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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가 최열

푸른하늘김 2020. 2. 9. 19:47

SBS <칼의 연대기>와 최열 환경재단 대표

 

1.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직후인 2008년 3월 27일 SBS 박수택 환경기자는 엄청난 특종을 한다. 국토해양부 건설수자원정책실의 한반도대운하 추진계획 문건을 폭로한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한반도대운하 계획은 없다고 부인했는데, 사실은 2009년 4월부터 공사에 착수한다는 구체적 일정과 전략까지 몰래 세워둔 것이 밝혀졌다. 총선을 앞둔 시점의 메가톤급 폭로였다.

 

2. SBS 보도직후 최열 환경재단 대표는 2008년 3월 31일 ‘한반도 대운하 저지 합동 기자회견’을 통해 대운하 저지 1천만 서명운동을 펼치겠다고 선언했다. MB에게는 타격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안전문제 보도후 촛불집회가 대규모로 이어졌다. 명박산성이란 말이 나왔고, MB는 청와대 뒷산에서 100만 시민이 운집한 6.10 촛불집회를 보고 아침이슬 노래도 들었다고 밝혔다.

 

3. 반격의 시간이 돌아왔다. 2008년 9월 검찰은 환경운동연합에 대한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정연주 KBS사장을 체포하고, PD수첩 제작진을 수사하던 시점이었다. 애초의 수사 명목은 환경운동 국장 등의 횡령이었다. 강사료 등 6600만원을 기부형식으로 돌려받아 개인 계좌에 보관하는 수법으로 횡령한 혐의로 받고 있는 김모 국장과 박모 간사가 수사 대상이었다. 그러나 진짜 타깃은 최열 대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수사책임자는 김광준 서울지검 특수3부장이었다. 7명의 검사와 40여명의 수사관을 투입해 100명 가까운 참고인을 부르고 수 백 명의 계좌를 뒤졌다.

그 사이 “최열이 환경운동연합의 공금을 횡령해서 주식투자를 했다”. “최열이 환경연합 공금을 횡령해 딸 어학연수 비용으로 썼다.”는 기사가 검찰발로 쏟아졌다. 최열은 이미 2003년 3월에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직을 물러났으므로 그 이후의 환경운동연합 회계문제와 자신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 반론을 들어주는 언론은 없었다. 수많은 언론보도로 국민들의 머리속에 최열은 후원금을 횡령해 주식투자를 하고, 자녀들 유학비용을 댄 파렴치범으로 각인됐다. 그리고, 한 번 각인된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4. 검찰은 최열 대표를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최열은 1995년 환경운동연합 사옥인 환경센터를 지을 때, 3억원을 환경운동연합에 빌려준 차용증을 찾아냈다. 당시 환경운동연합은 사옥을 지을 돈을 구하지 못해 쩔쩔애던 식였다. 최열이 환경운동연합 사옥건설을 위해 드는 돈 3억원을 빌려주었고, 이듬해 환경운동연합은 모금을 통해 1억 2천만원을 갚았고, 2002년에 7천만원을 다시 갚았다. 최열은 여전히 1억원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이는 환경운동연합 회계장부에도 기재돼 있었다. 최열은 이를 법원에 제출했다. 2008년 12월 3일 법원은 최열의 주장이 일리 있다고 보고, 구속영장 청구를 2번이나 기각했다. 최열의 검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듯 했다.

 

5. 최열을 수사하던 김광준 특수3부장은 조희팔, 유진그룹 등으로부터 10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김광준 부장검사는 대구지검시절뿐만 아니라, 서울지검 특수3부장 시절에도 KTF, 철강회사 등에게서 6천만원을 받았다.

 

6. 최열을 비롯한 환경운동연합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대표와 사무총장이 잇따라 사표를 냈고, 부장급 이상 간부 15명이 사직했다. 외부 활동도 중단하며 사실상 활동마비상태가 됐다.

후원도 급감했다. 검찰이 정권의 역점사업인 대운하를 반대하는 환경운동연합의 모든 계좌를 샅샅이 뒤지는데, 어느 사업가가 겁없이 후원을 할 수 있겠는가?

MB정부는 <4대강 살리기사업>을 발표하고 사전환경 검토도 끝나지 않은 채 착공을 강행했다. 한반도 대운하 전초 사업이 아니냐는 우려가 컸지만, 반대 움직임은 미미했다. 주축인 환경운동연합이 무기력해졌기 때문이다. 검찰은 환경운도연합을 초토화시켰다.

 

7. 2009년 특수3부장은 김기동 검사로 바뀌었다. 김기동은 BBK 수사를 실무 책임자로 MB에게 면죄부를 준 인물인데, 대표적인 우병우 라인이었다. 김기동으로 바뀐 서울지검 특수3부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최열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2009년 2월 12일자 파이낸셜뉴스는 “검찰은 최 대표의 횡령의혹 사건을 처리 1순위 사건으로 분류하고...”라고 보도하고 있다.

 

8. 2009년 3월 12일 KBS는 “최열 환경재단 대표가 부동산 개발 인허가 과정에 개입해, 억대의 돈을 받은 단서가 포착됐습니다. ”라고 검찰발로 보도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었다. 경기도 남양주 금곡 산업단지를 개발한 부동산 업자 오모씨에게 거액의 돈을 받고, 김문수 도지사에게 용도변경 등을 로비했다는 것이다. 브로커짓을 했다는 것이다. 친환경 계란판을 만드는 OO산업개발 이모 회장, 오 모 사장등은 20여년간 환경운동연합을 후원해 온 분이어서 최열은 이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열 대표가 급히 전세를 얻어야 할 상항이 생겼는데, 전세금을 넣어야 할 때까지 기존 집이 팔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들은 오모 사장이 전세금 1억 3천만을 빌려주었고, 최열은 곧 갚았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 행위를 차용이 아니라 알선수재로 보고 최열을 기소했다. 

 

9.1심에서는 무죄가 났다. 그런데, 항소심에서는 사실검토 없이 법리만으로 판결을 뒤집었다.4차례의 공판만 있었다. 대법원에선 신영철 대법관이 항소심과 마찬가지로 최열을 알선수재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이 과정에서 최열씨에게 돈을 준 이모 회장 등은 '자신들이 최열에게 정치자금 등을 제공한 것으로 진술하라'며 집요하게 자신들을 압박하고 괴롭혔다고 법정증언했다. '최열에게 돈을 줬다는 진술만 하면, 공장 등 사업체와 관련한 문제는 모두 덮어주겠다'며 회유했다는 내용까지 법정에서 폭로했다. 검찰의 모든 관심사는 이들 사업가의 횡령 등의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최령이었다는 것이다. 어느새 최열은 정치인이 돼 있었다. 

 

10. 오모사장은기자회견을 하려다 긴급체포돼 수감되기도 했다.이종명 검사에게 스스로 출석하겠다고 통화했는데,통화직후 검찰이 집에 들이닥쳐 긴급체포했다는 것이다.환경운동취지에 공감해 후원해 온 이모 회장, 오모 사장 그리고 이들의 회사는 검찰 수사로 풍비박산이 났다.

 

11.검찰은 가장 무서운 여론재판을 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최열이 환경운동공금을 빼돌려 자녀들의 유학자금을 보낸 인물로 생각하고 접촉을 기피하는 경우도 있었다. 형벌보다 무서운 낙인을 만들어내는 기소와 언론보도의 힘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