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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에 남아있는 독립지사, 청년사회주의자 박원희, 김사국 부부의 묘비

푸른하늘김 2022. 4. 21. 19:03

망우리공원에 남아있는 독립지사, 청년사회주의자 박원희, 김사국 부부의 묘비

-합장묘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고, 모친 묘지 옆에서 두 개의 비석만 남아

 

 

 

 

 

 

 

일제 강점기 독립지사, 청년사회주의자로 활동한 박원희, 김사국 부부의 묘는 지난 2002년 독립지사 서훈을 받은 이후 대전현충원으로 이장 합장됐고, 아직도 묘비는 비구니 스님이었던 김사국의 어머니 안국당(安國堂) 묘소 옆에 나란히 남아있다.

 

 

망우리공원에 남아있는 박원희(朴元熙 1899~1928)의 비석 앞면에는 여성운동선구자 박원희’, 뒷면에는 ‘192819일 입(), 조선사회단체연합장의위원회라고 되어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경성여자청년회 대표, 근우회 창립준비위원 등을 역임한 여성독립운동가다.

 

 

살아서 민족해방, 여성해방, 노동해방을 실현하고자 했다. 1899년 충남 대전에서 출생하여 서울로 이주하여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 같아 살던 그의 큰오빠 박광희는 입학난구제기성회, 조선노농총동맹 창립,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등에 참여한 진보인사였다.

 

 

그의 진보적 사고에 큰오빠와 남편의 영향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 졸업 후 1921년 철원보통학교 교사로 재임 중 사회주의 청년운동가인 김사국(金思國)을 만나 결혼했다. 신혼생활은 서울 종로 계동의 친정집에서 시작했다.

 

 

슬하에 딸이 1명 있으며, 결혼 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주경야독했다. 이후 남편과 함께 간도 및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했다. 간도에서는 청년교양운동 교사로, 독립운동가로 헌신했다.

 

 

김사국은 간도 용정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고 폭탄으로 일제 기관의 파괴를 계획했다. 박원희 역시 이에 동참했다가 1923년 체포됐다. 수감 중에도 미국 여성사회주의자, 시청각장애인 헬렌 켈러의 자서전을 번역했다.

 

 

영어교사 출신이라 영문을 번역할 만큼 영어실력이 출중했다. 임신 중이었던 박원희의 투옥 기간은 길지 않았다. 10월 중순, 예심 종결과 더불어 석방됐다. 수감자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었고,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다.

 

 

석방된 박원희는 1924년 귀국하여 서울 종로 친정에 살면서 딸을 낳았다. 아이의 이름은 사건이라고 지었다. 역사 사(), 세울 건()자를 썼다. 아이가 자라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역할을 수행하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자식의 이름을 조국을 생각하는 사람’(김사국), ‘민중을 생각하는 사람’(김사국의 동생 김사민)이라고 지었던 조부의 뜻이 계승됐다. 출산 이후 조선청년총동맹 등 사회단체와 여성단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245월 서울에서 조선최초의 사회주의 여성운동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하면서 여성 권익향상과 계몽운동에 투신했다. 동우회 3명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함께 선출된다. 다른 2명의 집행위원은 허정숙과 주세죽이었다. 허정숙(1902~1991)은 북에서 조선노동당 비서를 지낸 인물이고, 주세죽(1901~1953)은 박헌영의 아내로 사회주의 여성운동계의 거물이었다

 

 

10월에는 고려공산동맹에도 가입했다. 1925년에는 경성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부인의 독립과 자유와 모성보호의 실현을 도모하는 조선의 딸들아, 굳세게 뭉치자"고 호소했다. 조직운동가이며 이론가에 타고난 웅변가였던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일요강습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실시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274월에는 중앙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청소년 남녀 인신매매 금지, 18세 이하 남녀 조혼폐지, 청소년 남녀직공 8시간 이상 노동 및 야간작업 폐지, 가난한 아동 및 산모 무료요양소 설립등을 주장했다.

