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80주년, 군 · 경 · 민의 한인 학살
글:강동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관동지역에 진도 7.9의 대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이 천재지변 속에 힘없는 조선인들은 경찰과 관(官)의 조직적인 유언비어로 인해 무참히 살해당해야 했습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무슨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그렇게 이승에서의 한 많은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올 해로 학살 80주년을 맞이합니다만,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에서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있고, 세월에 묻혀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현실을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하며, 몇차례에 걸쳐 그 진실의 일단이나마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월간 아리랑'(대표 김종영)에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쯔보이 시게하루라는 한 일본인 여류작가는 관동 대지진 당시 한인에 대한 색출과 학살 현장의 살벌한 상황을 이렇게 노래했다. 산문에 가까운 이 시의 제목은 '쥬우 고엥 고짓생(十五圓 五十錢)'
……상략……
기차가 역에 닿을 때마다 총검을 손에 든 병정이 플랫폼에서 차 속을 들여다보곤 했다. 우리를 태운 기차가 어느 시골 역에 닿았을 때 총검을 든 병정이 차내를 검색하러 들어왔다. 눈알이 차간을 훑어보다가 바로 내 곁에 앉았던 노동자 한 사람을 보고 "쥬우 고엥 고짓생(15원 50전) 해봐"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허름한 차림의 사나이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해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쥬우 고엥 고짓생?"했다. "요시"하고 병정이 차간을 나간 뒤에 나는 그 사내 쪽을 눈여겨보면서 "쥬우 고엥 고짓생! 쥬우 고엥 고짓생?"하고 혼자서 속으로 몇 번이나 되씹어 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그 질문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무엇을 목적한 질문이었던가를…
아, 그 노동복 입은 사내가 만일 조선인이었던들, 그리고 '쥬우 고엥 고짓생'을 '쥬우 고엔 고짓샌'이라고 발음했던들 그는 그 자리에서 영락없이 끌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하략……
천인 천 가지의 조선인 색출법
지진발생과 더불어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에 따라 군인, 자경단, 경찰이 한인들을 색출해 내기에 구분하기 위하여 일본 관헌들은 일인들에게 머리에 흰 띠를 두르도록 했다.
지진후 자경단에 의해 학살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그 방법만으로 구분이 어려워지자 ?아이우에오'로 시작되는 일본 글자를 전부 외워보라든가, 링고를 발음해 보라, 심지어는 역대 일본 천황의 이름을 대라하여 제대로 하지 못하면 조선인으로 단정했다. 조선인을 골라내기 위한 수단은 천인 천 가지였다. 다분히 주관적이며 명확한 근거가 없더라도 군중 심리에 좌우되어 누군가 조선인이다 라는 한 마디만 하면 와! 하면서 붙잡았다. 붙잡힌 사람은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고 몰매를 맞거나 죽임을 당했다.
근거 없는 소문과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 여기에 관헌들까지 합세하여 조선인 학살은 이루어졌다. 경찰은 지진이 발생한 다음 날부터 조선인이면 무조건 방화범으로 보고 구속하기 시작했다. 또 군중들에게'모 방면에서 조선인 내습의 염려가 있다. 남자는 무장하고 여자는 피하라. 조선인을 보면 타격해도 무방하며 살해해도 관계없다'며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자 죽창, 곤봉, 일본도, 총 등으로 무장한 민중들로 구성된 자경단이 관동 일대에 삽시간에 3천6백89개나 조직되었다. "조선 놈이면 다 죽여버려라"는 것이 이들의 외침이었다. '내 부모 내 자식과 아내를 죽인 것은 다 조선 놈들이다. 내 집을 부수고 우리를 기아의 지경에 몰아넣은 것도 그놈들 때문이다. 죽여라 쳐버려라'며 외치며 자행된 학살은 경찰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사형(私刑)까지 서슴지 않게 되었다. 박살, 사살, 교살…갖은 방법으로 조선인 살해가 저질러졌다.
