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인기는 대중선동 정치의 전형
[인터뷰] 노나카 전 자민당 간사장이 말하는 '오늘의 일본'
글:박철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제2차 6자회담이 지난 2월 28일 4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막을 내렸다. 입장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이번 회담은 워킹그룹 신설, 상반기중 3차회담 개최합의 등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성과없이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회담에서 일본측은 북핵문제 해결이라는 본질보다도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를 강도높게 거론하고 나서 회담의 촛점을 흐렸다는 지적을 받을만 하다.
일본의 우경화가 국제사회의 주목대상이 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일본 법원이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문제가 없다는 판결을 내려 한국 등 아시아 주변국가들로부터 잇따라 비난을 사고 있다.
지난 2월 25일 일본 정치인 가운데 한국 및 동아시아통으로 불리는 노나카 히로무(79) 전 자민당 간사장을 도쿄 시내 나카다쵸 사보회관에서 만나 약 1시간여에 걸쳐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대미 종속외교 등 일본의 전통적 외교정책을 비판해온 정치인으로도 유명한데 그가 고이즈미 총리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이유 역시 고이즈미 내각의 지나친 대미 종속외교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평소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3국과 강고한 신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이른바 '아시아중심 외교론'을 펴왔다. 그의 이같은 신념은 수많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과 정치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바 있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중국정부의 대일태도에서도 드러난다. 후진타오 체제로 변모한 '젊은' 중국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이라크 파병을 비난하면서 ‘고이즈미 총리보다 노나카 간사장과 이야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과 중국, 북한 등 동아시아 이웃국가들의 비난을 받고 있는 고이즈미 내각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및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에 관해 직설화법으로 강도높게 비판했다.
특히 노나카 전 간사장은 그간 언론에 드러내지 않았던 유년시절 재일한국인과의 인연을 공개했다. 그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면, 왜 그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이 되지 않을까 싶다.
버블경제의 최전성기, 그리고 그 버블이 순식간에 터져버린 그 격변기를 온몸으로 돌파한, 이른바 '일본정치를 좌지우지한 남자'라는 상찬까지 듣고 있는 노나카 히로무. 그가 읊조리는 이 시대의 일본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다음은 노나카 전 간사장과의 일문일답.
- 먼저 자민당내에서는 보기 드문 ‘한반도에 애정이 있는’ 정치인으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는데 특별한 계기라도 있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1925년 출생인데, 당시 초등학교에 다닐때 나와 나이차가 좀 있는 여동생들을 돌보아 준 보모 아주머니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분이셨다. 남쪽인지 북쪽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분이 상당히 정성들여서 여동생들을 돌봐 준 추억이 있다. 가정부였기 때문에 당연히 식사도 같이 하고, 아침이 되면 우리들을 깨워주기도 하고. 아마도 내가 처음 한국인에 대하여 접한 것은 그분이 처음이 아닐까 한다.”
- 1930년대 유년시대의 기억만으로 그런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인가?
“물론 이후에도 개인적인 교류, 추억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17~18살 때라고 생각되는데 그때 오사카 근처에 재일한국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던 1940년대였는데, 당시 우리집으로부터 약 300미터 정도 떨어진 산 밑자락에 위치했던 무기공장에 조선반도로부터 강제연행당한 한국인들이 열악한 환경속에서 노동을 했었다. 그것을 보고 좀 심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때만 하더라도 동정과 감상 등이 혼재된 감정이었지만.”
