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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의 전주 & 나주 여행기

푸른하늘김 2012. 10. 3. 00:26

 

김수종의 전주 & 나주 여행기

 

   

 

 

전주한옥마을 살펴보기

 

지난 2012년 9월 22일(토)~23일(일) ‘(재)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 문화유산기금’(http://nt-heritage.org)의 2012년 하반기 시민참여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전라도 전주와 나주에 다녀왔다.

 

이번 활동은 전주의 한옥마을과 나주의 역사와 문화, 근대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간략한 강의와 답사를 통한 체험 프로그램으로 회원 및 일반 시민들을 위한 행사였다.

 

아직 회원이 많지 않고 설립 역사도 길지 않아, 내셔널트러스트라고 하면 생소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내셔널트러스트는 지난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된 자연보호와 근대문화유산보존을 위해 설립된 전통 있는 시민단체다.

 

내셔널트러스트는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이나 역사 건축물과 환경을 기부금, 기증, 유언 등으로 취득하여 이것을 보전, 유지, 관리, 공개함으로써 차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반적인 재정은 회비와 기부금으로 조달한다. 발족 당시 몇 백 명이던 회원이 현재는 300만 명에 이른다. 또 영국토지의 1.5%, 해안지역의 17%를 소유하고 있다. 미국, 일본, 뉴질랜드, 한국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00년에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http://www.nationaltrust.or.kr)가 발족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설립 직후 멸종위기 식물인 매화마름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인천 강화군 길상면의 농지 912평을 매입했으며, 이후 서울 성북동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옛집을 매입했다.

 

또한 2004년 남한강 상류의 동강 보전을 위해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제장마을의 땅 5200평을 매입했다. 이후에도 ‘나주 도래마을 옛집’ ‘권진규 아틀리에’ ‘연천 DMZ 일원 임야’, ‘청주 원흥이 방죽 두꺼비 서식지’ ‘내성천 범람원’을 확보하여 시민유산으로 보전관리하고 있다.

 

현재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최순우 고택을 매입한 이후인 지난 2004년부터 법률적인 외부문제로 조직을 둘로 갈라 자연유산을 보존하는 일에 주력하는 원래의 조직과 근대문화유산보존에 매진하고 있는 ‘내셔널 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로 나눠 활동하고 있다.

 

근대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 나는 22일(토) 아침 참가자들과 함께 서울 양재동에서 버스를 타고 전주로 갔다. 먼저 전북대학교를 방문하여 건축공학과 남해경 선생으로부터 전주를 포함한 전북의 ‘도시와 건축’에 대한 짧은 강의를 들었다.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현재 ‘전주한옥마을’에 있는 800채 정도의 한옥은 대부분 1920년을 시작으로 하여 주로 1940년~1970년대에 지어진 근현대식 서민개량한옥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는 현대에 지어진 한옥이 많았다. 그 가운데 시대와 기법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정말 전통한옥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곳은 100채 정도라고 한다.

 

현대화의 물결 속에 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이 되면서 한옥마을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며, 2003년 이후 전주전통한옥마을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현재 1,200세대 3,900여명이 거주하며 매년 5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지역 명소다.

 

강의를 들은 일행은 일단 점심을 먹기 위해 완산구 서신동에 위치한 48년 전통의 전주전통비빔밥 명가인 ‘성미당’으로 가서 간단하게 육회 비빔밥으로 식사를 했다. 쇠고기 육회를 올린 비빔밥에는 고추장으로 미리 비벼진 밥이 깔려 있어 어렵지 않게 살살 비벼 국물과 함께 먹었다.

 

맛은 있었지만, 약간 매웠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들은 남해경 교수의 안내를 받으며 먼저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인 ‘이목대(梨木臺)’와‘오목대(梧木臺)’가 있는 산언덕에 올라 한옥마을을 조망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이목대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 이안사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으로, 고종이 직접 쓴 비문이 있다. 오목대는 이성계 장군이 고려 우왕 6년에 삼도순찰사로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군사를 이끌고 잠시 쉬어가던 장소이다.

 

고종이 직접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는 비문을 새겨 놓은 비는 광무 4년(1900)에 세운 것이다. 이들 유적지는 조선왕조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가치 있는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목대와 오목대가 있는 산언덕을 오른 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한옥마을 조망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장소가 이곳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에 대해서는 잠시 후 다시 ‘경기전’ ‘전주사고’ 등을 보면서 생각하기로 하고 길을 따라 다시 내려왔다.

 

한옥마을 입구에는 전주를 알리는 특색 있는 기마경찰대 사무실이 보인다. 실제로 말을 타고 순찰을 도는 경찰관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것을 보니 나도 신이 났다.

 

이제부터 태조로를 따라 상가와 한옥생활체험관, 전통술박물관 등이 있다는 안내판을 보면서 천천히 걸었다. 10월 중하순에 ‘전주비빔밥축제’며 ‘전주국제발효식품엑스포’ ‘한국음식관광축제’가 열린다는 홍보물이 즐비하다.

 

전통적인 한옥은 별로 없고, 이미 상업화된 현대식 한옥이 많이 보인다. 2층으로 된 한옥빵집과 편의점, 상점, 안내소 등이 있다. 산위에서 보던 한옥의 아름다운 모습은 아래에서 보니 약간은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다. 어차피 인생도 가까운 곳에서 보면 비극의 연속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어 바로 ‘경기전(慶基殿)’ 입구다. 1410년(태종 10) 완산구 풍남동에 건축된 조선의 묘사(廟祠)로 사적 제339호다. 당초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완산, 계림, 평양에 창건하여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현재의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4년(광해군 6)에 중건했다. 건물의 구성은 본전, 본전 가운데에서 달아낸 헌(軒), 본전 양 옆 익랑(翼廊)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두르고 있는 내삼문, 외삼문 등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있다.

