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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위기를 바라보는 2개의 시각

푸른하늘김 2005. 3. 4. 09:43

북핵위기를 바라보는 2개의 시각
 
 
 
글:김종성  
 

 
아래 내용은 3월 3일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 ○○ 지부 주최 ‘새내기 북핵 대담회’의 기조 발표문 일부분입니다. 대담회의 목적은 대학 새내기(05학번)들이 민족문제인 북핵문제에 관한 균형잡힌 시각을 갖도록 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조발표문의 전문(全文)과 질의·응답 내용은 2주 안에 공개할 예정입니다<기자 주>.

 

 


지난 2월 10일 북한은 핵보유를 선포했다. 이를 계기로 동북아 질서는 지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북한 핵선언을 계기로 미국의 동북아패권에 결정적 흠집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민족 재결합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혹은 3류 민족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의 정세를 잘 활용하고 또 민족 재결합을 성취하며 나아가 보다 강력한 민족을 만들려면, 우리는 북핵위기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럼, 북핵위기는 대체 왜 생긴 것인가? 여기에는 2가지 관점이 고려될 수 있다. 미국을 주인공으로 하는 경우와 북한을 주인공으로 하는 경우에 각각 다른 시각이 나오는 것이다.

 


먼저, 미국을 주인공으로 하여 북핵위기를 보자. 미국을 주인공으로 했을 때의 관점은 언론을 통해 이미 충분히 알려졌기 때문에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이렇게 볼 때, 북핵위기는 자국의 동북아패권을 지키기 위한 미국의 욕심 때문에 생긴 것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탈냉전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냉전시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깡패국가니 불량국가니 하는 개념들을 만들어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미국은 북한위협론을 통해 동북아의 긴장구도를 재생산하고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쳐 한국·중국·일본의 부상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1990년대 초반과 2000년대 초반의 2차례의 북핵위기는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을 주인공으로 했을 때의 스토리인 것이다.

 


그럼, 북한을 주인공으로 했을 때에는 어떤 관점이 나오는가? 북한을 주인공을 하였을 경우에 관하여는 아직 국내 언론에 충분히 보도되지 않았으므로 이에 관해서는 비교적 상세히 논의하기로 한다.

 

그리고 아래 내용의 상당부분은 북미평화센터 김명철 박사의 저서인 <김정일의 핵전략>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밝힙니다. 북한을 주인공으로 하게 되면, 북핵위기의 기원은 1940년대로 소급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가장 큰 오해는 ‘미국의 원폭 투하 때문에 일본이 패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일본은 이미 중일전쟁 때부터 코너에 몰리고 있었다. 일본군 100만 대군은 중국 땅에서 발이 묶여 있었다. 이와 더불어 한국 민중의 거센 항일투쟁도 일본의 패망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국면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도발한 것이 바로 진주만 기습이었다. 일본은 그러한 이유 때문에 제2차 대전에 참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참전 당초부터 일본의 패망은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이 핵폭탄 2방을 터뜨리면서 동북아에 개입했다. 일본이 패망한 진정한 이유는 중국과 한국 때문이었지만, 일본은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그것은 왜 그러한가? 이미 2-0으로 이기는 상황에서 후반전 종료 3분 전에 교체 투입되어 2개의 추가골을 넣은 미국이 막판에 더 돋보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핵무기 2방을 계기로 미국은 동북아패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미국의 원폭 투하는 한반도분단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스탈린이 한반도분할 요구를 수용한 것은 바로 원폭 투하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미국의 원폭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 분할에 관한 미국측 요구를 쉽게 수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최대의 원폭 피해자는 바로 우리 민족이었던 것이다.

 


동북아에서 원폭의 망령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에도 미군은 3차례나 원폭 투하를 계획했다. 만주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곳 부산에도 원폭 투하를 계획했다. 처음 2번은 전세가 불리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1번은 조기 휴전을 위해서 원폭 투하 위협을 가한 것이었다.

 


하지만, 3차례의 원폭 투하 계획 혹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결국 북한과 비기고 말았다. 휴전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제2차 대전의 챔피언 미국이 신생팀 북한과 무승부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은 미국이 패배한 경기였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이 북한콤플렉스를 갖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의 위협을 느낀 미국은 1957년 7월부터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했다. 1958년 1월 29일 주한미군사령부는 한국에 대한 핵무기 배치가 완료되었음을 발표했다.

 

그리고 휴전협정 이후부터 미군은 대북 핵공격을 목표로 작전계획 5027을 수립했다. 작계 5027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50이라는 것은 이 작전계획의 책임부서가 태평양미군사령부임을 가리키는 것이고, 2는 한반도를 가리키며, 7은 단순한 일련번호를 가리킨다. 그리고 미국은 팀스피리트, 을지 포커스 렌즈 같은 한미합동군사훈련을 통해 북한에게 공공연한 핵공격 위협을 가했다.

