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툇마루를 통해서 본 불교의 민중성
지난여름 처음으로 강화도 마니산 정수사(淨水寺)에 가보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대웅보전 창살연꽃무늬를 보기 위함이었다. 대웅보전 꽃문양문살은 통나무를 손으로 파내 만든 것으로 공예양식에서도 특이한 장식으로 알려져 있다.
전면의 문 가운데 사분합문은 마치 요술단지꽃병에서 소담스런 목단이 몽실몽실 피어오르듯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잘 조각된 목단줄기들이 창살역할을 하고 있는데, 꽃병은 청자와 진사도자기이고, 네 개의 꽃병 문양이 모두 다르다.
사실 대단한 소문에 비해 문창살이 멋스럽지 않음에 실망했다. 한국 최고를 자랑하는 소백산 아래 내 고향 영주시 순흥면 성혈사 나한전 문창살에 익숙한 사람이라 그랬나 보다. 아무튼 마니산 동쪽 기슭에 작지만 아름다운 천년 고찰이다.
울창한 숲속에 아담한 대웅보전 이외에 몇 개의 건물들이 보이고, 주변 산세와 조화가 이루어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난다. 서해바다가 장쾌하게 펼쳐지는 전망 좋은 절이다.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회정대사가 창건했다. 이후 비구니 스님들이 살면서 중수 중창을 거듭했다.
경내에는 보물 제16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삼성각, 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보전은 세종 5년(1423)에 중창했다. 본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인데, 전면에 별도로 측면 1칸에 해당하는 툇마루가 마련되어있다는 사실이 매우 특이하다. 툇마루가 있어 전체적으로는 측면 4칸집이 된다.
그 한 칸은 숙종 대에 증축된 것이다. 나는 문창살을 보기 위해 갔다가 실망했지만, 대웅보전에 달린 툇마루를 보고 놀랐다. 툇마루가 있는 법당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 말까지 불교가 번성한 나라였지만, 아무래도 어린 백성들에게 불교와 부처님은 멀기만 했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는 어린 중생들에게 불교의 복잡한 불경을 다 볼 수 없으니 매일 주문만 외우라고 가르쳤다. 그 주문이 바로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를 주관하는 부처이고,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보살로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다.
나무는 소나무, 전나무, 밤나무를 통틀어 가리키는 나무가 아니라 ‘의지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게 귀의합니다’라는 기도문이며 신앙고백인 것이다.
불교를 믿는 일반 백성들도 한가롭게 사찰에 방문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대웅전에 들어 108배를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대웅전에 달린 툇마루의 의미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대웅전 안에 들지 않고도 문을 열어두면 툇마루에서 절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정수사보다 더 멋지고 아름다운 툇마루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지난가을 단풍이 물들 무렵 안동 천등산 개목사(開目寺)에 찾아갔다. 작은 절은 유명한 봉정사의 위쪽에 있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의상이 이 산 정상 근처 큰 바위 아래에서 수도를 하는데, 하늘에서 큰 등불이 비춰주어 99일 만에 도를 깨치게 됐다. 그래서 99칸 절을 짓고, ‘하늘이 불을 밝혔다’는 뜻으로 ‘천등사’(天燈寺)’라고 칭했다. 조선 초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와서 중수했다.
풍수지리에 능한 맹사성이 “안동지방에 장님이 많으니 ‘개목사’(開目寺)라고 하면 장님이 안 생길 것”이라고 하여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69년 원통전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한 상량문에 따르면, 이 건물은 맹사성의 사후인 1457년에 지어진 것이다.
지금 개목사 규모는 매우 단출하다. 절 뜰 안에는 원통전과 요사채 뿐이다.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주심포식 맞배지붕집이다. 건물 전면에 툇마루를 놓고 마루를 깐 점이 독특한데 이는 비슷하게 생긴 강화 정수사의 법당이 후대에 툇마루를 덧붙인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그렇게 지은 것이다.
조선 초기의 몇 되지 않는 목조건물로 보물 제242호이다. 아무튼 풍수지리에 능했던 맹사성이 개목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후부터는 차츰 눈병 환자가 없어지게 됐다. 눈병 없앤 개목사는 ‘눈병 환자가 많은 안동’과 ‘절 이름을 바꾼 맹사성’이다.
맹사성의 ‘맹’자와 개목사의 ‘개목’에 주목하여 풍수지리적인 단점은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다른 의미를 살펴보면, 억불숭유 정책으로 조선왕조 내내 천대받던 사찰이 쓸모없이 것이 아니라 눈병을 낫게 해주는 소중한 신앙임을 강조하고 있다.
개목사 원통전은 처음부터 툇마루를 두었고, 정수사 대웅보전은 조선 숙종 임금 때 중창하며 툇마루를 덧댄 것이다. 그렇다면 툇마루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조선시대 불교의 민중성으로 다시 발견하게 된다.
법당 안이나 바로 앞에 다가갈 수 없었던 민중들을 위해 툇마루를 두어 일반백성도 편하게 법당 앞에서 배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개목사는 눈을 뜨게 한다는 의미다. 이 두 사찰에서 나는 조선시대 불교의 민중성에 다시 눈을 뜨는 계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