- 프로필을 보면 1951년도에 정치입문을 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병역의무를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5년간 이런 저런 경험들을 쌓으면서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출마한 것이 1951년도의 정(町)의원 선거(일본서 가장 낮은 단위의 기초의원 선거)였는데, 운좋게 당선됐다. 8년간 기초의원 활동을 한 후 정장(町長)에 선출돼 다시 8년간 마을의 살림을 돌보았다. 그후 교토시의원으로 선출되어 11년 7개월간 의회활동을 하고 다시 쿄토부지사로 취임해서 4년간 활동한 후 83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로 들어갔다. 교토에서만 32년간 지냈다”
- 중앙으로 무대를 옮겨서 활약이 돋보인다. 특히 대외적으로는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 처음 중의원에 당선된 것이 1983년이고 그 이후 7선의 경력을 쌓게 되었는데, 제일 처음 중의원에 들어갔을 때,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가 일한의원연맹의 회장이었다. 그때 교토에서 재일한국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이 다케시타 총리에게 알려져 줄곧 같이 일한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을 했다. 2003년도에 다케시타 총리가 돌아가신 후, 내가 일단은 회장대행 비슷하게 하고 있다. 그러니 약 20년 정도 일한의원연맹에서 활동하고 있는 셈이다."
- 고이즈미 내각이 출범한지 3년이 지났는데, 타임머신 버튼이라도 잘못 눌렀는지 일본의 진로가 과거의 어두웠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지적에 동의한다. 지금 일본은 상당히 유감스럽게도 '구체성이 결여된 짧은 문장', 즉 '구호'에 약한 민족으로 되돌아 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고이즈미 총리의 발언이다. 그는 언론에 나와서 ‘국제공헌’ '인도지원' ‘개혁없이는 결과 없다’‘개혁은 순조롭다’‘유비무환’ 등등의 간단한 구호만 남발하고 있다.
국민들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서 동의를 구해야 될 중요한 사안을 ‘그냥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말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어이 기다려봐! 우리가 그런 구호들에 대해 생각해 볼테니까' 라는 냉정한 비판을 국민들이 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매스컴과 언론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정부의 발언들을 여과없이 내보내고 있다.
그런 구호들에서 테러특별법, 이라크지원 특별법, 자위대 이라크 파견 등이 신속하게 결정돼 버렸다. 물론 미국과의 우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일리가 있지만, 미국 이상으로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중동아시아와 지금부터 어떻게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상호간의 신뢰관계를 구축해 나가야 할 것인가가 중요한데 지금은 그럴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간 아시아의 고독한 존재로 남게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든다."
- <아사히 뉴스스테이션>에서 1월 25일 실시한 가장 여론조사에 따르면, 파병에 찬성하는 의견이 56%로 과반수를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내각의 '설명 불충분'을 지적하는 의견이 70%에 달한 것으로 나왔는데.
“그렇다. 이라크 파병 문제를 포함하여 고이즈미 정부의 정책들과 국민 사이의 의견교환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은 헌법은 물론, 자위대법, 국회가 정한 이라크지원특별법등 거의 모든 관련법을 위반하고 있다. 나는 일본의 자위대가 PKO(평화유지군)의 범위를 초월하는 것은 평화헌법을 어기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번 어기는 선례가 생기면 다음부터는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겨 버린다. 원래 인도양에서 후방지원을 할 것이라고 한 것이 갑자기 왜 전(全)자위군의 이라크 상륙으로 변해버렸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한번 흐름에 빠져버리면 제어가 불가능한 사례를 보여준 것이라 생각된다."
- 결국, 앞서 언급한 구호들의 무작정한 남발에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도 순식간에 결정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옛날 얘기지만 이해를 돕기위해 언급하자면,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신문이 2군데, 그리고 라디오국이 한군데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임박하면서 그 세군데의 언론은 완전하게 권력의 제어에 속박당하여 매일 같이 구호들만 늘어 놓았었다. '1억개의 불꽃', '승리 외엔 아무것도 없다'등 이런 구호들에 일본국민들은 세뇌당해 전쟁에 돌입 결국 패전하고 말았다.
조선반도의 6.25전쟁을, 즉 타국의 불행을 기회로 삼아 경제부흥을 일으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폐기되었던 군대를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미군의 한반도 진주를 위한 보급기지, 보완부대로써 경찰예비대를 만들고, 이것이 결국 오늘날의 자위대가 된 것이다. 즉, 자위대는 아무리 그 역할을 크게 생각하더라도 자국의 방위까지만 한정된다. 해외에 나가서는 안된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언론들이 앞서서 자위대의 건전한 역할, 지원과 부흥을 이야기하고 있는 형편이다. 국제공헌과 인도지원이라는 구호말이다."