 

 

아울러 동아일보에 논설 등을 발표하며 여성의 사회의식 향상을 도모하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분규해결에도 힘쓰는 등 쉴 새 없이 활동했다. 그는 동지였던 남편 김사국이 폐병으로 죽은 지 2년 후 눈물겨운 세상을 저주하면서 19281530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장례는 당시 34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열렸고, 장지는 서울 수철리(금호동) 공동묘지 남편 옆이었다.

 

 

 

 

 

한편, 독립운동가이며 자생적 청년사회주의자였던 남편 김사국(金思國 1892~1926)은 충남 논산 출신으로 10세 때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남동생(김사민:청년 사회주의 운동가)과 같이 살다가 비구니가 된 어머니를 따라 금강산 유점사에서 한학을 배웠다. 이후 하산하여 경성의 보성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중퇴했다.

 

 

1910년 한일합방에 불평을 품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떠돌다가 1919년에 3.1운동 전에 귀국하여 국민대회사건으로 투옥되어 1920년에 출옥했다이 무렵 자생적 청년사회주의자가 된다. 19211월에 창립된 서울청년회 결성을 주도하고, 4월부터 조선청년회연합회위원, 조선노동대회의 간부로 활동하다 10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11월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여했다.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됐고, 조선교육개선회위원이 됐다. 7월 박원희와 결혼했다. 11월 동경에서 오일신보(五一新報)’ 발기에 참여하고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도회 결성에 참여했다.

 

 

19222월 조선일보에 발표된 전국 노동자 제군에게 격함’(동우회 선언)에 서명했다. 8월 제3차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위원이 됐다. 9월 당과 공청 간의 상호관계 문제를 둘러싸고 조훈과 견해차이가 생기자 고려공청 중앙총국에서 탈퇴했다.

 

 

10월 개선된 조선노동대회 간부들로 하여금 자유노동자대회를 개최하게 했다. 1923년 봄 자유노동조합사건을 계기로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에서 서울파 공산주의그룹 간도총국을 결성했다. 직후 사회주의 교육기관 동양학원을 설립했다. ‘동양학원 탄압사건때 검거를 피하여 영고탑으로 가서 대동학원을 설립했다.

 

 

이후 소련으로 가서 조선사회운동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19246월 폐병에 걸려 귀국했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에서 활동했고, 그해 12월에 사회주의자동맹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25417일 조선공산당이 탄생될 때 김사국의 서울파는 배제됐다.

 

 

192658일 서울청년회회관에서 지병인 폐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사회단체가 주관한 장례식에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그의 마지막을 보러온 시민들은 입장조차 할 수 없었다. 김사국은 일제강점기 자생적 청년사회주의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장지는 수철리 공동묘지였다.

 

 

1938년 비구니 스님이었던 김사국의 어머니 안국당이 소천하여 망우리공원에 묻혔고, 가족묘의 묘번이 109676(), 109677(부부)로 연이은 것으로 보아, 그때 함께 김사국과 박원희도 수철리(금호동)에서 망우리공원으로 이장된 듯하다.

 

 

박원희, 김사국 부부는 2002년에 독립지사 서훈을 받은 후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됐고 현재는 바로 위에 있는 어머니 묘소만 남아 있다. 모친의 묘 왼쪽에는 며느리 박원희, 오른쪽에는 아들 김사국의 반쯤 부서진 비석을 옮겨 세워 놓았다.

 

 

묘비의 위치는 망우리공원 문일평 및 오세창 묘 입구를 지나 아차산 쪽으로 100미터 정도 가서 길바닥이 갈라진 곳 왼쪽 바로 아래에 묘와 작은 비석 두개가 묘지 좌우로 보인다.

 

 

 

 

*필자/김수종

 

 

작가. 경북 영주시 안정면 출신으로 1968년 가을 벼 베는 날 태어났다. 대학에서 종가학문인 철학을 공부한 덕에 같은 줄기인 문학과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주로 역사, 문화와 관련된 유물 유적과 지역을 둘러보면서 연구도 하고 사진도 찍고 글도 쓰고 있다.

 

 

그동안 <열정과 집념으로 승부한다> <영주를 걷다> <역사 그리고 문화, 그 삶의 흔적을 거닐다> <지방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등을 집필하여 책으로 출간했다. 현재 민간 문화재청+환경부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NT)에서 문화유산위원회 위원, 망우리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daipap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