 되살릴 때다
글:장팔현
이제 우리도 자신감을 갖자! 왜? 주변 강대국에 스스로 주눅이 들어 정당하고 올바른 소리조차 떳떳이 주장을 못하고 남 눈치 봐 가며 어설픈 소국 사대외교만을 자신 없이 되풀이하는가? 작아지려는 자, 스스로 작아질 것이요, 커지려는 자, 스스로 커질 것이다.
이제는 당당한 외교를 할만한 국가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 외교가 동남아의 말레이시아나 필리핀 외교보다 낫다고 누가 자신 있게 얘기 할 수 있겠는가? 아니, 인도와 대치 중으로 미국의 절대적 지지가 필요한 파키스탄보다도 우리가 자주적 외교를 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어찌 우리는 중심에 없고 항상 남만 존재하는가? 그러니 우리말도 버리고 남 나라 말까지 공용화하자고 설치는 나라가 된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993년 고려를 침략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을 담판으로 굴복시킨 서 희 장군의 후손으로서 너무 창피하지 않는가? 외교관이요, 정치가였던 서희 장군의 정정당당한 유세야말로 그 어떤 대군사나 수십 명의 장군들보다 큰 성과를 거두지 않았는가?
스스로 소국임을 내세우고 스스로 작아지는 ‘축소 지향적 한국외교’는 분명 자신감 없는 외교로 비쳐진다.
사대의 역사는 길고도 길도다!
사대의 사상은 유학의 이상세계인 ‘평화’와 ‘대동’에 기초하는 ‘중화사상’으로 이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일찍이 《춘추좌씨전》소공 30년 조에 나오는 말로 큰 나라와 작은 나라로 이루어진 세계는 예의를 지켜야 하는 바,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고 큰 것은 작을 것을 어여삐 여기는 것을 이른다’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 바로 ‘사대’와 ‘자소’라는 말이 나오고 고만고만한 나라끼리는 ‘교린(交隣-서로 사이좋게 지냄)’해야 한다는 사상이니, 국내질서와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중국의 전통적 세계관이다. 이는 또한 중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라는 ‘중화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논리로 둔갑된다.
사대. 자소. 교린이라는 개념 자체는 원래 서주 시대 주나라 왕이 대소 제후간의 우호증진이나 친목도모 및 결속력 강화를 위한 정책목적을 달성키 위해 권장하던 ‘예의를 근본으로 하는 정치’인 ‘예치(禮治)’에 근원한다. 이러한 사상이 발전하여 국가 간의 관계 정립으로도 원용되기에 이르렀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사상이 한자 전래와 함께 자연적으로 한반도 국가에도 흘러 들어오니, 우리의 사상은 우리도 모르게 중화사상의 논리에 함몰되어 스스로 우리를 ‘소국’이라 위치시키고 중국을 ‘대국’으로 여기니, 우리는 중국의 사상전에 스스로 세뇌되고 말려든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럼 줏대 없는 사대주의는 언제부터 우리나라 외교의 근간을 이루었나? 그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선 삼한시대부터 이러한 사대의식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38년2월 포공을 보내어 마한을 방문하니, 마한왕이 포공에 책망하여 이르기를 ”변진 이한(진한, 변한)은 우리 (마한)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조공을 하지 않으니, 어찌 사대의 예를 갖추었다 할 것이냐?“ 라고 한 대목이 시초로 보인다. 마한은 고조선이 망하고 북쪽에서 내려온 이주민이었던 그들 유민들에게 나라의 동남쪽을 떼어준 대국이고, 진한, 변한은 소국으로서 당연히 예를 갖추어 마한을 섬겨야 한다는 논리였다.
‘고구려본기’에도 부여왕 대소의 사신이 고구려왕을 책망하여 이르기를“나라란 크고 작은 구분이 있고, 사람이란 어른과 아이의 순서가 있으니, 작은 자가 큰 것을 섬김은 예의이다”라 갈파하고 있다.
신라의 대 중국 사대가 우리외교를 망치다!