- 그러나 최초 선발대의 입성 이후 1개월이 지난 지금 아직까지 별 문제가 없는 것을 보고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은 괜찮지 않느냐는 의견도 늘어나고 있는데.
“바로 그점이 일본의 무서움이다. 지금 우리들은 이라크에서 보내오는 CNN, ABC의 방송을 관람석에서 앉아서 보고 있다. 실제로 이라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방송국들이 편집해서 보여주는 그 ‘이미지’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이미지 뒤에 있는 본질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자위대 파견의 위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가? 이미지가 주는 생동감, 히노마루(日の丸)의 뚜렷한 이미지가 본질에 대해 의심을 품는 학자들의 토론을 초월해 버린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이라크 민중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라크는 논외가 되어 버린다. 왜냐면 제대로 된 정보를 생생하게 얻지 못하는 상황이므로 판단할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주변국이다. 즉 한국 중국 북한 등이다. 그들과의 신뢰관계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나? 일본의 자위대 파병으로 인해 동아시아 3국과의 신뢰관계가 악화되었는지 순화되었는지를 본다면 자위대 파병이 그른 것인지 옳은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그럼에도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대중적 인기도는 여전히 높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일본 국민들 과반수 이상이 고이즈미 총리의 화술에 속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역으로 고이즈미식 개혁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일 수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선동적인 구호’가 주는 폐해이다. 국민들의 냉정한 판단을 차단해 버리는 것. 그리고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되풀이되는 말장난(구호)을 통해 국민을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층적으로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 전부 따로따로 대강대강 진행되어 나가니 사상누각이 되어 버린다. 이라크 지원법, 납치문제, 자위대 파견, 한국.중국과의 마찰, 각종 금융개혁에 이르기 까지 제대로 ‘합의’된 것이 뭐가 있나? 차근차근 진행하지 않으니까 국민들이 냉정하게 판단할 수가 없다. 평가할 수 없으니 지지, 비지지를 냉정하게 결론내릴 수도 없고.
그러니까 지금 고이즈미 내각의 인기는 말그대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중적 인기, 포퓰리즘 정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고이즈미 정권은 어떻게 된 것이 개혁, 개혁 말로만 떠들지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이렇게 실업자들과 홈레스들이 넘쳐나고 기업들이 도산하는 것이 개혁인가? 문제가 있다면 국민들에게 설명을 해야지, 구호만 늘어 놓아서 급한 불만 끄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독불장군에 아마추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
- 일본내에서는 그래도 대중적 인기나마 있지만, 한국과 중국, 북한을 비롯한 동아시아 이웃나라들은 최근 몇년간 경험하지 못했을 정도의 불신과 반일감정을 보이고 있다.
“일방주의 노선이 가져오는 무서움이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 즉 일본이 주변국들에게 피해를 준 그 역사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한 후에 서로간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어야만 진정한 신뢰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일본정부는 ‘과거에 구애받지 마라(過去にこだわるな)’ 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국민들은 일본이 과거에 범한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역사적 잘못을 점점 잊어가고 있다. 지금 중국과 한국, 북한이 왜 저렇게 반일감정을 보이고 있을까에 대해 진정으로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물론 정부는 그 의문에 대해서 모른 척 발빼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동아시아의 미래를 이끌어 나가는 우호, 신뢰관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해마다 잡음과 외교적 마찰을 불러 일으키는 내각 총책임자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야스쿠니 신사는 당시의 일본국 천황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기리겠다는 의미의 신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쇼와(昭和) 20년, 즉 1945년에 일차적인 청산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이 지경까지 왔다. 즉, 당시 태평양 전장에서 순수하게 쇼와 천황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의 유해를 야스쿠니에 모아 놓았다.