 


미국은 단순히 한반도에만 핵무기를 배치한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 오키나와, 괌 등의 동아시아 주요 기지에 핵무기를 배치한 것이었다. 이것은 소위 미국의 핵우산을 형성했다. 미국의 핵우산은 동북아에 있는 미국의 2중대 국가들을 미국의 영향권 하에 두는 기능을 했다.

 

그러한 미국의 핵우산정책은 동북아에 많은 모순과 불행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자아가 분단되면 개인은 모순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도 분단 때문에 온갖 모순을 겪게 된 것이다.

 


미국의 핵우산, 핵위협에 맞서 북한정권은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북한은 미국의 패권에 맞서기 위해 핵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북한의 핵개발계획은 1990년대가 아닌 195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백두산식 핵개발계획이라고 불린 이 비밀계획은 1956년에 시작되었다. 1956년에 30명의 북한 핵물리학자들이 소련유학을 떠났다. 같은 해에 영변에는 방사과학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북한의 핵개발은 1980년대에 빛을 보게 되었다.

 

1983년 평안북도 평산에 우라늄정련소가 완공되었다. 이 해에 김정일은 핵개발을 완료했다. 그리고 핵개발을 바탕으로 김정일은 전군 지휘권을 장악했다. 1984년 북한은 탄도미사일 발사실험에 성공했다. 다음 해에는 핵무기 생산라인이 가동되었다. 그리고 1989년에는 미 본토를 직격할 수 있는 다단식 미사일이 개발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북한은 이미 1980년대에 비밀 핵강대국이 된 것이다.

 


비밀리에 핵을 보유한 북한은 핵을 이용하여 미국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였다. 이른 바 함정 핵계획을 만든 것이다. 함정 핵계획은 미국 정보기관에 잘못된 핵개발 계획을 유포하는 것이었다.

 

이미 핵을 보유한 북한은 앞으로 핵무기를 개발할 계획이 있다는 식의 허위정보를 유포했다. 허위정보를 입수한 미국이 북한을 압박해오면 결정적 시점에서 미국을 구덩이에 빠뜨리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 바로 1990년대 초반 제1차 북핵위기였다.

 


제1차 북핵위기 때에 미국은 북한을 압박했다. 비밀리에 이미 핵을 보유한 북한을 상대로 핵개발 계획을 포기하라면서 압박을 가했다. 미국은 NPT를 명분으로 북한을 압박했으며 동시에 IAEA를 도구로 삼았다.

 

북한이 NPT에 가입한 것은 의도된 전략이었다. 미국으로 하여금 시비를 걸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제 발로 NPT 망에 걸려든 북한을 포획하려 했지만, 끝내 북한을 잡지 못했다.

 

제1차 북핵위기는 결국 제네바합의로 끝나고 말았다. 제네바합의에서 미국은 ‘대북 핵위협을 하지 않겠다’, ‘북한의 흑연감속로 건설을 동결시키는 대신에 경수로를 지어주고 매년 50만 톤 가량의 중유를 지원하겠다’는 등등의 약속을 했다. 미국이 포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미국의 포기를 재촉한 것이 있었다. 바로 1994년에 북한이 쏜 미사일이 하와이 및 괌 인근을 명중했기 때문이었다. 미군 기지 인근에 떨어진 북한 미사일은 북미 타협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제네바합의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을 위해서 2003년까지 경수로 2기를 지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김정일의 비공식 대변인인 김명철 박사에 따르면, 북한은 미국이 이 약속을 불이행할 것을 미리 대비했다. 그래서 1994년 이후부터 김정일은 2003년부터의 제2차 북핵위기를 준비해왔다.

 


그런데 김정일은 제2차 북핵위기에 대비하여 한가지 전략을 강구했다. 복싱으로 비유하자면 링을 바꾸는 전략이었다. 제1차 북핵위기의 링이 NPT였다면, 제2차 북핵위기의 링은 6자회담이었다.

 

NPT와 비교할 때에, 6자회담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북한에게 유리한 링이었다. NPT는 법적 효력 있는 조약이지만, 6자회담에는 그러한 법적인 효력이 없다. NPT 하에서는 핵사찰 등 대북 압박 무기가 있지만, 6자회담에서의 최대 무기는 회담에 나오라는 요구 정도다.

 

셋째, NPT 하에서는 UN 안보리 회부가 가능하지만, 6자회담 하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계산 하에 북한은 제2차 북핵위기의 링을 바꾸기 위해 2003년 1월 NPT를 탈퇴하고 그 해 8월부터 6자회담에 참여하였다.

 


6자회담이라는 새로운 링에서 북한은 미국의 압박과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북한은 결정적인 틈을 타서 미국의 추격에 쐐기를 박았다. 제2기 부시행정부 하에서 미군이 중동에서 발이 묶인 틈을 이용하여 또 미국이 유럽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 틈을 이용하여 북한은 지난 2월 10일 전격적으로 핵보유 선언을 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스토리가 북한 입장에서 본 북핵위기의 전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