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 3.1운동을 주도한 김중석 목사 망우리공원 딸기원에 묻히다.
-목사, 교육자, 청년운동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
글: 김수종 작가
작년 봄 서울시 중랑구청의 의뢰를 받아 2개월 동안 한국내셔널트러스트(NT)가 망우리 공원에 대한 묘지 전수조사를 하면서 새롭게 30여기의 유명인사 묘소를 발견했다. 감리교 변성옥 목사와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 김중석 목사의 묘소를 발견했다.
김중석(金仲錫) 목사는 일제 강점기 함경남도 함흥에서 교사, 청년운동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883년 평안남도 맹산 출신으로 3.1운동 당시인 1919년에는 함흥에 있는 영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1919년 2월 25일 원산 광석동교회 이순영 전도사는 함흥지역 교회신도들에게 “현재 세계의 대세는 민족자결의 기운으로 향하고 우리 조선민족도 열국 강화회의의 의제에 참여함으로써 나아가 조선독립 청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는 것이 시급하다”라고 했다.
2월 26일 숭실학교 강봉우 선생도 “단순히 청원서를 제출하는 것만이 아니라 조선에서 총독정치를 혐오하고 거부하는 행동을 실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일제에 순종하는 것으로 오인당할 우려가 있으므로 이번 기회에 서울을 중심으로 조선 곳곳에서 독립선언 발표의지가 있으므로 함흥에서도 독립찬성자는 거사를 실행하자”라고 했다.
두 사람의 뜻있는 연설을 들은 김중석 선생은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키로 결심했다. 3월 3일 함흥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비폭력평화시위로 독립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제작배포 등의 일을 함께 맡겼다.
2일 동료들과 원산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바탕으로 등사판을 사용하여 조선독립선언서 3,000여 장을 인쇄하고, 태극기 18개를 만들어 배포를 준비했고, 함흥의 여러 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그 결과 영생학교, 함흥고등보통학교, 함흥농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독립선언발표운동에 찬동 가맹했다. 아쉽게도 그날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주동자 대부분은 사전 검거됐다. 다행스럽게도 만세시위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3일 정오, 함흥면 중앙로 부근에 1,000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하여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대형 태극기를 흔들었다. 다수의 청년 학생들은 조선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했다.
김 선생은 학생과 주민들을 규합하여 책임부서를 정하고 독립만세시위를 위한 자금을 조달하는 활동 등을 하다가 거사 당일 아침에 일경에게 시위계획이 탄로되어 붙잡혔다.
캐나다장로회 소속으로 1898년 한국에 파송되어 함흥선교지부를 책임지고 있던 맥래 목사(Rev. M. D. MacRae, 마구례)는 함흥에서의 만세시위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영국영사관에 알리고 총독부에 항의하기 위해 서울에 와서 3월 20일에 상세한 진술서를 발표했다.
함흥에서 아무런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인 2일 밤과 3일 새벽에 기독교학교의 학생들 몇 명과 교사 등이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됐다. 3일 월요일에 경찰이 장날인데도 가게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중심가에 모였다.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나팔을 불었고, 이를 신호로 하여 군중들은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고, 태극기가 물결쳤다. 함흥의 여러 학교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많은 학생들이 체포됐다. 이날 일본인 소방서원들은 소화 진압용 갈고리를 휘둘러댔다.
4일 정오경에 조선인들은 다시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 소리를 듣자 일본인 소방대가 곤봉을 들고 군중을 해산시켰다. 그들은 또 곡괭이, 소화용 갈고리, 쇠뭉치, 단단한 몽둥이, 짧은 손 곤봉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서 머리를 때리고 갈고리를 휘두르면서 군중 속으로 돌진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고, 얼굴에서 피를 흘리면서 소방서원들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갔다.
바로 이날 7명의 조선인 남자들과 몇몇 소녀들이 받은 상처 때문에 비참한 지경이 되어 경찰서로 연행됐다. 목격한 바로는 조선인들은 절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방어하기 위해서 막대기를 들거나 돌을 던지지도 않았으며, 일본인에 대해 욕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6일에도 함흥의 가게들은 가게 문을 열지 않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조선인들은 비폭력평화시위의 원칙을 지키면서 돌이나 막대기를 들지 않았고, 심지어 욕설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경찰과 소방대는 만세시위를 폭력적으로 탄압하면서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인물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신병을 넘겨받은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의 가혹한 신문을 거쳐 24일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함흥지방법원에 기소했다.
변호는 조선인 허헌 변호사와 신석정 변호사가 맡았다. 함흥지방법원은 4월 21일 기소된 모두에게 징역 2년에서 태90에 이르는 유죄를 언도했다. 김 선생도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아쉽게도 당시 판결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김 선생은 출옥 후에도 교편을 잡으면서 은밀히 조선역사를 가르치고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는데 힘썼다. 1920년에는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목사가 되어 함흥에서 오랫동안 목회와 기독교청년회 활동, 구호활동 등을 했다.
이승만의 독립노선에 따라서 1925년 설립된 기독교계열 항일비밀결사인 흥업구락부에 1938년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인 1947년 월남하여 목회자로 활동하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함경남도 노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66년 돌아가셨고, 망우리공원 북쪽 딸기원 언덕 위, 아동문학가인 강소천 선생 묘지 인근 개인묘소에 묻혔다. 정부에서는 3.1운동 당시 고인의 독립운동 공훈을 기려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필자/김수종
경북 영주시 안정면 출신으로 1968년 가을 벼 베는 날 태어났다. 대학에서 종가학문인 철학을 공부한 덕에 같은 줄기인 문학과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주로 역사, 문화와 관련된 유물 유적과 지역을 둘러보면서 연구도 하고 사진도 찍고 글도 쓰고 있다.
그동안 <열정과 집념으로 승부한다> <영주를 걷다> <역사 그리고 문화, 그 삶의 흔적을 거닐다> <지방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등을 집필하여 책으로 출간했다. 현재 민간 문화재청+환경부 역할을 하고 있는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NT)에서 문화유산위원회 위원, 망우리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daipap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