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엘리트가 버린 사람들>(도서출판 원더박스)에서 최근 출간
2017년 영국 정가에서는 한 권의 책이 조용한 파문을 일으킨다. 20세기 후반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 노선의 추종자이기도 했던 중도 좌파 성향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굿하트가 펴낸 책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원제:The Road to Somewhere)>이 일으킨 논란이다.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 결과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라는 2016년에 있었던 두 사건을 두고 많은 이들이 유권자의 다수가 시대에 뒤떨어진 선택을 했다며 당혹해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을 한 지지자들에게 ‘시대에 뒤떨어진 못 배운 이들’ 심지어 ‘인종주의자’라는 비난과 조롱을 퍼붓기도 했다.
이들의 지지를 얻는 정치 세력은 손쉽게 ‘극우 정당’이나 부정적 의미에서 ‘포퓰리즘 정당’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게 이 저자의 주장이다. 오랫동안 중도 좌파 성향의 언론인으로 활약해 온 저자는 이런 현상이 엘리트 중심의 정치 영역에서 소외되어 왔던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섬웨어(지역에 기반한 중하층 노동자)’라 불리는 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나아가 이들에게 제대로 된 목소리를 부여하지 못하면 사회가 더 큰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진보적인 의제에 반대하거나 그와 반대되는 성향의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이들로 몰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진지한 상호 이해에 기반 하지 않고서는 더 큰 혼란을 가져올 뿐이라는 게 이 책의 교훈이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지지기반은 러스트벨트와 팜벨트로 알려졌다. 제조업 불황과 중국산 농산물 수입에 타격을 입은 지역이다. 영국의 브렉시트 지지자도 스코틀랜드의 농부처럼 저학력 백인 노동자다.
언론인 출신의 저자 데이비드 굿하트는 서문에서 '세계화 시대에 가장 피해를 입은 이들은 선진국의 가난한 저학력 계층'이라고 전제한다. 이어 사회적 계층이 어디로든 이주할 수 있는 사람(애니웨어)과 태어난 곳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섬웨어)으로 양분됐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세계화의 수혜자와 피해자다. 기존의 계급적·계층적 정의와 동떨어진 이분법이다. 저자는 수십년간 공론장에서 소외받았던 섬웨어에 주목한다. 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의 가결 등이 '섬웨어의 역습'의 결과라고 보고, 우파 포퓰리즘 정당이 성공하고 민주주의의 위기가 찾아온 이유를 찾는다.
영국 사회는 양극단의 세계관을 가진 두 집단이 갈등하는 사회다. 저자는 교육, 계층 이동, 이민, 여성, 성소수자 등 다양한 쟁점에서 애니웨어와 섬웨어의 갈등을 포착한다. 그리고 대안으로 섬웨어의 목소리에 더 많은 힘을 실어줄 것을 권한다.
예를 들면 이민자의 입국을 제한하고 취업을 통제하거나, 보편복지 대신에 근로 의욕이 있는 이들에게 선별복지를 확대하는 등의 조치다. 한편 이 책은 검증되지 않은 사회집단의 존재를 가정하고 쓰여지는 등 논리전개의 정합성에서 구멍이 많다. 대안도 뚜렷하지 않다.
현재 세계는 어디에서든 대중주의적 정당은 기성 중도 좌·우파 정당들의 고전 속에서 되레 약진하고 있다. 혐오와 불신의 정치에 대한 반감이 스며있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세계화 물결 속에 가장 큰 손실을 본 집단은 부유한 국가 내 가난한 사람들”이라며 “그것이 포퓰리즘은 새로운 사회주의라고 말하는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섬웨어가 이주민 문제를 반대하진 않지만, ‘적절한 규모의 인구 이동’을 요구할 때, 애니웨어 성향의 정치인들은 이 문제를 피하기 십상이다. 또 애니웨어는 ‘일은 줄이고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시각보다 ‘전문직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에만 치중하는 작은 여성 집단 문제에만 관심을 보여 섬웨어와 대립각을 보인다.
무엇보다 누구나 안정되고 괜찮은 삶을 누려야 한다는 평등주의적 약속을 능력주의 위주의 가치를 핵심으로 삼는 애니웨어 층은 지키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애니웨어가 세계화의 수혜를 누린다면 섬웨어는 그 직격탄을 맞은 이들이다.
세계 20~25%가 애니웨어라면, 40~50% 정도가 섬웨어다. 그 나머지는 중간층(Inbetweener). 저자는 ‘수십 년간 사회경제적 지위가 낙후됐지만, 공론장에서도 소외된’ 섬웨어에 주목한다. 현재의 대혼란은 유럽 통합 과정에서 누적된 불만을 담아내지 못한 주류 정당의 ‘대의(代議)의 실패’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지적한다.
진보적 개인주의 성향의 엘리트들이 중시하는 가치가 더는 사회 전체의 중심 가치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새로운 균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게 이 책의 교훈이다. 지난 20~30여 년 이상의 기간 동안 쉼 없이 확산되어 온 EU 통합을 비롯한 세계화의 논리는 애니웨어에게는 새로운 기회이자 도전이었다.
반면 같은 기간 섬웨어의 삶은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공론장에서 섬웨어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애니웨어의 목소리가 곧 다수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저자는 애니웨어와 섬웨어를 다시 중도적인 다수와 극단적인 소수로 나눈다.
