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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식치원

푸른하늘김 2019. 7. 2. 15:15

 

월간 "돌봄"잡지 식치원 특별판 기고문입니다.

 

“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뜻의 식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왕의 건강과 장수를 책임졌던 식의제도와 선비들의 전통경험방인 민간의서를 통한 식치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왕실에서 왕 한분을 위한 섭생은 비단 화려한 연회음식이나 12첩 반상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왕의 건강이나 체질 식성 습관등을 면밀히 분석해서 그에 맞게 음식을 처방하고 조리법을 연구하던 식의라는 존재야 말로 본초강목은 물론이고 조선팔도 식자재를 모두 이용할 수 있었고 그 효능이나 몸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그야말로 왕을 위한, 왕에 의한, 왕의 남자였다 .

 

이런 식치 담당 전문관리는 고려시대 음식관청인 상식국에서도 보이며 조선시대는 도관서에 정9품 식의 2명을 두었고 사선서를 거쳐 세조때 이르러 사선서가 내의원으로 흡수되어 사옹원으로 통합되면서 식의라는 명칭은 사라지나 그 역할은 증대되어 이후 동의보감등 많은 관찬의서 집필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처럼 왕실 식치는 식의라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

을 통해서 내의원의 탕약이나 침술에 앞서 음식을 처방

하여 질병을 예방 하고 면역성을 강화한 예방 의학의

백미였다 하겠다.

 

왕실에서 식의의 존재감은 밖으로 잘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지밀상궁처럼 왕의 24시간을 함께했던 특별한 존재였음은 승정원 일기등 다양한 기록을 통해서 확인된다.

 

이러한 조선시대 식치철학의 가장 큰 의미는 성리학적 사고에 기인한 다스림 사상에 있다.

일상의 욕망을 다스리고 인내와 절제를 요구했던 성리학은음식을 통한 질병예방과 장수를 꿈꾸었던 선조들의 건강한 생명연장 목표에도 부합한다.

 

또한 식치에 실패하면 약치나 의치로 넘어가는 논리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다스려 법치로 넘어가지 않게 스스로를 다스리는 성리학적 극기에 빗대어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왕의 다스림을 책임졌던 왕의 남자 식의는 왕의 건강이 나빠지거나 의도치 않게 붕어하게 되면 유배를 가거나 벼슬을 잃기도 했으면 왕과 가까이 있어 많은 대소신료나 내의원의 질투나 시기의 대상이 되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왕실 식치는 거슬러 올라가면 위로는 중국의 주자가례까지 근원을 찾을 수 있고 식의심감을 비롯하여 많은 중국 의서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래로는 민간식치의서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최초의 민간 식치의서인 영주의 이석간경험방도 그 처방의 다수가 왕실 식치의서인 의림촬요,식요찬요 등 관찬의서의 내용과 일치하고, 대부분 예방의학에 가까운 음식처방으로 역시 선비들의 성리학적 사고에 기인한 음식을 대하는 자세에 가깝다.

 

먹고 싶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여 배부르게 먹거나 음식의 효능에 대하여 무지하여 건강을 잃는것은 선비로서 극한의 수치로 여겼으며, 스스로를 다스리는 덕치에서 형벌이 가해지는 법치로 넘어갔다 여겼다.

 

이와 같이 위에서 언급한 바 왕실식치는 식의제도를 통한 왕 한분을 위한 간접건강법이었다면, 민간식치는 성리학자들의 엄격한 자기다스림에 기인한 그들만의 독특한 직접 건강법이라 할 수 있다.

 

-By 식치원-

 

신성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