그 후 전쟁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야스쿠니 신사에 함께 모아놓았기 때문에 ‘역사적 청산’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장소로, 트러블의 발원지가 된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왜 그 당시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고, 어떻게 패전을 경험했는지, 그리고 지금 왜 일본은 군대를 가질 수 없는지 등에 대한 역사교과서의 장으로 승화되어야 하는데 전부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다. 뒤죽박죽이라면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틀릴 수도 있겠지만, 단적으로 예를 든다면 지금 야스쿠니 신사에 봉안된 위패들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당시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던 군국주의자들이 ‘전쟁에서 이긴 영웅’ 비슷하게 대접받으며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순수하게 천황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병사들이 사랑방에 들어가 있는 꼴이다. 이 부분이 야스쿠니 신사 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청산이 필요하고 역사교육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채, 왜 우리가 참배하겠다는데 한국과 중국, 북한에서 항상 태클을 거느냐는 식은 곤란하다. 이건 말이 안된다. 그런데, 왜 자신들의 출세와 권력욕을 위해 전쟁을 계획하고 실제로 침략을 감행한 군국주의자들이 그곳에 그렇게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나? 그들의 유해를 야스쿠니로부터 철거시키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이며, 가장 기본적인 역사적 청산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일본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와 관련, 근 1년이 넘도록 일본정부과 매스컴이 나서서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이를 기회로 헌법 개정의 당위성까지 거론하고 있는데 '북한의 위협'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북한을 가깝고도 먼나라가 아닌,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만들기 위해 나 역시 각고의 노력을 했다. 어렸을 때의 추억들은 물론이요, 교토의 재일한국인들과의 관계도 있고. 지금 납치문제가 불거져 나와서 많은 사람들이 ‘노나카는 북한에 속았다’라는 말들을 하고는 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역시 솔직히 배신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98년 당시 오부치 내각에서 관방장관을 했었는데, 그때 북한과 좋은 관계를 가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북한에서 대포동 미사일 발사 시험을 하고, 괴선박을 공해상에 보내고… 그땐 정말 억울하고, 왜 그리 바보같은 짓을 할까 하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지금처럼 과대포장해서 북한을 멸시하고, 북한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해야 하니 마니하는 식의 논의가 나올 정도로 막나가지는 않았다.
북한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미국의 뜻에 따라 북에 대항한다는 식의 발상은 지극히 근시안적이며, 옳지 않은 방법론이다. 그래서 제2차 6자회담에서도 일본이 무작정 납치문제만 가지고 늘어지지 말고 다양한 외교적 대화채널을 풀가동하길 바란다. 하여튼 개인적으로 북한에 대해서는 피곤함과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 이라크 파병,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고이즈미 정권의 위험한 선택과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국민들의 침묵이 일본을 위험한 길로 이끌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지금 일본은 자살하는 사람이 1년에 3만명이 나오고 있다. 실업자들이 300만명을 넘어선지 오래다. 그러나 그 외에 구직활동을 포기한 사람들까지 포함한다면 더 이상이 될 것이다. 거리거리마다 쉽게 눈에 띄는 홈리스들은 매년 급증하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러한 시대의 퇴행적인 변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냥 불황이니까 당연한 것이라는 식이다.
그런 집단적인 위기의식 결여가 일본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인도하고 있는 증거가 아닐까 한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살지 모르겠지만 남은 생애동안 과거의 역사를 알고 있는 인간으로서, 가능한한 일본의 평화와 동북아시아의 국가들과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려한다. 노병은 사라지거나 죽는 것이 아니라, 그간의 경험을 살려 계속 목소리를 높이고 외쳐야한다."
- 인터뷰에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바람직한 한일관계에 대하여 한마디 부탁드린다.