우리역사에서 대외의 이민족에게 사대를 함은 신라의 김춘추가 시초가 아닌가한다.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에 이르기를, 춘추가 무릎을 꿇고 당 태종에 백제의 신라침입을 맹비난하면서 아뢰기를, “춘추가 또한 신라 관리들의 복식을 고쳐 중화와 같은 복장으로 따라 입겠다고 청하니, 안의 대궐로부터 진귀한 복장을 내어다가 춘추와 그 수행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라 기록되어 있으니 이 것이 대 중국 사대의 시작으로 보인다.
고려 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최영 장군간의 싸움도 유학에 물든 사대주의자와 자주정신에 기초한 숭불파간의 싸움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대의 맥은 태초부터 불교를 억제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숭유억불 책’으로 문을 연 조선시대에 한층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다.
조선조의 사대사상은 명. 청 교체기에 ‘소 중화사상’으로까지 발전하여 조선이 명실상부하게 주나라와 명나라를 잇는 중화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니 이야말로 중화에 중독 되어 혈연을 잊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계기가 되었다. 완전히 중화사상에 푹 빠져 중국에 사상적으로 종속을 자초하니 고구려 발해의 후손일 수밖에 없는 여진족을 들판에 사는 사람이라는 ‘야인(野人) ’이라 깔보고 오랑캐라 불렀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었던가? 핏줄은 우리와 가장 가깝거늘 친족은 멀리하고 중국을 우러러 ‘부모의 나라요, 형님의 나라’로 보았으니 이 아니,어불성설인가? 그러니 야인들이 만든 청나라를 섬길 수 없다하여 스스로 ‘소중화’를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야만국 청나라의 무력에 의해서는 굴복됐지만, 사상적으로는 명의 대를 이은 조선이 우위에 있다고 자부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대 중국(한족 중심의 중화) 종속적 사상과 행동이 결국은 우리를 스스로 얕보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오늘날 고구려 역사도 중국 역사로 왜곡하는 빌미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 심각히 반성해야 할 때이다. 조선의 외교는 오로지 대국인 중국만을 사대로서 예를 갖추면 나라가 평화롭다고 본 것일까? 어쩌면 ‘호가호위’하려는 발상은 아니었던가? 그러한 발상이 임진왜란 시에도 우리 스스로 율곡의 고견을 청취하여 미리 10만 군을 양병 하여 대비하였더라면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텐데, 결국 일본의 침입을 받고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이를 물리침에 있어서도 대국 명나라의 도움을 받으면서 선조왕은 물론이요,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조차 얼마나 큰 수모를 겪고 수많은 여인네들이 원군이자, 진주군 격인 명군으로부터 또한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하였던가?
유학이 문화를 꽃피웠고 또한 자주사상을 좀 먹었다.
그러면서도 ‘소 중화사상’은 남북 인접국을 우습게 여기는 문화적 자위 수단이 되어 이들을 오랑캐 국이라 했으니, 일본은 남쪽오랑캐인 ‘남만’이요, 북쪽 여진은 ‘북적’이 되고 만 것이다. 현실적 힘의 관계로 볼 때는 국력 면에서 이들 오랑캐보다도 뒤떨어진 때도 있었건만, 우리의 정신세계는 오만과 교만으로 가득 찬 허상에 불과했기에 우리는 역사에서 북으로부터도 남으로부터도 얕보던 두 나라에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당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몽유병적 자아도취 상태였던 것으로 비쳐진다. 그러면서도 ‘호(胡-오랑캐)’자와 ‘왜(倭)’라는 비칭을 쓰고 있었으니, 우리는 국력이 딸려 엄청난 피해를 당하고도 사상만은 여전히 반성을 모르고 고고했으니, 이를 현명하다고 해야 할지, 실력(국력)도 없이 ‘소 중화사상’의 허울을 쓴 덕에 맛 본 국난이라고나 할까? 쓰라린 수모를 당했던 것이다.
더욱이 교린 상대국인 일본 막부의 장군을 거추(巨酋)라 하고, 대마도 종씨(宗氏)를 대마도주(對馬島主)라 부르고 만주족을 가장 격이 낮은 하위 개념의 객(客)이라 하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관념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던 북쪽 민족과의 거리감만 넓혀놨고 결국은 이민족으로서 영영 갈라지게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청나라라는 대국을 건설했던 이들 여진인(만주족)이 이제는 중국에 동화되어 버리고, 중국이 만주지역을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왜곡을 하는 것은 아닐지?