학생들의 지진 조난기에 학살 목격담
세월이 흐를수록 가해자는 지난날 악행을 축소하거나 잊으려 한다. 이와는 반대로 당한 사람들은 상처가 깊어져 그때의 끔찍한 상황들을 과장하여 말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지금 한국인들이 대학살 이후 70여 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학살의 끔찍함을 들먹였을 때 객관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발견된 당시 일본 학생들이 쓴 「대지진 조난기」에는 거의 모든 작문 속에서 조선인 학살 목격담이 몇 대목씩 꼭 기록되어 있다. 지진이라는 무서운 자연재해 속에서도 어린 학생들에게 조선인 학살이 얼마나 충격으로 비쳤나를 알 수 있다.
이 작문은 동경을 비롯한 가나가와(神奈川, 사이타마(琦玉) 등 관동지방 소학생을 비롯한 학생들이 쓴 것으로, 오랫동안 도서관 창고 속에만 간직되어 일반공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대지진의 참화 속에 재일 조선인들이 당한 참상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불이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조선인 15명이 권총을 들고 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날 밤은 아무도 잠을 자지 못했다. 불을 피우고 망을 보았다. 끝내 조선인은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 조선인이 학살됐다는 얘기가 있어 친구와 함께 보러 갔다. 가보니 길가에 두 명이 죽어 넘어져 있었다. 일동은 만세를 불렀다.-(고등과 1년. 女)
…시각은 정작 11시였다. 씩씩한 나팔소리와 함께 땡땡 경종이 난타되었다. 잠시 후 "조선인들이 권총 등을 가지고 쳐들어오니 모두 분투하라"는 소리와 함께 총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나는 마음속에 '결사'라고 되새겼다. 그러나 조선인이 오는 모습은 없고 나팔소리도 잠잠해져 적막이 흐를 뿐. 비로소 유언비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공포의 밤이 밝았다. 1백 명쯤 되는 조선인이 포박되어 열댓 명의 군인들에게 호송되었다. 지난밤의 총소리는 이들 선인들을 잡기 위한 공포였다.-(고등학교 2년 男)
…가는 도중 새까맣게 탄 시체, 물에 떠 있는 시체, 조선인을 죽이고 있는 곳…글로 다 쓸 수 없는 비참한 장면을 보았다. 그날 한밤중 "저기 조선인이다"라는 소리와 함께 두 발의 권총소리가 들렸다.-(소학교 5년 男)
또한 조선인이 냇가와 우물에 독을 넣었다고 해 걱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물이어서 그 물을 퍼마시고 밥을 짓고 했다. 그 뒤 조선인들을 10명쯤 보았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소학교 4년 男)
3일 아침 피난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파출소 앞을 지날 때 "죽여 죽여"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조선인이 나쁜 짓을 해 붙잡혔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자부(麻市)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곳곳에 비상선을 치고 조선인으로 보이면 모두 붙잡아 버렸다.-(소학교 5년 女)
작문에는 조선인들이 나쁜 짓 하는 묘사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조선인들이…했다더라'?조선인들이 권총을 들고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등 간접 전언(傳言)이거나 소문을 기록한 것뿐이다. 그 반대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참살하거나, 조선인이 당한 참상은 직접 눈으로 본 장면을 그대로 표현한 것들이다.
죄수들까지 합세한 조선인 수색대
조선인이 방화를 하며 돌아다닌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자 2일 아침부터 '조선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요코하마(橫濱) 근처에는 속칭'根岸별장?이라 불리는 요코하마 형무소가 있었다. 지진으로 형무소의 콘크리트 벽이 파손되어 풀려 나오게 된 조수들이 7,8백 명. 이들도 조선인을 잡는 수사대에 합세했다. 그들은 빈틈없이 동네를 집집이 뒤지며 조선인 ?철야 사냥?을 했다.
조선인 시체는 倉本橋의 제방 가에 줄지어 선 벚꽃나무 가지에 매달았다. 載天기념으로 심은 2백 그루 이상의 나무 둥지였다. 살아 있는 사람은 매달아 놓고 린치를 가했고, 죽은 사람은 매단 줄을 끊어 시체를 물 속에 빠뜨렸다. 하천에는 몇 백 명의 시체가 쌓여 어제까지의 청류가 붉게 물들어갔다. 마을 수색대에 의한 사형(私刑)은 5일이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살기에 찬 이들 자경단원들은 조선인을 거리나 집안에서 찾아내 죽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유치장에 일시 보호되어 있는 사람들까지 학살했다.