 

본전은 남향한 다포식 맞배집 건물로,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 위에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세웠는데 건물 안의 세 번째 기둥 렬에 고주(高柱)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을 놓았다.

 

이 단 양 옆에는 일산(日傘)과 천개(天蓋)를 세웠다. 본전 앞에 내단 헌은 본전보다 한 단 낮게 쌓은 석축 기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2익공식(二翼工式) 포작(包作)을 짜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본전과 헌이 이루는 구성은 왕릉에 제사를 지내려고 세운 정자각의 구성과 같다. 또한, 본전 양 옆에는 익랑(翼廊) 2칸, 무(廡) 4칸이 있다. 내삼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된 3문으로 그 양 옆에 익랑 2칸을 두었다. 조선중기 건축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멋진 공간이다.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아산,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졌다가 1614년 경기전이 중건되면서 다시 돌아왔다가 동학혁명 때 위봉산성으로 잠시 옮겨졌다가 돌아온 것이다. 당장이라도 그림 밖으로 튀어나와 호통이라도 칠 것 같은 태조의 모습에 강인한 군주의 위엄을 보는 듯하다. 

 

경기전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에 소학교를 세우면서 절반 정도가 잘려 나갔다가 1995년 학교를 이전하고 2004년 재실부속건물을 복원했다. 그래도 지금 남아 있는 모습은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과 내삼문을 연결하는 간결한 구조다.
 
경기전 본전을 살펴보고 태조의 어진까지 본 우리들은 바깥쪽에 있는 ‘전주사고’를 보러 갔다. 전주사고는 1439년 설치된 조선왕조실록의 보관 장소다. 한양, 충주, 성주의 사고와 함께 한 권씩 보관했던 곳이다.

 

임진왜란으로 다른 사고의 실록이 모두 소실되었지만 전주사고는 손홍록이 내장산으로 옮겨 보관함으로써 지켜낼 수 있었다. 유일한 실록은 14개월 만에 조정에 전달되어 다시 한양,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의 사고에 보관되었다.

 

전주사고의 원본은 강화 마니산에 보관되었으며 현재의 사고는 최근에 모양만을 복원한 것이다. 1층이 전부 비어있는 탁 트인 구조는 실록이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습기를 날려버리는 환기창의 개념으로 만든 비움의 공간으로 무척 마음에 들고 좋았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을 잠시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태실이 크고 웅장하여 조선왕실의 힘과 기상을 보는 듯 했다.

 


천상의 집, 전동성당 앞에 서다

 


나는 전주한옥마을에 가는 사람들에게 늘 ‘전동성당(殿洞聖堂)’을 꼭 둘러볼 것을 권한다. 개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에 하나로 천상의 집이기 때문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함을 보여주며 곡선미가 아름답고 거대하며 화려한 건물이다. 호남지역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원래 전라감영이 있던 터로 조선 천주교 첫 순교자 윤지충을 비롯하여 그의 외종형 권상연과 유항검 등 많은 신자들이 참수당한 종교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1908년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중국에서 온 벽돌 제조 기술자 및 건설인부 100여명과 함께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14년에 비로소 외관 공사가 끝났다. 이후 계속 공사가 진행되어 1931년에 드디어 완공되었다.

 

그 해 6월 축성식을 가졌다. 최근에는 영화나 드라마 촬영장, 결혼식 장소로도 각광을 받고 있는 이곳은 내부의 둥근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가 특히 멋스럽다.

 

또한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 돌을 이용한 화강암 기단 위에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 외관과 중앙 종탑을 중심으로 작은 종탑들을 배치한 비잔틴 양식에 뾰족 돔을 올려 웅장함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성곽돌이 마구 쓰인 것이 마음 아프기는 하다.

 

성당 앞의 하얀 그리스도상이 성당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다. 본당의 수호성인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다. 성당 외부에 볼만한 것은 5개의 성상으로 ‘성모동굴 및 성모상’ ‘피에타상’ ‘성모자상’ ‘예수평화상’ ‘한국최초의 순교자상’이 터를 잡고 있다.

 

아울러 성당 옆에 있는 ‘사제관(司祭館)’은 지난 2002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8호로 지정된 건물로 이것 역시 아주 볼만하다. 본당을 세운 뒤 2대 주임신부였던 라크루 신부가 1926년에 건축했다.

 

1937년부터 전주교구청사와 교구장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1960년 이후부터는 주임신부와 보좌신부의 생활공간으로 쓰였다. 3층 건물로 성당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특이한 것은 본당과 같은 북향 건물이다.

 

건물 중앙에는 2층 현관으로 연결되는 주 출입구가 있으며 1층의 출입구는 건물 남쪽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는데 1층 부분은 깬 돌 허튼층쌓기를 하였고 창 주변은 벽돌로 둘러싸여 있다.

 

2, 3층 창대에는 화강석을 설치하였고 창틀 외곽은 벽돌로 리아스식 쌓기를 하여 치장했다. 지붕의 형태는 모임지붕으로 골함석 잇기를 했는데 지붕면 네 곳 중앙에 도머 창을 설치하였다.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가미한 절충식 건물로 조형적으로도 아름다운 외관을 유지하고 있으며, 당시의 건축기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본당과 더불어 역사적 가치가 큰 근대 건축물이다. 부럽다. 멋진 전동성당이 있어 전주사람들이.

