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리 왕조 후손 화산 이씨의 추석 소망/중앙일보 오영환 기자
고즈넉한 야산 밑 목조기와 정자엔 대월국(大越國·베트남) 왕조의 숨결이 깃들어 있었다. 경북 봉화군 봉성면의 충효당(忠孝堂). 문을 들어서니 화산 이씨(花山李氏) 13대손 이장발(李長發·1574-92년)의 충절을 기리는 기록물로 가득했다. 화산 이씨는 대월국 리 왕조(李朝·1009~1225년)가 뿌리다. 건물 네 기둥에는 한시(漢詩) 구절이 걸려 있었다. 백 년 사직을 구할 계획으로(百年存社計)/6월에 갑옷을 입었네(六月着戎衣)/나라 근심에 몸은 헛되이 죽지만(憂國身空死)/어버이 못 잊어 혼만 돌아가네(思親魂獨歸). 임진왜란 발발 당시 좌도의병장 서기였던 이장발이 쓴 순절시는 절절했다. 건물 뒤쪽으론 유허비(遺墟碑)도 눈에 들어왔다. 충효당은 화산 이씨 문중이 18세기에 세웠다. 외관은 영락없는 조선조 건물이다. 하지만 대청의 목조 벽면에 연꽃 문양을 새겼다. 연꽃은 베트남 정신·문화의 상징으로 현재 국화다. 유허비에는 화산 이씨 시조 이용상(李龍祥·리롱뜨엉)의 이름이 선명하다. 약 3000㎞ 거리와 1000년 세월을 헤쳐온 베트남과의 인연은 극적이다.
리 왕조는 베트남 최초로 중국 책봉에서 벗어난 정권이다. 수도가 탕롱(현 하노이)으로 유교 문화가 융성했다. 현대 베트남 국부가 호찌민이라면 리 왕조는 독립의 표상이다. 이용상은 리 왕조 말기의 왕자다. 6대 영종의 7남이자 8대 혜종의 삼촌이다. 1225년 외척(陳 왕조)이 정변을 일으켜 멸족에 나서자 배로 도주해 이듬해 황해도 옹진군 화산에 도착한다. 당시 고려 고종이 토지를 하사하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하면서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됐다. 차남 일청(一淸)이 안동부사로 부임한 후론 봉화가 집성촌을 이뤘다. 일청의 12대손 장발의 충효당이 봉화에 세워진 이유다. 충효당은 국내 유일의 리 왕조 관련 유적이다. 화산 이씨는 2015년 기준 1237명이고, 봉화군에 14명이 살고 있다. 봉화군은 지금 한국과 베트남의 작은 가교다. 리 왕조 사원이 있는 베트남 박닌성 뜨선시와 우호교류 도시를 맺었다. 이 사원에선 해마다 리 왕조 창건 기념 축제가 열리고 화산 이씨 후손들이 참석한다. 화산 이씨와 충효당에 대한 베트남의 관심도 각별하다. 화산 이씨 후손들이 1995년 베트남을 찾았을 때는 공산당 서기장이 환대했다. 왕손에 대한 예우다. 지난해는 주한 베트남 대사가 충효당을 찾았고, 봉화에는 베트남 취재진의 발길도 끊이질 않는다.
봉화군은 충효당 중심의 베트남 타운 조성 사업에 나서고 있다. 베트남 왕조 유적지를 민간 교류의 거점으로 삼겠다는 생각이다. 충효당 일원엔 베트남 역사공원을, 인근 창평 저수지 쪽엔 숙박·교육 시설을 갖춘 베트남 마을을 꾸밀 계획이다. 내년부터 5년간 422억원을 들여서다. 과제도 없지 않다. 예산이 빠듯해 안정적 국비 지원이 불가결하다. 화산 이씨 후손들의 기대는 크다. 이장발 16대손으로 충효당 옆에 사는 이건 씨는 “베트남 타운이 하루빨리 생겨 한국과 베트남 간 징검다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봉화의 베트남 결혼이주여성들은 통역과 가이드, 음식점에 큰 관심을 보였다. 베트남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다. 한국의 3대 수출 시장이자 4대 무역국이다. 교역 규모(지난해 682억 달러)는 1992년 국교 수립 이래 130여배 늘어났다. 외교적으론 신남방 전략의 핵심 파트너다. 문화적으론 한류의 허브다. 한국어과 설치 대학이 24곳이다(2017년). 양국은 외세 침탈과 분단의 역사를 공유한다. 여기에 인연도 질기다. 베트남 타운 조성은 화산 이씨나 봉화군만의 일이 아니다. 정부 차원의 입체적 접근과 지원이 필요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