군마현(群馬縣) 경찰서는 토건업체인 까시마구미(鹿島祖)가 고용하고 있던 조선인 14명을 회사측 요청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문을 들은 자경단 대표가 경찰서로 달려와 조선인들을 넘겨달라고 아우성이었다. 4,5명의 경찰관들은 서장이 오면 결정하자고 했지만 군중들은 당장 넘기라고 우겼다. 결국 자경단원과 2백여 군중이 몰려와 소동을 벌이다가 유치장을 부수고 14명의 조선인을 전부 살해했다.
奇居町 경찰서 유치장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10여 명이 살해되었다. 9월 4일 요코하마 네기쪼(根岸町)에서 자경단에 붙잡힌 한 조선인은 몸에 지니고 있던 감기약을 독약으로 오인 받아 파출소 옆에 동여 매인 채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경찰서 구내에서 이러한 학살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경찰이 강력히 이를 제지하지 않고 사실상 묵인, 방조하는 입장을 취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시체들은 화물차에 실려 어디론지
조선인 학살은 자경단이나 경찰에 의해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었다. 치안 유지를 위해 동경 시내에 진주해 들어온 군대도 가세했다.
진재 당시 나라시노(習志野) 기병대의 견습 사관으로 계엄령 선포 직후 동경에 진주했던 越中谷利一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열차 안에는 피난민들이 석탄 위까지 파리떼처럼 빽빽이 앉아 있었는데, 그 가운데 있는 조선인들을 모조리 끌어내렸다. 그러더니 칼과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일본인 피난민은 폭풍우 같이 "와"하는 만세 소리와 함께 국적(國賊) 조선인을 다 죽여버리자."는 아우성이 터져나왔다"
군대 학살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가메이(龜戶) 경찰서에서 9월 2일 밤과 3일 새벽 사이에 320여 명의 조선인을 학살한 것이다. 당시 이 경찰서에서 일하고 있는 羅丸山은 "나는 86명의 조선 사람을 총과 칼로써 마구 쏘고 베어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다. 군인들이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더니 총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휘자는 총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공포감을 갖게 될 터이니 칼로 죽이라고 명령했다. 군인들은 일제히 칼을 빼들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으며 다음날 새벽 시체들은 화물 자동차에 실려 어디론지 운반되어 갔다."고 회고했다.
일본인 八島京一은 다음 날인 9월 4일 일찍 龜戶경찰서 순사 3,4명이 짐차에 석유와 장작을 싣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순경들은 "죽은 사람들을 태우러 가는 거야?라고 해 "죽은 사람들?"했더니 "어제는 밤을 새워가며 죽였는데 32명이나 되었어. 외국 사람들이 서에 온다니까 급히 태워버리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八島京一과 잘 아는 淸一이란 순경이었다.
또 철도 기관사였던 平田鐵 씨는 스미다가와의 永代橋 아래에서 한인 시체 1천2백여 구를 보았다고 전했다.
지진 당시 관동 일대에서 군대, 경찰, 자경단에 의해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되었는지는 정확한 조사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진재의 혼란 상황에서 숫자 파악이 어려웠으며, 일본측은 자신들은 조선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용했었다며 학살자 조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나중에 조선인 학살이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마지못해 수백 명 선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해 9월 말에 동경에 있던 조선기독교 청년회, 천도교 청년회, 北星會 등 각 단체 유지들이 발기해 20여 명으로 구성된 '이재동포위문반'은 피살자 수를 5천 명선으로 추산했다. 이재동포위문반은 당시 동경과 요코하마에 약 3만 명의 한인들이 살았는데 진재 직후 각처에 수용된 생존자 7천580명을 제외한 2만 2천420명을 희생자로 추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시체로서 확인할 수가 없었기에 실종자 2만 2천420명 가운데 ¼ 정도로 줄잡아 5천 명이란 수가 나온 것이다.