 

전동성당을 둘러 본 우리들은 다시 길을 돌아 인근에 있는 전북 김제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전북도지사를 지낸 ‘장현식(張鉉植)선생 고택’으로 갔다. 선생은 1896년 김제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촌 김성수와 친해 서울의 중앙고 설립 당시 거액을 기부했으며, 고려대 설립 당시에도 사재를 기부했다. 이후 동아일보 창간 당시에는 인쇄 장비를 구입할 거금을 희사했다. 1919년 비밀결사인 대동단이 창단되자 운영 자금을 제공하고, 대동신문의 재정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해 3,000원을 제공하여 옥고를 당했다. 해방 후 제2대 전북도지사로 재임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개전 직후 납북되어 북에서 사망했다. 사후인 1989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의 집은 원래 당신의 고향인 김제시 금구면에 1932년에 지은 가옥으로 아드님이신 장홍씨가 지난 2007년 전주시에 기증하여 전주향교 서쪽에 2009년 이축한 것으로 정면6칸, 측면5칸, L 자형 겹치마 팔작지붕으로 안채, 사랑채 등 4개동으로 이루어졌다.

 

1930년대 전통방식으로 건축한 한옥으로, 근대 한옥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특히 미닫이문으로도 활용할 수 있게 고안된 안채의 퇴창문은 보는 재미뿐만 아니라 한옥 대목수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보기 드문 문이다.

 

아울러 목재가공수준이 매우 뛰어나고 정교해 보존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이 집의 사랑채는 임실군의 ‘진참봉 고택’ 사랑채를 옮겨 온 것으로 정확한 건축연도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안채는 용인민속촌 조성 시 매각되어 이축되었는데, 이 사랑채는 이웃 주민이 매수하여 생활해 오던 중 임실군 도시계획에 의한 도로개설사업 당시 철거 예정이던 건축물을 전주시가 인수하여 이곳에 이축했다. 이에 두 개의 집이 하나가 되었다.

 

나는 이축을 하여 새롭게 지어진 건물 같은 느낌이 드는 이 집의 마당에 서서 한참 동안 안채와 사랑채를 바라보았다. 공간의 미학이 아름답고 멋스러운 한옥이다. 따뜻함에 정이 많이 간다. 

 

시간이 되면 며칠 정도는 머물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탐나는 고택이다. 전주 참 좋은 곳이다. 이어 우리는 이웃한 ‘전주 동헌 풍락헌(豊樂軒)’으로 갔다. 음순당(飮醇堂)으로도 불리었으며 전주부윤의 업무공간으로 지금의 전주시청에 대응된다.

 

조선 초에 건립되어 영조 34년(1758년) 전주판관 서노수가 재건하고 1890년 화재로 소실된 후 이듬해인 1891년 전주판관 민치준이 중창했다. 1895년부터 전주군청사로 쓰이다가 1901년 음순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일제가 조선말살정책을 펴면서 1934년 민간에 매각되었다. 당시 동헌을 구입한 전주류씨 집안은 이를 완주군 구이면으로 옮겨 문중의 제각으로 사용했다. 이축 과정에서 아쉽게도 정면 한 칸이 소실되었다.

 

전주시는 풍락헌을 다시 옮겨 오면서 고증을 통해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현재는 정면7칸의 팔작지붕 형태를 갖추고 있다. 동헌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되살리기 위한 전주시의 노력으로 소유주인 류인수 선생이 제각 건물을 2007년 전주시에 쾌척함으로써 한옥마을로 옮겨졌다. 동헌이 전주를 떠난 지 75년만의 귀환이었다.

 

동헌으로 120년 된 옛 건축물로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현판의 풍락헌은 ‘조선왕조의 발상지 풍패지향(豊沛之鄕) 전주(豊)를 안락(樂)하게 하는 집(軒)’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이름인 음순당은 ‘임금의 덕이 마치 가장 순수한 술을 마신 것처럼 모르는 사이에 취해오는 관아’라는 의미다. 

 

동헌 건물답게 웅장하기도 하지만, 주변의 경관이 너무 좋고 역사 및 양반문화체험을 위해 이곳을 찾는 이들이 무척 많아졌다고 한다. 전주시는 현재 이곳을 ‘전통문화연수원’으로 꾸며 숙박은 물론 교육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주한옥마을의 또 다른 볼거리는 조선 중후기 건축물의 특징을 맛볼 수 있는 53개 전라도 향교의 으뜸인 사적 제379호 ‘전주향교(全州鄕校)’ 둘러보는 것이다. 향교는 유학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해 지방에 설립한 공립교육기관으로 고을마다 하나씩 있었다.

 

반대적인 개념은 사립학교인 서원이 된다. 통상 서원은 조선의 성현만을 배양했고, 향교는 중국의 성현부터 봉안한 것이 다른 특징이다.

 

전주향교는 고려시대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창립 당시에는 경기전 근처에 있었으나, 향교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시끄럽다하여 전주성 서쪽 황화대 아래로 옮겼다. 지금의 교동 향교는 조선중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뒤, 관찰사 장만이 터를 잡았다.

 

현재 전주향교에는 대성전을 비롯해 각 10칸 규모의 동무와 서무가 있고, 3칸 규모의 계성사,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인 명륜당 등 16동 99칸 규모로 되어있다.

 

본관인 대성전은 효종 4년(1653)이 고쳐 세웠는데, 융희 원년(1907)에 군수 이중익이 다시 고쳤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이다. 정면 3칸에는 널문을 달았으며, 도리 기둥에 맞배지붕이고, 양합각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명륜당은 광무 8년(1904)에 군수 권직상이 고쳤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이다. 좌우 1칸씩은 눈썹지붕을 이어 달아 꾸몄으며, 전면에는 모두 널문을 달았다. 따라서 눈썹지붕의 도리가 뺄목으로 되어 길게 뻗어 나와 있는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다. 

