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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출신 역사학자 조지 케넌 지난 17일 사망

푸른하늘김 2005. 3. 19. 23:18

외교관 출신 역사학자 조지 케넌 지난 17일 사망    
일본의 한반도 재 지배를 인정한 '케넌 구상'의 주도자 
 
 
글:김수종 daipapa@hanmail.net
 
 
 
미·소간의 냉전 설계자로 알려진 미국 외교관 출신의 역사학자 조지 케넌이 지난 17일 밤(현지시각) 뉴저지주 프린스턴의 자택에서 향년 101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고 <AP통신>등이 보도했다.

케넌은 외교관으로 소련에서 근무하던 1946년 미·소 대결의 본질을 예견한 ‘장문의 전보(Long Telegram)’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이 전문이 훗날 <포린 어페어스>에 실려 대 소련 봉쇄정책을 채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소련 행동의 원천’이란 기고문의 모체가 된다.

또한 이 기고문은 ‘트루먼 독트린’ 의 이론적 기조가 되기도 한다. 아울러 그는 1947년 미·일간의 케넌 구상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 서유럽 부흥을 위한 마셜플렌, 1950년 애치슨 선언과 한국전쟁 개입, 1965년 베트남 전쟁 개입 등 미국의 냉전 정책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케넌은 1904년 2월 미국 위시콘신주 밀워키에서 태어났다. 세인트존스 군사학교와 프린스턴대학을 거쳐, 1926년 미 국무부에 들어가 외교관이 된다. 1933년 주 소련 대사관 개설 직후 그곳에 부임하여 1937년까지 근무했으며, 1944~46년 4월까지 다시 모스크바 대리대사로 일했다.

케넌은 노련한 기고문과 마셜플랜 참여 등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1953년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과의 이견 끝에 외교관 직을 떠난다.

이후 그는 모교인 프린스턴대학 고등학술연구소(IAS)에 자리 잡고 왕성한 저술활동을 벌이면서 1956년 ‘러시아 전쟁을 떠나다’란 책으로 퓰리처상을,1967년에는 ‘1925∼1950년 사이의 회고록’으로 두 번째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또 1981년에는 아인슈타인 평화상,1984년에는 미 인문학회가 수여하는 역사학 황금 메달을 타는 등 학문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미 정부와 견해차이로 50여 년간 소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붕괴되었을 때 “역사적으로 가장 의미심장한 전환점”이라고 평가해 주목받기도 했다.

조지 케넌이라는 인물에 대해 한국인이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1947년 미 국무부 간부로서, 1950년대 초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러시아 부분 조언자로서, 한반도 문제에 관하여 세 가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 첫 번째 역할은 미·일간에 1947년 비밀 합의된 ‘케넌 구상’이다. 사실 1945년 미군의 영관급장교 몇 명이 둘러앉아 몇 십분 만에 38도선 분할을 확정했을 때 그들이 생각한 한반도는 일본의 일부였다. 그들은 전략적 가치 외에는 한반도에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점령군으로 일본에 진주한 미군정 당국은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일본을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는 아시아 지역 방어선으로 정하고, 구(舊) 일본제국의 직할지(만주·조선·일본 전역)에 대해 대리인을 통한 간접 통치를 구상하게 된다. 미군정 당국은 그 대리 정치인으로 A급 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를 죽이지 않고 선택한다.

기시는 구 만주국의 행정 관료로 소련의 관할지역 안에 있었던 만주국을 소련과 대립하며 알차게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의 만주국 수반의 경험과 정치적인 능력을 높이 산 미국은, 미군정 대변인이었던 그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 관방장관의 의견을 더해 그를 일본 전후 복구사업과 대리 통치를 위한 인물로 정한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는 신탁통치를 실시했지만, 패전국인 일본은 아시아 지역 교두보로 필요했기에 일본에 대해서는 '천황제 유지' 등 유화정책을 쓰고 있었다. 케넌이 1947년 대소·대중 봉쇄전략 방패막이로 상정한 것은 일본이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일본개조전략은 일시에 `일본부흥' 전략으로 전환됐다. 남한은 일본을 강화하기 위한 교두보였을 뿐이다.

기시 총리는 1958년부터 평화헌법 9조에 대한 철폐를 주장했다. 일본은 1947년에 평화헌법을 만들면서 그 이면에 미국과 밀약(1947년 미국과 일본은 제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 불리는 '케넌 구상'을 비밀리에 합의했다. '케넌 구상'은 트루먼 행정부의 대 러시아외교전문가였던 조지 케넌이 아시아 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봉쇄하기 위해 입안한 것이었다.

그 구체적 내용은 '조선반도에서의 소련에 대한 봉쇄'로, 조선반도를 타고 내려오는 소련을 미국이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결론은 일본의 구 식민지인 조선과 만주를 일본의 재 지배에 맡겨야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을 맺었다.

이 밀약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국이 참전하여 만주와 한반도를 점령하고 나면,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에 들어가서 통치만(군대를 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치·행정 영역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휴전이 되고도 일본은 한반도는 커녕 남한도 정치·행정상의 지배권을 얻지 못함으로써 밀약의 약속을 이행 받지 못했다.

그의 두 번째 역할은 1950년 1월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 한국이 제외돼 있다는, 결국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애치슨 선언'의 입안의 조력자 역할이다.

그는 1950년 8월 애치슨 장관에게 보낸 메모에서 “미국은 한국에 대해 분명하고 현실적인 견해 없이, 도덕적이고 감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남한에 공산주의가 확대되는 것을 용인할 수는 없지만, 소련의 영향권 하에 놓이더라도 명목상 독립국을 유지한다면 이런 상황을 수용할 수 있다. 남한을 영구히 소련의 영향권 밖에 두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며, 일본이 장기적으로는 한반도 내 소련의 영향력을 대체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며 일본이 미국을 대리하여 동아시아를 재 지배하는 '케넌 구상'을 다시 밝히기도 했다 .

케넌은 그러나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개입하자 철군을 고려하던 애치슨에게 “위기를 피하면 미국의 위상을 크게 해칠 것”이라는 메모를 보내 미국의 태도를 바꾸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미국의 한국전 참전엔 찬성했으나, 전쟁 초기 남침했던 북한군을 격퇴한 뒤엔 유엔군의 38도선 위로 북진을 반대하고 휴전협상을 시작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세 번째 역할이 바로 휴전협상이다. 1951년 6월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의 요청으로 뉴욕에서 야콥 말리크 유엔주재 소련 대사와 비밀 회동, 휴전 가능성을 타진했고, 이는 공식적인 휴전 협상으로 발전하는 단초가 되었다.

아무튼 러시아와 동북아 문제에 정통했던 외교관출신의 역사학자 조지 케넌은 돌아갔지만, 그가 결정한 한반도와 일본에 대한 몇 가지 판단으로 인하여, 그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것과는 무관하게 한국이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막아주는 동아시아의 방패막이가 되었고,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휴전이 되고, 전후 일본이 동아시아의 맹주로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