이러한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와 ‘소 중화사상’은 일제 시에도 그대로 이어져 친일파들이 설치는 시대를 이어왔다. 이완용의 매국행위는 물론이요, 최남선이나 이광수 등등 수많은 사대주의자들의 선동은 독립군의 의로움에 비하면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요, 하물며 창씨개명 때도 당당했던 민초들은 해학적인 ‘텐노헤이카(天野炳夏-발음상으로만 보면 ’천황폐하‘라는 뜻도 되고 “병하라는 사람이 천황”이라는 뜻도 됨)’라는 일본식 이름을 지어 저항했던 것이다.
이처럼 현재의 친미사대주의자들의 ‘대국 섬김 사상’도 알고 보면 그 뿌리가 아주 오래되고 깊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고구려, 백제의 당당함과 자주적인 사상을 되살릴 때가 되었다고 본다. 왜? 당연히 주장해야할 말조차도 움츠리고 숨기고 스스로 소국이 되어 대국에 예를 갖추려고만 드는가? 그것조차도 신라와 조선시대의 선조들이 남긴 유물이라 할 것인가? 오히려 그 사대의 유물을 버리고 고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에서 우리의 정신적 유산을 찾아볼 때이다. 오죽하면 중국, 일본서도 유학이라 부르는 생활철학을 가지고 한국서만 “유교”라는 종교로까지 발전시켰을까하는 생각이 듦은 과연 필자뿐일런가?
중국이나 한반도 국가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이던 후진국 일본(당시는 ‘왜국’이 정식 명칭)의 성덕태자조차도 607년 수나라에 보낸 일본 사신의 국서에, “해 뜨는 동쪽의 천자가, 해 저무는 나라의 천자 앞으로 서간을 보낸다”라 하여 수양제의 격노를 샀던 일까지 있었다.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작지만, 이러한 호기라든가 돈키호테 식일지라도 자주성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개화시기가 비록 늦었지만, 메이지 때 꽃 필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의 내면
속에 흐르는 이러한 정신은 ‘야마토 타마시이(大和魂)’로서 국력이 뒷받침 될 때는 항상 폭발하는 것이다. 그 화산재를 우리는 고스란히 뒤집어썼으니, 바로 임진왜란, 정유재란, 한일합방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도 고구려나 백제의 자주적 외교사상만 이어받아도, 미국의 이라크 파병 압력은 물론 시건방진 섬나라 영국의 간섭까지 듣지는 않을 것이다. 외교는 당당함에 있다. 스스로 축소지향적인 작아짐에서 벗어나 확대지향성의 자신감을 가졌으면 한다. 아니, 우리 경제력에 걸 맞는 외교만이라도 펼쳐 줬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일찍이 자주성과 독립정신에 기초한 ‘평화사상(홍익인가)’은 우리나라가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자신감의 표출이자, 자주사상이다. 왜? 우리의 고유사상인 자주성조차 잃어버리고 스스로 작은 나라라 여기면서 ‘사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하지 않는가? 이제는 우리 스스로 채운 ‘사대’의 그 단단한 맥을 끊어 우리의 사상과 행동을 억압했던 그 족쇄와 껍질을 깰 때가 되었다고 본다. 나는 참으로 용감하고 당당한 서 희 장군과 같은 외교관이 지금부터라도 우리나라에 수도 없이 나오기를 바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소공(昭公) 30년 조에“禮者, 小事大大字小謂”라 보
인다.
**《삼국사기》권13, <고구려본기>“夫國有大小, 人有長幼, 以小事大者, 禮也”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春秋又請改其章服, 以從中華制, 於是, 內出珍服
賜春秋及其從者“
****《수서》및《일본서기》에 이르기를“日出處天子, 致書日沒處天子”라 기록되
어 있으며,《일본서기》의 기록은 《수서》<왜국전>을 인용한 문구임.