 

전주향교는 수많은 향교 중에 유일하게 공자를 주벽으로 나머지 4성(四聖), 10철(十哲), 송조 6현(六賢)의 위패를 전부 봉안하고 있다. 또 동무, 서무에는 유약(有若) 등 7인의 성현과 우리의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전국적으로 향교를 복원하는 경우 대부분 전주향교를 기본으로 하여 복원공사를 하는 것은 이곳에 전라도 최고의 수도향교 역할도 했고, 많은 수의 중국과 우리 성현을 모두 배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향교와는 차이가 나는 공간 배치와 구도를 가지고 있다. 명륜당이 대성전 뒤에 있어, 사당의 역할이 더 큰 곳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서적도 많은 이곳 장판각에는 주자대전, 성리대전, 사기평림 등 9,600여 점의 목판이 소장되어 있기도 하다.

 

눈썹지붕에 오래된 건물의 느낌이 강한 명륜당과 주변의 은행나무, 배롱나무 등이 볼거리다. 또한 16동의 건물 하나하나가 맛이 남다른 건축 양식으로 조선 중후기 국가주도 건축물이 주는 특징과 멋을 느낄 수 있어 차근차근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조선선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도래전통한옥마을

 


전주향교를 둘러 본 우리들은 숙소가 있는 나주로 이동하는 버스를 탔다. 나주 도래마을 인근 산포면 산제리에 있는 ‘번영회관’에서 맛있는 토속한식으로 저녁식사를 마친 일행은 다도면 풍산리에 위치한 ’도래전통한옥마을’로 이동하여 숙소에 들었다.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운영관리를 맞고 있는 ‘도래마을옛집’에 짐을 풀었다. 생각보다 집이 작고 많은 인원이 숙박을 하기 불가능한 관계로 전체를 3팀으로 나뉘어 1팀은 안채과 별당에서, 2팀은 이웃집 행랑에서, 3팀은 마을회관에서 숙박을 했다.

 

운이 좋았던 나는 안채에서 잠을 잤다. 안채는 1936년에 지어인 한옥으로 왼쪽부터 부엌, 안방, 대청, 작은 방, 작은 방 그리고 사랑방이 있는 멋스러운 한옥으로 부엌 위에는 안방에서 올라가는 다락이 있고, 대청 옆 작은 방 뒤편은 아담한 창고가 있었다.

 

이집은 1930년대 근대가옥의 독특한 특징을 전부 가지고 있다. 안채 맨 우측에 안채와는 일단 툇마루로 나가야만 갈 수 있는 작은 사랑방이 붙어 있어 안채와 사랑채가 하나가 된 복합형 안채구조다. 또한 안채는 필요에 따라서는 내부공간이 칸살이로 구분되어 있어 크게 혹은 작게도 쓸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 

 

개인적으로 마당 가운데 있는 큰 감나무가 약간 불안정한 구도를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완성미가 뛰어나고 조경이 좋은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당 옆에 있는 상사화며 다른 꽃들이 무척 좋았다. 

 

나는 대청에서 잠을 잤다. 일반적인 마루가 아니라 앞에 문이 있는 마루방으로 3명 정도는 잘 수 있는 곳이었다. 문 앞에는 안채 전체를 연결하는 툇마루가 있어 오갈 수 있어 좋았다.

 

나는 문간채에 있는 세면장에서 세면을 하고는 별당채 마루에 모여 앉아 차를 한잔하면서 같이 온 일행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당은 지난 2006년 한옥을 매입한 다음 새로 지은 건물로 현대식 한옥이다. 앞에 마루와 안쪽에 방과 부엌, 세면장이 있고 바깥쪽에 작은 창고가 두 개 있는데, 현대식이라 손님들이 오면 주로 이곳에 묵고 식사도 한다고 했다.

 

한참 차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나는 안채를 좀 살펴보고는 잠들었다. 80년이 다 된 고옥 마루에서 하룻밤은 약간 춥고 모기도 있었지만, 나름 운치가 있는 멋진 밤이 되었다.
 
23일(일) 아침이 밝았다. 나주 도래마을의 아침 햇살과 싱그러운 공기가 잠을 깨웠다. 나는 세수를 하고는 문간채를 잠시 보았다. 사무실로 쓰이는 방과 부엌과 방 겸용으로 쓰이는 방이 있는데, 상근자 2명이 주로 쓰고 요리도 하는 곳이다.

 

이곳이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지역의 텃밭을 임대하여 농사를 짓고 회원들에게 유기농 친환경 농산물 10여 가지로 마련된 ‘밥상꾸러미’를 매주 발송하고, 다양한 문화체험과 교육프로그램, 한옥숙박체험 등을 하고 있는 현장이다.  

 

다들 먼 길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는 마을 산책을 했다. 나는 집 앞 밭에서 오랜 만에 ‘동과(冬瓜)’를 만났다.

 

동아(White gourd), 압과(鴨瓜)라고도 불리는 동과는 오이과 식물이며, 쉽게 설명하자면 호박과 오이의 중간쯤으로 보면 된다. 열대 아시아산(인도, 베트남, 태국)으로 중국을 통하여 조선 초기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각종 한방 서적에는 가래를 제거하면서 기침을 멎게 하고, 폐농양이나 충수염 등에 소염의 효과가 있으며, 이뇨작용이 뛰어나다고 전한다. 아울러 요리 관련 문헌에는 전이나 무침 등의 다양한 조리법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널리 쓰이지는 않았지만 애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제 강점기에 자취를 감추었던 동과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통상 수확하는 시기인 11월에 50~80kg이 넘는 큰 열매가 농촌의 굶주림을 벗어날 수 있는 작목으로 좋을 것 같다고 하여 적극 재배를 권하였다.