“일한관계는 동아시아 각국의 크로스 외교에서 가장 안정적이며 국가적인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관계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일부 일본의 정치인들이 아직도 우리가 조선을 식민지화했기 때문에 조선이 발전했다는 식의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한 이같은 관계는 일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장 시급한 것이 서로가 공유했던 역사에 대한 불편부당한 지식이다. 지금 일본인은 현대사를 배우지 않는다. 현대사에서 일본이 어떤 행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아는 일본인들은 거의 없다. 이들이 하루빨리 일본의 현대사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선민의식을 지닌 정치인들이 아무리 망언을 내뱉어도 일한관계는 큰 문제없이 지속될 것이다.
역사의 공유로 부터 출발하는 신뢰관계,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신뢰관계이며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일한 양국의 모습이다. 이를 위해 나도 미력하나마 보탤 생각이다.크게보고 미래의 건강한 한일관계를 위해 노력해주길 부탁드린다. ”
인터뷰가 끝난 후, 노나카 히로무는 교토로 내려간다며 바삐 움직였다. 실제 그는 정계은퇴 후, 자신의 고향인 교토에서 계속 생활하고 있다. 일이 있을 때마다 도쿄로 출장을 오기는 하지만 가급적이면 교토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고 그의 수행원이 덧붙였다.
지금은 정치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교토의 사회복지단체 이사장으로 소박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노(老)정치인. 그를 보노라니 자신의 기득권과 안위만을 위해 절대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또, 은퇴한 후에도 자신의 영향력을 어떻게든 확대해 보려는 한국의 대다수 정치인들의 영상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일본의 대미종속외교 자세와 탈아정책에 대해 “미래는 내다보지 못하고 당장의 사탕과 회초리에 혹해 있다”며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경제, 정치블럭 안으로 하루빨리 들어가야 한다고 역설한 노나카 히로무. 격변기에 일본의 정치를 좌우한 남자로 인구에 회자되는, ‘그림자 총리’로 불리웠던 그가 내뱉는 일성이 어떤 메시지로 다가갈지 기대된다.
'정직한 정치인' 노나카 히로무 전 간사장은 누구?
1925년 일본 교토에서 출생. 1951년 정(町)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이후, 정장(町長), 교토시의원, 교토부지사등을 역임. 32년간의 교토생활을 마치고, 1983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1번지 나카다쵸에 입성. 초선임에도 불구하고 자민당 다나카 파벌의 핵심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93년 8월 자민당 최초의 야당생활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오히려 당을 이끌어 94년 6월 정권 재탈환시 일등공신이 된 그는 그 공을 인정받아 자치대신, 국가공안위원장등의 요직을 두루거쳐 95년 9월 자민당 간사장대리, 98년 7월에는 오부치 내각의 관방장관으로 취임, 차기 총리감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또 99년 1월 에는 오키나와개발청장관직에도 취임하여 일본 전후 역사상 최초로 장관겸임의 기록을 남긴 그는 2000년 4월 모리내각 출범과 더불어 자민당 간사장으로 취임했다. 특히, 모리 내각이 외부의 압력으로 붕괴할 때 유력한 총리 후보로 지목되었으나 이를 거절, 일본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한편 2001년 4월 들어선 고이즈미 내각의 우경화 본질을 파악한 그는 비주류파의 대부로 정권을 냉정하게 비판하는 감시자 역할을 자임했다. 특히 2003년 9월 총선에서 반(反)고이즈미의 깃발을 내걸고 하시모토파의 결속을 외치며 자신에게는 아무런 권력욕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정계은퇴를 선언, 일본 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졌는데 실지로 그는 2003년 10월 정계를 은퇴했다.
요즘은 방송, 집필활동 등을 통해 고이즈미 내각의 비판자 역할을 하고 잇는데 많은 지식인들의 호응과 지지를 얻고 있다. 참고로 그가 2003년 자민당 총재선거에 즈음하여 남긴 “고이즈미의 독만두를 먹은 녀석들”이라는 말은 그해 연말 유행어 대상을 차지할 정도로 인구에 회자되기도. 닉네임은 '그림자 총리'. 올해 문예춘추에서 발간된 회고록 <노병은 죽지 않는다(老兵は死なず)>는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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