같은 해 12월 독립신문사 김승학 특파원을 비롯, 조선인 유학생 등에 의한 좀더 자세한 조사에서는 6천 6백 61명으로 밝혔고, 이를 독립신문 12월자에 발표했다.
daipapa25@hotmail.com 김수종
http://www.onekorea.jp (한국어) 재일 코리안 인터넷 신문
http://www.jp.onekorea.jp (일본어) 재일 코리안 인터넷 신문

글:강동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관동지역에 진도 7.9의 대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이 천재지변 속에 힘없는 조선인들은 경찰과 관(官)의 조직적인 유언비어로 인해 무참히 살해당해야 했습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무슨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들은 그렇게 이승에서의 한 많은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올 해로 학살 80주년을 맞이합니다만, 아직도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에서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있고, 세월에 묻혀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현실을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하며, 몇차례에 걸쳐 그 진실의 일단이나마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월간 아리랑'(대표 김종영)에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쯔보이 시게하루라는 한 일본인 여류작가는 관동 대지진 당시 한인에 대한 색출과 학살 현장의 살벌한 상황을 이렇게 노래했다. 산문에 가까운 이 시의 제목은 '쥬우 고엥 고짓생(十五圓 五十錢)'
……상략……
기차가 역에 닿을 때마다 총검을 손에 든 병정이 플랫폼에서 차 속을 들여다보곤 했다. 우리를 태운 기차가 어느 시골 역에 닿았을 때 총검을 든 병정이 차내를 검색하러 들어왔다. 눈알이 차간을 훑어보다가 바로 내 곁에 앉았던 노동자 한 사람을 보고 "쥬우 고엥 고짓생(15원 50전) 해봐"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허름한 차림의 사나이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해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쥬우 고엥 고짓생?"했다. "요시"하고 병정이 차간을 나간 뒤에 나는 그 사내 쪽을 눈여겨보면서 "쥬우 고엥 고짓생! 쥬우 고엥 고짓생?"하고 혼자서 속으로 몇 번이나 되씹어 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그 질문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무엇을 목적한 질문이었던가를…
아, 그 노동복 입은 사내가 만일 조선인이었던들, 그리고 '쥬우 고엥 고짓생'을 '쥬우 고엔 고짓샌'이라고 발음했던들 그는 그 자리에서 영락없이 끌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하략……
천인 천 가지의 조선인 색출법
지진발생과 더불어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에 따라 군인, 자경단, 경찰이 한인들을 색출해 내기에 구분하기 위하여 일본 관헌들은 일인들에게 머리에 흰 띠를 두르도록 했다.
지진후 자경단에 의해 학살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그 방법만으로 구분이 어려워지자 ?아이우에오'로 시작되는 일본 글자를 전부 외워보라든가, 링고를 발음해 보라, 심지어는 역대 일본 천황의 이름을 대라하여 제대로 하지 못하면 조선인으로 단정했다. 조선인을 골라내기 위한 수단은 천인 천 가지였다. 다분히 주관적이며 명확한 근거가 없더라도 군중 심리에 좌우되어 누군가 조선인이다 라는 한 마디만 하면 와! 하면서 붙잡았다. 붙잡힌 사람은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고 몰매를 맞거나 죽임을 당했다.
근거 없는 소문과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 여기에 관헌들까지 합세하여 조선인 학살은 이루어졌다. 경찰은 지진이 발생한 다음 날부터 조선인이면 무조건 방화범으로 보고 구속하기 시작했다. 또 군중들에게'모 방면에서 조선인 내습의 염려가 있다. 남자는 무장하고 여자는 피하라. 조선인을 보면 타격해도 무방하며 살해해도 관계없다'며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자 죽창, 곤봉, 일본도, 총 등으로 무장한 민중들로 구성된 자경단이 관동 일대에 삽시간에 3천6백89개나 조직되었다. "조선 놈이면 다 죽여버려라"는 것이 이들의 외침이었다. '내 부모 내 자식과 아내를 죽인 것은 다 조선 놈들이다. 내 집을 부수고 우리를 기아의 지경에 몰아넣은 것도 그놈들 때문이다. 죽여라 쳐버려라'며 외치며 자행된 학살은 경찰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사형(私刑)까지 서슴지 않게 되었다. 박살, 사살, 교살…갖은 방법으로 조선인 살해가 저질러졌다.