 

그러나 칼로리가 거의 없는 채소라 배만 부르고, 살이 빠지는 관계로 수확을 포기하고 있다가, 지난 2005년경부터 광주시와 제주도 지역에서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다시 재배되어 김치와 샐러드 등의 재료로 많이 쓰이고 있다. 또한 보습효과가 뛰어나 미용, 특히 비누의 재료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작물이다.

 

보통 꽃이 피고 난 다음 10~20일 경에 수확하여 샐러드, 무침으로 먹으며, 씨를 받거나 김치용으로 쓰는 경우에는 11월에 상당히 큰 크기가 되면 수확을 하게 된다. 씨가 단단하고 껍질이 두꺼워 발아에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성장이 무척 잘되는 편이다.

 

동과를 본 다음, 마을 뒤 감투봉 중턱에 있는 ‘계은정’이라는 정자에 올랐다. 계은정은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난 1928년에 세워진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로 중앙에 방이 1칸이며 나머지 5칸은 마루다.

 

지붕 끝에는 1930년대 근대한옥에서 자주 발견되는 양철 처마를 달았다. 난 양철 처마를 보면 근대와 현대가 멋스럽게 만나는 야릇한 공간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6칸 정자는 전라도 지방에서 자주 발견되는 형식이지만, 계은정은 일반적으로 마을 입구에 있는 공동체를 위한 정자와는 달리 인위를 극소화한 작은 연못과 녹음이 짙은 산 중턱 숲속에 자리하고 있어 어르신들의 여름 피서지로 터를 잡은 듯 보인다. 

 

계은정 아래 우측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옛 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땅위에 조성된 연못의 경우에도 통상 사각형을 기본 틀로 잡았다. 허나 이곳은 약간 변형된 사각에 중앙에는 원형에 가까운 조그마한 섬이 있는 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지형을 거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용한 인공연못인 듯하다.

 

별로 크지 않은 좁은 뜰에는 철쭉과 배롱나무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 지붕기와를 교체했는지 오래된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깨끗하고 당당한 기품이 있다. 배롱나무들 사이로 산 아래 마을이 보이고 저 멀리 방풍림과 저수지 등이 보인다.

 

정자를 둘러 본 우리들은 다시 물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와 마을 입구의 ‘양벽정’으로 간다. 양벽정의 문은 왕궁의 큰 대문이 연상될 정도로 특이했다. 목탑 형식으로 2층 구조의 솟을대문으로 되어 있다. 바로 옆에는 작은 화장실이 있다. 가을이라 동백나무의 열매도 보인다.

 

원래 1587년 지역출신의 홍징이가 이웃한 화포에 세운 것을 후손인 홍찬희 등이 지난 1946년에 이건하여 완공한 건물이다. 서향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10칸 규모로 내부는 제실이 3칸, 마루 7칸으로 팔작지붕이다.

 

요즘은 보기 힘든 마루 앞으로 2M 가깝게 내민 처마는 강한 햇살을 차단하고 있고, 시문이 적힌 현판만 20개 가까이 될 정도로 양반들이 시와 풍류를 즐기던 옛 정자의 위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정월 초사흘에 음식을 마련하여 새해를 축하하고 공동으로 세배행사를 연다. 현재 양벽정은 주로 경로당으로 쓰이고 있으며, 어르신들의 계모임을 많이 하는 사교의 장, 풍류의 터전이다.

 

양벽정 앞에는 연못이 있어 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좌표가 된다. 현재의 연못은 보수공사를 많이 하여 원래의 맛을 잃었지만, 마을의 시작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물길을 따라 올라 돌담길을 거닐다 보면 방금 전에 보고 온 계은정에 닿는다.

 

아울러 양벽정 앞에는 ‘영호정’이라는 학당이 있다. 조선 중기 남평 현감을 지낸 휴암 백인걸 선생이 세운 학당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도천학당’ 또는 ‘동학당’이라 불리던 곳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역의 인재들이 과거를 준비하며 독학하던 학당으로 많은 인재와 문사들을 배출했다. 아쉽게도 임진란 이후 그 쓰임을 많이 잃고 있다가 1900년경 ‘영호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반적인 정자와는 다른 학당 건물로 지금도 마을 주민들은 남자만 들어갈 수 있는 배움터로 생각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 학당은 모두 불타고 정자만 남았다. 전후 잠시 초등학교로 이용되기도 했다.

 

조금 길게 아침산책을 한 우리들은 버스를 타고 인근 산제리에 위치한 ‘도래회관’으로 가서 시골백반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꿀맛이다. 된장 맛이 좋았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버스를 타고 나주에 있는 동신대학교로 갔다.

 

 

개발과 보존의 갈등 앞에 서 있는 영산포 지역

 

 

그곳에서 건축공학과 손승광 선생으로부터 ‘역사도시 나주읍성과 개항도시 영산포’에 대한 간략한 강의를 듣고는 바로 버스를 타고 영산포로 갔다.

 

홍어냄새가 물씬 풍기는 영산포에서는 새롭게 생긴 등대 조형물 앞에 큰 주차장이 있어 버스를 세웠다. 바로 앞에 있는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東洋拓殖株式會社 文書庫)’로 쓰이던 건물을 보기 위해, 현재는 찻집으로 쓰이고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1910년대 설치된 동척의 영산포 출장소 사무실 건물 중 일부로 1920년대에 목포로 사무실이 옮겨질 때까지 사용되었던 붉은 벽돌집인 문서고와 가정 집 모양의 숙직실이 남아 있다. 한때는 개인별장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찻집으로 개조하여 외부 손님을 맞고 있다.