이제는 우리의 자주성을 되살릴 때다
글:장팔현
이제 우리도 자신감을 갖자! 왜? 주변 강대국에 스스로 주눅이 들어 정당하고 올바른 소리조차 떳떳이 주장을 못하고 남 눈치 봐 가며 어설픈 소국 사대외교만을 자신 없이 되풀이하는가? 작아지려는 자, 스스로 작아질 것이요, 커지려는 자, 스스로 커질 것이다.
이제는 당당한 외교를 할만한 국가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 외교가 동남아의 말레이시아나 필리핀 외교보다 낫다고 누가 자신 있게 얘기 할 수 있겠는가? 아니, 인도와 대치 중으로 미국의 절대적 지지가 필요한 파키스탄보다도 우리가 자주적 외교를 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어찌 우리는 중심에 없고 항상 남만 존재하는가? 그러니 우리말도 버리고 남 나라 말까지 공용화하자고 설치는 나라가 된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993년 고려를 침략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을 담판으로 굴복시킨 서 희 장군의 후손으로서 너무 창피하지 않는가? 외교관이요, 정치가였던 서희 장군의 정정당당한 유세야말로 그 어떤 대군사나 수십 명의 장군들보다 큰 성과를 거두지 않았는가?
스스로 소국임을 내세우고 스스로 작아지는 ‘축소 지향적 한국외교’는 분명 자신감 없는 외교로 비쳐진다.
사대의 역사는 길고도 길도다!
사대의 사상은 유학의 이상세계인 ‘평화’와 ‘대동’에 기초하는 ‘중화사상’으로 이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일찍이 《춘추좌씨전》소공 30년 조에 나오는 말로 큰 나라와 작은 나라로 이루어진 세계는 예의를 지켜야 하는 바,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고 큰 것은 작을 것을 어여삐 여기는 것을 이른다’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 바로 ‘사대’와 ‘자소’라는 말이 나오고 고만고만한 나라끼리는 ‘교린(交隣-서로 사이좋게 지냄)’해야 한다는 사상이니, 국내질서와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중국의 전통적 세계관이다. 이는 또한 중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라는 ‘중화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논리로 둔갑된다.
사대. 자소. 교린이라는 개념 자체는 원래 서주 시대 주나라 왕이 대소 제후간의 우호증진이나 친목도모 및 결속력 강화를 위한 정책목적을 달성키 위해 권장하던 ‘예의를 근본으로 하는 정치’인 ‘예치(禮治)’에 근원한다. 이러한 사상이 발전하여 국가 간의 관계 정립으로도 원용되기에 이르렀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사상이 한자 전래와 함께 자연적으로 한반도 국가에도 흘러 들어오니, 우리의 사상은 우리도 모르게 중화사상의 논리에 함몰되어 스스로 우리를 ‘소국’이라 위치시키고 중국을 ‘대국’으로 여기니, 우리는 중국의 사상전에 스스로 세뇌되고 말려든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럼 줏대 없는 사대주의는 언제부터 우리나라 외교의 근간을 이루었나? 그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선 삼한시대부터 이러한 사대의식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38년2월 포공을 보내어 마한을 방문하니, 마한왕이 포공에 책망하여 이르기를 ”변진 이한(진한, 변한)은 우리 (마한)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조공을 하지 않으니, 어찌 사대의 예를 갖추었다 할 것이냐?“ 라고 한 대목이 시초로 보인다. 마한은 고조선이 망하고 북쪽에서 내려온 이주민이었던 그들 유민들에게 나라의 동남쪽을 떼어준 대국이고, 진한, 변한은 소국으로서 당연히 예를 갖추어 마한을 섬겨야 한다는 논리였다.
‘고구려본기’에도 부여왕 대소의 사신이 고구려왕을 책망하여 이르기를“나라란 크고 작은 구분이 있고, 사람이란 어른과 아이의 순서가 있으니, 작은 자가 큰 것을 섬김은 예의이다”라 갈파하고 있다.
신라의 대 중국 사대가 우리외교를 망치다!