학생들의 지진 조난기에 학살 목격담
세월이 흐를수록 가해자는 지난날 악행을 축소하거나 잊으려 한다. 이와는 반대로 당한 사람들은 상처가 깊어져 그때의 끔찍한 상황들을 과장하여 말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지금 한국인들이 대학살 이후 70여 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학살의 끔찍함을 들먹였을 때 객관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발견된 당시 일본 학생들이 쓴 「대지진 조난기」에는 거의 모든 작문 속에서 조선인 학살 목격담이 몇 대목씩 꼭 기록되어 있다. 지진이라는 무서운 자연재해 속에서도 어린 학생들에게 조선인 학살이 얼마나 충격으로 비쳤나를 알 수 있다.
이 작문은 동경을 비롯한 가나가와(神奈川, 사이타마(琦玉) 등 관동지방 소학생을 비롯한 학생들이 쓴 것으로, 오랫동안 도서관 창고 속에만 간직되어 일반공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대지진의 참화 속에 재일 조선인들이 당한 참상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불이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조선인 15명이 권총을 들고 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날 밤은 아무도 잠을 자지 못했다. 불을 피우고 망을 보았다. 끝내 조선인은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 조선인이 학살됐다는 얘기가 있어 친구와 함께 보러 갔다. 가보니 길가에 두 명이 죽어 넘어져 있었다. 일동은 만세를 불렀다.-(고등과 1년. 女)
…시각은 정작 11시였다. 씩씩한 나팔소리와 함께 땡땡 경종이 난타되었다. 잠시 후 "조선인들이 권총 등을 가지고 쳐들어오니 모두 분투하라"는 소리와 함께 총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나는 마음속에 '결사'라고 되새겼다. 그러나 조선인이 오는 모습은 없고 나팔소리도 잠잠해져 적막이 흐를 뿐. 비로소 유언비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공포의 밤이 밝았다. 1백 명쯤 되는 조선인이 포박되어 열댓 명의 군인들에게 호송되었다. 지난밤의 총소리는 이들 선인들을 잡기 위한 공포였다.-(고등학교 2년 男)
…가는 도중 새까맣게 탄 시체, 물에 떠 있는 시체, 조선인을 죽이고 있는 곳…글로 다 쓸 수 없는 비참한 장면을 보았다. 그날 한밤중 "저기 조선인이다"라는 소리와 함께 두 발의 권총소리가 들렸다.-(소학교 5년 男)
또한 조선인이 냇가와 우물에 독을 넣었다고 해 걱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물이어서 그 물을 퍼마시고 밥을 짓고 했다. 그 뒤 조선인들을 10명쯤 보았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소학교 4년 男)
3일 아침 피난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파출소 앞을 지날 때 "죽여 죽여"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조선인이 나쁜 짓을 해 붙잡혔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자부(麻市)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곳곳에 비상선을 치고 조선인으로 보이면 모두 붙잡아 버렸다.-(소학교 5년 女)
작문에는 조선인들이 나쁜 짓 하는 묘사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조선인들이…했다더라'?조선인들이 권총을 들고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등 간접 전언(傳言)이거나 소문을 기록한 것뿐이다. 그 반대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참살하거나, 조선인이 당한 참상은 직접 눈으로 본 장면을 그대로 표현한 것들이다.
죄수들까지 합세한 조선인 수색대
조선인이 방화를 하며 돌아다닌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자 2일 아침부터 '조선인 사냥'이 시작되었다.
요코하마(橫濱) 근처에는 속칭'根岸별장?이라 불리는 요코하마 형무소가 있었다. 지진으로 형무소의 콘크리트 벽이 파손되어 풀려 나오게 된 조수들이 7,8백 명. 이들도 조선인을 잡는 수사대에 합세했다. 그들은 빈틈없이 동네를 집집이 뒤지며 조선인 ?철야 사냥?을 했다.
조선인 시체는 倉本橋의 제방 가에 줄지어 선 벚꽃나무 가지에 매달았다. 載天기념으로 심은 2백 그루 이상의 나무 둥지였다. 살아 있는 사람은 매달아 놓고 린치를 가했고, 죽은 사람은 매단 줄을 끊어 시체를 물 속에 빠뜨렸다. 하천에는 몇 백 명의 시체가 쌓여 어제까지의 청류가 붉게 물들어갔다. 마을 수색대에 의한 사형(私刑)은 5일이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살기에 찬 이들 자경단원들은 조선인을 거리나 집안에서 찾아내 죽이는 데 그치지 않았다. 유치장에 일시 보호되어 있는 사람들까지 학살했다.