 

붉은 벽돌집이 아직도 견고해 보였다. 실재로 찻집 주인이 거주를 하고 있을 정도로 외부는 단단해 보인다. 우측의 숙직실로 쓰이던 건물은 영업장으로 쓰이고 있으며, 이외에도 작은 건물을 몇 개 더 지어 장사하고 있다.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큰 키의 느티나무와 기와집은 어디가고 담장만 남아 있는 마당 구석에 작은 연못도 있어 운치 있는 찻집으로 인기가 높을 것 같아 보인다. 어떤 형태로든 일제시대의 건물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니 다행이다.

 

이어 영산포 등대를 잠시 본 다음 우리들은 홍어거리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일본식 나가야(長屋)를 둘러보았다. 삭힌 홍어의 발상지이기도 한 영산포는 일제의 곡물수탈기지로 역할을 하던 곳이라 강에서는 등대가 있었고, 주변에는 일본식 가옥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특히 우리식으로 보자면 연립주택이나 상가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나가야(長屋)는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었다. 나가야를 보면서 보존과 개발의 문제에 있어 일본식 근대건축물에 대한 보존이 먼저인지, 개발이 먼저인지 고민이 많이 되었다.

 

이미 슬럼화된 이 지역의 재개발은 필수적이지만, 별로 가치도 없어 보이는 낡은 일본식 가옥을 보존하는 것이 맞는지, 철거를 하는 것이 올바른지 고심이 되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신경이 많이 쓰이는 문제인 것 같다.

 

가끔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 60~70년대 도시의 뒷골목 촬영, 사진작가들의 작품 활동 등으로 찾는 이가 있다는 이곳을 여러 생각을 하며 걷다가 길을 돌아 조금 더 갔다. 이어 영산동에 있는 일본인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가옥’ 옆에 선다.

 

구한말 조선으로 건너와 1930년대에 1,100여 정보(町歩)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로 농장은 물론 가마니공장, 전기회사, 운수창고회사 등을 경영하면서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이집은 1935년경 일본에서 청기와를 비롯한 모든 자재를 가져와서 지은 것으로 당시 일본의 고급 가옥보다도 더 최고로 지었다. 아울러 조선의 온돌 같은 건축양식도 약간씩 가미한 2층집이다. 현재 나주시 주도로 홍어의 거리 문화사업의 일부로 전면 개보수공사를 하고 있다.

 

공사가 끝나는 2년 정도 후면 원형에 가까운 모형으로 재탄생할 이 집을 우리들은 허락을 받아 잠시 내 외부를 살펴보았다. 입구의 현관을 지나 복도와 온돌 방, 붙박이 장 등이 있었던 자리가 보였고, 1층 계단은 통하여 2층에도 올라갈 수 있었다.   

 

마당에 있는 일본기와를 보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의 전통기와는 보통 암수가 있어 끼워 넣는 방법으로 시공을 하는데, 일본기와는 가와 상단부에 구멍이 있어 못을 쳐 고정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바람에 취약한 우리기와의 단점을 일본은 못으로 보완을 했다는 것이 놀라운 발견이었다.

 

영산포 지역을 둘러 본 우리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 죽림동에 위치한 ‘나주역(羅州驛)’으로 이동했다. 1913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호남선 철도역으로, 2000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역사이다.

 

1923년 북쪽 벽을 이어 화물 창고를 증축했고, 1970년 일본식 기와를 슬레이트로 바꾸었다. 기쁘게도 기본 구조나 기둥 등의 목재는 건립 초기 상태로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100년 된 역사 건물 치고는 아주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어 보기에 좋았다.

 

나주역은 1929년 10월 30일 일본인 남학생과 조선인 남학생의 편싸움을 발단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의 직접적인 빌미가 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광주학생운동의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 곳이라 의미를 가지고 보았다. 역사를 둘러 본 우리들은 바로 이웃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살펴 본 다음, 점심을 먹기 위해 3대 나주곰탕집인 금계동의 ‘노안집’으로 갔다.

 

얼마 전 이웃집에 갔을 때와 거의 같은 식으로 쇠고기 편육을 넣은 국물에 파와 계란 고명, 고춧가루를 올리고 밥은 따로 주는 곰탕이었다. 앞에 앉은 동신대 손승광 교수에게 내가 약간 짜증나는 말투로 “가능하면 국물만 따로 주고 파와 계란, 고춧가루 등은 별로도 주면 안 되나요? 라고 물었다.

 

“이런 음식이 싫으신 모양이죠? 시장에서 파는 국밥의 개념이라 장을 보러 온 서민들이 빨리 먹고 일을 보기 위해선 따로 주는 양반 식을 바라는 것은 무리지요”라고 대답을 했다.

 

그 대답에 난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내 눈에는 이상해 보이지만, 쇠고기국물에 파와 계란 고명, 고춧가루를 같이 넣어 주는 것이 시장식이구나? 바쁘게 싸게 편하게 먹는 음식이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구미를 맞추기 보다는 전체를 대상으로 간편하게 주는 음식’ 이라는 사실을 비로써 깨달았다.

 

난 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는 군소리 없이 맛있게 곰탕을 한 그릇했다.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잠시 커피 한잔을 하고는 이웃한 일제 강점기의 근대건축인 ‘금남금융조합건물’을 보기 위해 갔다. 1907년 나주에 세워진 금남금융조합의 건물로 193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단층의 벽돌건물이다.

 

휴일이라 내부를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외부에 일본 국화문양으로 추정되는 문양이 여러 개 있었다. 고리대금업을 주로 하던 금융조합은 일제수탈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해방 이후, 나주읍사무소로 잠시 사용되었고 현재는 고조현외과로 쓰이고 있다.

