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원]
현실의 가혹함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하지만 여기엔 일종의 함정이 있다. 환원하면 결국 “삶은 고통의 바다”라는 부처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현실에 가혹한 것만이 있는 건 아니거니와 가혹한 현실을 가혹하지 않은 현실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어찌 되었든, 있기 때문이다. 그 방법이 진짜 있느냐, 오지랖도 넓지, 금수저냐, 참 긍정적이군..... 식의 비아냥은 현실의 가혹함을 확정할 뿐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란 식의 레토릭으로는 ‘진짜 아픈’ 청춘을 위로할 수 없다.
보수단체를 중심으로 한 광화문 집회 기사를 보다가 잠깐 멎었던 숨이 길게 내쉬어지는 동안 든 생각은 박근혜 탄핵 이후 한국사회가 매우 역동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거였다. 대선정국에서 한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둘로 나눠질 것”이라는 안철수의 말이 ‘예언’으로 둔갑하는 상황은 몹시 안타깝지만, ‘구악’이 햇볕(광장)으로 나왔다는 점에서 결코 나쁘지 않은 일이다. 계속 숨거나 뒤에서 군시렁거리기만 하면 여전히 위험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악법을 폐하는 방법은 그 악법을 시행하는 것”이란 소크라테스의 말은 진리다. 박정희나 전두환, 이명박과 박근혜를 거치며 우리는 이것의 진리성을 소름끼치도록 오래, 끈끈하게, 적나라하게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법’이 여전히 상존하는 이유를 들자면 꽤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으나, 분명한 것 하나는 모든 악이 완전히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악법의 옹호자였음을 자인할 수 있는 계기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각에 실패한 것 – 지금+여기의 한국이 아픈 이유다. 자한당과 보수단체가 집결한 광화문이, 바라건대, 구악의 최종적이며 최고 규모의 드러남이기를 바란다. 그러니 그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비애와 시름 밑에는 언제나 기쁨의 두 겹 비단실이 깔려 있다”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기억한다. 비애와 시름을 걷어내고 찬란한 기쁨의 비단, 그 보드라운 감촉을 맛볼 수 있기를, 이역만리에서 바래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