우리역사에서 대외의 이민족에게 사대를 함은 신라의 김춘추가 시초가 아닌가한다.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에 이르기를, 춘추가 무릎을 꿇고 당 태종에 백제의 신라침입을 맹비난하면서 아뢰기를, “춘추가 또한 신라 관리들의 복식을 고쳐 중화와 같은 복장으로 따라 입겠다고 청하니, 안의 대궐로부터 진귀한 복장을 내어다가 춘추와 그 수행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라 기록되어 있으니 이 것이 대 중국 사대의 시작으로 보인다.
고려 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최영 장군간의 싸움도 유학에 물든 사대주의자와 자주정신에 기초한 숭불파간의 싸움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대의 맥은 태초부터 불교를 억제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숭유억불 책’으로 문을 연 조선시대에 한층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다.
조선조의 사대사상은 명. 청 교체기에 ‘소 중화사상’으로까지 발전하여 조선이 명실상부하게 주나라와 명나라를 잇는 중화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니 이야말로 중화에 중독 되어 혈연을 잊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계기가 되었다. 완전히 중화사상에 푹 빠져 중국에 사상적으로 종속을 자초하니 고구려 발해의 후손일 수밖에 없는 여진족을 들판에 사는 사람이라는 ‘야인(野人) ’이라 깔보고 오랑캐라 불렀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었던가? 핏줄은 우리와 가장 가깝거늘 친족은 멀리하고 중국을 우러러 ‘부모의 나라요, 형님의 나라’로 보았으니 이 아니,어불성설인가? 그러니 야인들이 만든 청나라를 섬길 수 없다하여 스스로 ‘소중화’를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야만국 청나라의 무력에 의해서는 굴복됐지만, 사상적으로는 명의 대를 이은 조선이 우위에 있다고 자부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대 중국(한족 중심의 중화) 종속적 사상과 행동이 결국은 우리를 스스로 얕보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오늘날 고구려 역사도 중국 역사로 왜곡하는 빌미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 심각히 반성해야 할 때이다. 조선의 외교는 오로지 대국인 중국만을 사대로서 예를 갖추면 나라가 평화롭다고 본 것일까? 어쩌면 ‘호가호위’하려는 발상은 아니었던가? 그러한 발상이 임진왜란 시에도 우리 스스로 율곡의 고견을 청취하여 미리 10만 군을 양병 하여 대비하였더라면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텐데, 결국 일본의 침입을 받고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이를 물리침에 있어서도 대국 명나라의 도움을 받으면서 선조왕은 물론이요,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조차 얼마나 큰 수모를 겪고 수많은 여인네들이 원군이자, 진주군 격인 명군으로부터 또한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하였던가?
유학이 문화를 꽃피웠고 또한 자주사상을 좀 먹었다.
그러면서도 ‘소 중화사상’은 남북 인접국을 우습게 여기는 문화적 자위 수단이 되어 이들을 오랑캐 국이라 했으니, 일본은 남쪽오랑캐인 ‘남만’이요, 북쪽 여진은 ‘북적’이 되고 만 것이다. 현실적 힘의 관계로 볼 때는 국력 면에서 이들 오랑캐보다도 뒤떨어진 때도 있었건만, 우리의 정신세계는 오만과 교만으로 가득 찬 허상에 불과했기에 우리는 역사에서 북으로부터도 남으로부터도 얕보던 두 나라에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당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몽유병적 자아도취 상태였던 것으로 비쳐진다. 그러면서도 ‘호(胡-오랑캐)’자와 ‘왜(倭)’라는 비칭을 쓰고 있었으니, 우리는 국력이 딸려 엄청난 피해를 당하고도 사상만은 여전히 반성을 모르고 고고했으니, 이를 현명하다고 해야 할지, 실력(국력)도 없이 ‘소 중화사상’의 허울을 쓴 덕에 맛 본 국난이라고나 할까? 쓰라린 수모를 당했던 것이다.
더욱이 교린 상대국인 일본 막부의 장군을 거추(巨酋)라 하고, 대마도 종씨(宗氏)를 대마도주(對馬島主)라 부르고 만주족을 가장 격이 낮은 하위 개념의 객(客)이라 하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관념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던 북쪽 민족과의 거리감만 넓혀놨고 결국은 이민족으로서 영영 갈라지게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청나라라는 대국을 건설했던 이들 여진인(만주족)이 이제는 중국에 동화되어 버리고, 중국이 만주지역을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왜곡을 하는 것은 아닐지?