 

이어 ‘나주금융조합건물’이다. 이곳도 1903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이 되는 붉은 벽돌 건물로 2층에 3층은 옥탑 방처럼 작게 올라와 있는 구조이다. 한동안 중국집으로 사용이 되다가 현재는 1층만 옷가게로 쓰이고 2층은 비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관으로 보기에는 아주 잘 지어진 건물로 지금도 약간의 보수만 하면 충분히 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이쁘게 지었다. 개보수를 하여 숙박시설이나 작은 공연장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탈의 기억을 날려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건물로 재탄생하길 기대해 본다.

 

 

전라도 양반가의 기품이 살아 있는 나주 남파고택

 


이어 굽이굽이 돌아가는 나주의 골목길을 둘러보면서, 직선길보다 약간은 굽은 골목길이 더 이쁘고 멋지다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가 찾아 간 곳은 7대째 한터에서 살고 있는 나주의 명문가인 남대동의 ‘박경중 가옥’으로 갔다.

 

‘남파고택(南坡古宅)’이라고도 불리는 이 집은 중요민속자료 제263호로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양반 가옥이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도화선이 되었던 나주역 사건의 주역으로 학생 독립운동가인 박준채가 살던 집으로 당시 일인 학생들에게 피해를 당했던 박기옥은 박준채의 4촌으로 옆집에 살았다.

 

이 집의 구성은 안채, 초당, 바깥사랑채, 아래채, 헛간채, 바깥행랑채, 문간채 등 모두 7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형은 거의 평탄 지형이며 대부분 남향 배치이다. 현재 살고 있는 나주문화원장과 전남도의원을 지낸 박경중 선생의 6대조가 터를 잡은 집이다.

 

원래 1884년에 지은 초가로 출발하여 4대조인 박재규가 1910년경에 안채를 지어 전남에서 단일 건물로서는 최대인 48평 규모를 갖추었다. 관아 건물로 사용할 것을 가정하고 장흥 관아를 참조하여 지은 한옥이기 때문에 개인 주택이지만 관아의 형태로 지어졌다. 

 

이 집은 당시 나주지역 상류주택의 구조가 잘 나타나 있다. 안채를 지은 후 집안에 계속 불운이 겹쳐 1934년에 상량문을 교체하였다고 하며 안채보다는 작은 아래채를 1917년에 건립하여 살게 되었다. 이후 바깥사랑채는 1930년대에 건립되었다.

 

헛간채는 안사랑채를 헐은 재목으로 1957년에 지은 것인데 전체적으로 양철을 지붕과 벽에 시공하여 요즘은 보기 드문 양철집으로 창고로 쓰이고 있다. 다양한 나무 사용법이 돗보이는 팔작지붕 문간채를 들어서면 하인들이 거처로 혹은 마구간, 창고 등으로 쓰이던 초당이 자리하고 있다.

 

아래채는 안채 전면 오른쪽에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바깥사랑채는 안채와 거의 같은 축선상의 맨 앞에 놓여 있다. 바깥사랑채는 현재 임대되어 한정식집 ‘사랑채’로 운영되고 있다. 두 건물 사이는 완전히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고 담장 한쪽에 좁은 문으로 왕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안채는 전후와 좌우로 퇴를 준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처마는 모두 겹처마이다. 모두 4칸 규모로 부엌, 안방, 대청 순으로 배치하고, 끝으로는 앞뒤로 방을 1칸씩 들였다. 이 방은 가장 동쪽의 방으로 신혼부부가 살면서 아침을 가장 먼저 맞는 곳으로 대대로 장손이 결혼을 하면 살게 되는 방이다.

 

집 뒤편에 있는 초당은 전후로 퇴를 둔 일자형 초가집이다. 건넌방, 대청, 안방, 헛간 순으로 꾸몄다. 안방 뒤쪽으로는 골방이 있고 앞쪽으로는 건넌방까지 툇마루를 설치했다. 구조는 막돌로 낮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운 납도리집이다. 기둥 위에는 우미량과 도리를 결구하였으며 서까래가 아주 가늘고 부연을 대나무로 한 초가 우진각지붕이다.

 

이집에는 놀라운 것은 몇 가지 있다. 우선 광주학생운동의 단초가 되는 박준채 선생이 태어나 살던 집이고, 해방 이후에는 고등공민학교를 세워 나주의 근대교육과 사회운동의 산실이 된 점이다.

 

아울러 보통 출세를 하거나 성공을 하면 작고 초라한 집은 허물고 새롭게 큰 기와집을 짓는데, 이곳은 초당을 그대로 두고 앞에 한옥의 안채를 지었다는 점이다. 돈을 벌고 벼슬이 올라도 예전의 모습을 잊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 안채를 지은 다음 집안에 불운이 여러 번 생기자, 다시 작은 아래채나 바깥사랑채를 지어 살림의 규모도 줄여 너무 크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 전국에는 고택의 원형은 많이 남아 있지만, 고택의 부엌은 수리된 곳이 많아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는 곳이 별로 없는데, 이곳의 부엌은 100년 전 그대로라는 것이다.

 

특히 이곳의 아궁이는 한 단계 단을 낮추어 불구멍을 설치하여 불기운이 건물 전체를 타고 올라 갈수 있도록 설계를 했고, 소나무를 오랜 시절 태워서 생긴 부엌 벽면의 그을음은 단순히 검게 보이지만, 100년 된 벽화를 보는 듯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쌀 10가마가 들어가는 쌀뒤주며 집을 건축할 때 사용되었던 도구를 아직도 전부 보관하고 있는 것과 100년 전의 소반, 도시락 통 등 다양한 생활용품도 보관 중인 것이 많다는 것이 나주 양반가의 풍모를 느낄 수 있는 점이다.  
 