군마현(群馬縣) 경찰서는 토건업체인 까시마구미(鹿島祖)가 고용하고 있던 조선인 14명을 회사측 요청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문을 들은 자경단 대표가 경찰서로 달려와 조선인들을 넘겨달라고 아우성이었다. 4,5명의 경찰관들은 서장이 오면 결정하자고 했지만 군중들은 당장 넘기라고 우겼다. 결국 자경단원과 2백여 군중이 몰려와 소동을 벌이다가 유치장을 부수고 14명의 조선인을 전부 살해했다.
奇居町 경찰서 유치장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10여 명이 살해되었다. 9월 4일 요코하마 네기쪼(根岸町)에서 자경단에 붙잡힌 한 조선인은 몸에 지니고 있던 감기약을 독약으로 오인 받아 파출소 옆에 동여 매인 채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경찰서 구내에서 이러한 학살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경찰이 강력히 이를 제지하지 않고 사실상 묵인, 방조하는 입장을 취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시체들은 화물차에 실려 어디론지
조선인 학살은 자경단이나 경찰에 의해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었다. 치안 유지를 위해 동경 시내에 진주해 들어온 군대도 가세했다.
진재 당시 나라시노(習志野) 기병대의 견습 사관으로 계엄령 선포 직후 동경에 진주했던 越中谷利一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열차 안에는 피난민들이 석탄 위까지 파리떼처럼 빽빽이 앉아 있었는데, 그 가운데 있는 조선인들을 모조리 끌어내렸다. 그러더니 칼과 총검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일본인 피난민은 폭풍우 같이 "와"하는 만세 소리와 함께 국적(國賊) 조선인을 다 죽여버리자."는 아우성이 터져나왔다"
군대 학살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가메이(龜戶) 경찰서에서 9월 2일 밤과 3일 새벽 사이에 320여 명의 조선인을 학살한 것이다. 당시 이 경찰서에서 일하고 있는 羅丸山은 "나는 86명의 조선 사람을 총과 칼로써 마구 쏘고 베어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다. 군인들이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더니 총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휘자는 총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공포감을 갖게 될 터이니 칼로 죽이라고 명령했다. 군인들은 일제히 칼을 빼들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으며 다음날 새벽 시체들은 화물 자동차에 실려 어디론지 운반되어 갔다."고 회고했다.
일본인 八島京一은 다음 날인 9월 4일 일찍 龜戶경찰서 순사 3,4명이 짐차에 석유와 장작을 싣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순경들은 "죽은 사람들을 태우러 가는 거야?라고 해 "죽은 사람들?"했더니 "어제는 밤을 새워가며 죽였는데 32명이나 되었어. 외국 사람들이 서에 온다니까 급히 태워버리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八島京一과 잘 아는 淸一이란 순경이었다.
또 철도 기관사였던 平田鐵 씨는 스미다가와의 永代橋 아래에서 한인 시체 1천2백여 구를 보았다고 전했다.
지진 당시 관동 일대에서 군대, 경찰, 자경단에 의해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되었는지는 정확한 조사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진재의 혼란 상황에서 숫자 파악이 어려웠으며, 일본측은 자신들은 조선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용했었다며 학살자 조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나중에 조선인 학살이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마지못해 수백 명 선이라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해 9월 말에 동경에 있던 조선기독교 청년회, 천도교 청년회, 北星會 등 각 단체 유지들이 발기해 20여 명으로 구성된 '이재동포위문반'은 피살자 수를 5천 명선으로 추산했다. 이재동포위문반은 당시 동경과 요코하마에 약 3만 명의 한인들이 살았는데 진재 직후 각처에 수용된 생존자 7천580명을 제외한 2만 2천420명을 희생자로 추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숫자를 시체로서 확인할 수가 없었기에 실종자 2만 2천420명 가운데 ¼ 정도로 줄잡아 5천 명이란 수가 나온 것이다.
같은 해 12월 독립신문사 김승학 특파원을 비롯, 조선인 유학생 등에 의한 좀더 자세한 조사에서는 6천 6백 61명으로 밝혔고, 이를 독립신문 12월자에 발표했다.
daipapa25@hotmail.com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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