이러한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와 ‘소 중화사상’은 일제 시에도 그대로 이어져 친일파들이 설치는 시대를 이어왔다. 이완용의 매국행위는 물론이요, 최남선이나 이광수 등등 수많은 사대주의자들의 선동은 독립군의 의로움에 비하면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요, 하물며 창씨개명 때도 당당했던 민초들은 해학적인 ‘텐노헤이카(天野炳夏-발음상으로만 보면 ’천황폐하‘라는 뜻도 되고 “병하라는 사람이 천황”이라는 뜻도 됨)’라는 일본식 이름을 지어 저항했던 것이다.
이처럼 현재의 친미사대주의자들의 ‘대국 섬김 사상’도 알고 보면 그 뿌리가 아주 오래되고 깊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고구려, 백제의 당당함과 자주적인 사상을 되살릴 때가 되었다고 본다. 왜? 당연히 주장해야할 말조차도 움츠리고 숨기고 스스로 소국이 되어 대국에 예를 갖추려고만 드는가? 그것조차도 신라와 조선시대의 선조들이 남긴 유물이라 할 것인가? 오히려 그 사대의 유물을 버리고 고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에서 우리의 정신적 유산을 찾아볼 때이다. 오죽하면 중국, 일본서도 유학이라 부르는 생활철학을 가지고 한국서만 “유교”라는 종교로까지 발전시켰을까하는 생각이 듦은 과연 필자뿐일런가?
중국이나 한반도 국가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이던 후진국 일본(당시는 ‘왜국’이 정식 명칭)의 성덕태자조차도 607년 수나라에 보낸 일본 사신의 국서에, “해 뜨는 동쪽의 천자가, 해 저무는 나라의 천자 앞으로 서간을 보낸다”라 하여 수양제의 격노를 샀던 일까지 있었다.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작지만, 이러한 호기라든가 돈키호테 식일지라도 자주성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개화시기가 비록 늦었지만, 메이지 때 꽃 필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의 내면
속에 흐르는 이러한 정신은 ‘야마토 타마시이(大和魂)’로서 국력이 뒷받침 될 때는 항상 폭발하는 것이다. 그 화산재를 우리는 고스란히 뒤집어썼으니, 바로 임진왜란, 정유재란, 한일합방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도 고구려나 백제의 자주적 외교사상만 이어받아도, 미국의 이라크 파병 압력은 물론 시건방진 섬나라 영국의 간섭까지 듣지는 않을 것이다. 외교는 당당함에 있다. 스스로 축소지향적인 작아짐에서 벗어나 확대지향성의 자신감을 가졌으면 한다. 아니, 우리 경제력에 걸 맞는 외교만이라도 펼쳐 줬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일찍이 자주성과 독립정신에 기초한 ‘평화사상(홍익인가)’은 우리나라가 태초부터 가지고 있던 자신감의 표출이자, 자주사상이다. 왜? 우리의 고유사상인 자주성조차 잃어버리고 스스로 작은 나라라 여기면서 ‘사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하지 않는가? 이제는 우리 스스로 채운 ‘사대’의 그 단단한 맥을 끊어 우리의 사상과 행동을 억압했던 그 족쇄와 껍질을 깰 때가 되었다고 본다. 나는 참으로 용감하고 당당한 서 희 장군과 같은 외교관이 지금부터라도 우리나라에 수도 없이 나오기를 바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소공(昭公) 30년 조에“禮者, 小事大大字小謂”라 보
인다.
**《삼국사기》권13, <고구려본기>“夫國有大小, 人有長幼, 以小事大者, 禮也”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春秋又請改其章服, 以從中華制, 於是, 內出珍服
賜春秋及其從者“
****《수서》및《일본서기》에 이르기를“日出處天子, 致書日沒處天子”라 기록되
어 있으며,《일본서기》의 기록은 《수서》<왜국전>을 인용한 문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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