저자는 현재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의 배경에는 과거 ‘좌파’로 묶여 있던 ‘대졸 중산층 좌파(애니웨어)’와 ‘노동 계층 좌파(섬웨어)’의 분화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이들의 이해관계가 점점 대립하여, 이주나 시민 우선주의, 대학 교육 예산 등의 쟁점에서 견해차가 커졌고, 기존 중도 좌파 정당은 ‘대졸 중산층 좌파’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노동 계층 좌파’의 목소리를 대변할 창구가 사라졌으며, 이것이 포퓰리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에 좌파 정당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저자는 기존 애니웨어 중심 정치에서 놓치고 있던 몇 가지 이슈를 더욱 강조하여 소개한다. 먼저 이주민 문제. 이는 ‘이동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시대정신과 ‘대중이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이민자 수를 유지해야 한다’는 현실적 목표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애니웨어 가치관 확산에 따라 가족보다는 개인이 중요하다는 인식 역시 퍼져나가고 있지만, 실제로 부유한 전문직 가정일수록 전통적 결혼 관계가 높다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결국 교육과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안정성이 떨어지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애니웨어 중심의 정치는 외면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마지막으로 계층 이동과 능력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거리를 던져준다. 계층 이동과 능력주의는 진보적 개인주의 성향을 띠는 애니웨어의 핵심 가치다. 이는 능력에 따른 성공과 보상이 공정하다는 가정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하지만 인구 절반은 개념상 늘 소득과 인지 능력 기준으로 중간 이하에 속한다. 불가피한 현상일 수 있지만, 누구나 안정되고 괜찮은 삶을 누려야 한다는 평등주의적 약속과는 어긋난다.
특히 과거 번영의 바닥을 다지는 역할을 했던 숙련 노동의 일자리(섬웨어의 일자리)가 대거 사라지고 있는 지금, 영국 사회는 인지 능력이 뛰어난 엘리트나 대학 교육을 받은 이들(즉, 애니웨어)에게 훨씬 유리한 형태로 변모했다.
어쩌면 영국 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세습’ 능력주의 사회를 향해 달려온 것이 아닐까! 하지만 여전히 애니웨어들이 제안하는 정책이란 저소득층의 대학 교육을 어떻게 유도하고 지원할 것인가에 머무르고 있다.
저소득층 노동자에게 현재의 일자리보다 좀 더 나은 일자리를 어떻게 제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빠진 채로 말이다. 저자 데이비드 굿하트는 애니웨어의 자유와 섬웨어의 뿌리 애착을 인간의 두 가지 정치적 영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 두 목소리가 공존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1960~1970년대에 성장한 자유주의적인 베이비부머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면서 힘이 균형이 급격히 무너졌다. 애니웨어의 가치는 베이비부머 세대 덕택에 지난 25년간 서구 사회에 그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섬웨어는 ‘잊힌 사람들’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민주주의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애니웨어의 가치는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고, 섬웨어의 반격에 번번이 발목을 잡히고 있다. 그 사이에 적절한 타협점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위기를 잘 넘기지 못한다면, 유럽은 현 세대가 사라지기 전에 독재 정치는 물론 인종과 종교를 이유로 한 대량 학살을 경험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가 제안하는 해법은 섬웨어의 온건한 포퓰리즘에 좀 더 발언권을 주는 것이다.
런던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지방 강화에 힘쓰고, 선거 제도 개혁을 통해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단순 다수 대표제를 기반으로 한 영국 정치에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여,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가 의회로 모이도록 해) 섬웨어의 목소리가 의회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브렉시트를 영국의 이민자 비율을 떨어뜨리고 안정성에 무게를 두는 사회로 회복하는 기회로 삼고, 학교 졸업 후의 교육과 고용을 중심으로 ‘국가 사회 계약’도 재조정하자고 주장한다. 그렇게 섬웨어와 애니웨어의 새로운 균형을 찾아나가는 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정치의 핵심 과제라고 말한다.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의 저자 데이비드 굿하트는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 독일 특파원을 지낸 언론인이자 정치 평론가이다. 요크 대학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그의 세계관도 변화한다. 영국 사회에 물밀듯이 들어오는 이민자들이 영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기면서부터였다.
2017년 〈파이낸셜타임스〉에 실은 칼럼 ‘내가 런던 리버럴(LIBERAL) 종족에서 벗어난 이유’에서 “(노동당 정부가 추진한) 이민 확대 정책의 이면에는 다양성 확대와 사회적 연대의 붕괴라는 긴장 관계가 숨어 있다고 판단했다”고 언급한다.
그 긴장 관계를 자세히 분석한 《영국인의 꿈(THE BRITISH DREAM)》은 그에게 조지 오웰 상(2014년)을 안겨 준다. ‘변절한 좌파’ ‘회색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브렉시트’ 국면 이후 그의 주장과 분석은 재조명받고 있다.
책을 번역한 김경락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언론계에 15년 남짓 몸을 담아왔다. 주로 노동과 경제 분야를 취재하고 기사를 썼다. 현재는 〈한겨레〉 산업팀 데스크를 맡고 있다. 한국기자협회에서 주는 이달의 기자상을 3회 수상했으며, 한국기자상과 씨티언론인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