햇살이 좋은 날 안채 대청마루에서 차를 한잔 하면서 잠시 쉬어가고 싶은 멋진 집이다. 이어 우리들은 나주객사, 금성관으로 향한다.

 

나주 최고의 볼거리 나주객사와 금성관

 

 

나주에서 가장 볼만한 문화유산은 아무래도 나주읍성의 중심에 있는 ‘나주객사(客舍)’와 ‘금성관(錦城館)’이다. 객사는 고려시대부터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불렸다.

 

일반적인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서 숙박을 하면서 연회도 즐기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이나 중앙관리의 출장 시 숙소로도 이용되었다.

 

나주의 경우 객사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금성관은 한 달에 두 번 한양에 있던 임금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던 제를 올리던 곳으로 쓰였고, 양 옆에 있는 서익헌과 동익헌은 외국사신이나 중앙에서 출장 온 관리들이 머물던 요즘으로 보자면 최고급 국영호텔이었다.

 

나주 금성관은 조선 성종 임금 시절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 내부를 일부 수리하여 군청사로 사용했던 것을 1976년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다.

 

정면 5칸, 옆면 4칸 규모로 팔작지붕의 장엄한 건물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칸의 넓이와 높이가 커서 대단한 위엄이 느껴진다.

 

마치 궁궐의 정전과 같은 규모로 웅장하면서도 근엄하다. 건축 당시에 정문인 망화루도 함께 만들었으나 지금은 망화루의 현판과 내삼문만 남아 있다.

 

임진왜란(1592)때에는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정식을 가졌던 곳이며, 구한말에는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 이곳에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했던 곳이다.

 

나주 금성관은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하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어 특히 유심히 살펴보았다.

 

우리 일행은 모두 나주객사와 금성관의 웅장한 모습에 반하여 한참을 바라보다가 앞뒤를 두루 살펴보고는 우측에 있는 동익헌에 앉아 잠시 쉬면서 가을바람을 맞았다. 참 바람이 시원하고 편히 쉬기 좋은 곳이다. 나는 마치 고급관리가 된 듯 이곳에 앉아 지나가는 구름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객사와 금성관을 살펴본 우리들은 이웃한 ‘나주향교(羅州鄕校)’로 이동했다. 1985년 전남도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된 나주향교는 나주가 호남에서 두 번째 가는 고을이었으므로 향교의 규모도 상당히 컸다.

 

나주향교는 조선 초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 현종, 숙종 때에 중수, 중건이 있었고 대성전도 이때 중수되었다. 그러나 1900년대에 사마재, 수복청, 양사재 등이, 1920년대에 서재, 충복사가, 1952년에는 동무, 서무, 동재 등이 헐리게 되었다.

 

이후 1959년 동재, 서재를 중건, 1980년 명륜당과 동, 서익당 보수, 1981년 담장 개축, 대성전과 동재, 서재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에 따라 아쉽게도 나주향교에는 오래된 건물은 대부분 사라지고, 한국전 이후 복원되기 시작하여 최근까지 복원을 거듭하고 있는 관계로 고풍스러운 기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곳이다.

 

건물 배치는 성균관이나 전주향교, 함평향교와 비슷하게 전묘후학(前墓後學)으로, 앞에 제향을 두는 대성전을 두고 강학을 하는 명륜당을 뒤에 두는 구조다.

 

즉,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강학은 명륜당이라 명명하여 경전학업의 중심으로, 문묘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공자와 중국 및 우리의 선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성전으로 두 부분을 나뉘어 구성되어있다.

 

특히 볼만한 건물은 공자 부친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계성사와 보물 제394호 지정되어 있는 대성전이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팔작지붕건물이며 배향공간의 중심전각이다.

 

다듬은 돌 바른 층 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연꽃이 새겨진 둥근 초석을 놓고 배흘림이 있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건물 내부의 바닥은 장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중국의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의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 건물은 서울문묘, 장수향교, 강릉향교와 더불어 가장 큰 규모에 속하며, 전주향교와 함께 향교건축물의 원형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요즘은 향교 본연의 교육 기능은 거의 사라진 시대라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아울러 지역 주민들을 위한 여름 서당과 전통혼례식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향교를 둘러 본 우리들은 나주 읍성의 일부인 ‘서성문(西城門)’을 잠시 살펴보았다. 고려시대의 작은 성을 조선 초에 확장한 나주읍성은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증, 개축이 이루어져 구한말에까지 그 골격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10~1920년 사이 일제에 의해 4대문과 성벽에 대한 훼철작업이 빠른 속도로 행해졌다.

 

이에 따라 식민통치 건물, 일반대지, 혹은 도로망 등으로 마구 전용되었다. 해방 이후 나주의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훼손이 더욱 격심해져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지난 1993년 나주시와 전남도가 중심이 되어 남문인 남고문(南顧門)을 2층으로 화려하게 복원했다.

 

남고문은 2층으로 된 누각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매우 화려하다. 옆에서 보면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어 옛 나주읍성 대문의 당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지난 2006년에는 동점문(東漸門)이 복원되었다.

 

또 지난 2011년에는 서성문이 복원되어 낙성식을 가졌다. 남은 북망문(北望門)은 오는 2014년까지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이 본 서성문은 전통 성문의 문루와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인 옹성(甕城)등을 기록에 따라 복원한 것이다.

 

특히 우리의 성곽에서는 보기 드문 옹성을 직접 보게 되어 기뻤다. 서울의 동대문에 있는 옹성보다는 작았지만, 깜찍한 것이 조선시대 외적을 무찌르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을 것 같아 보였다.

 

 

 

 

근대 건축물에 대해서는 보수 및 철거 시 허가제가 필요할 듯

 

 

서성문을 보는 것으로 1박 2일 동안의 전주와 나주 여행을 마쳤다. 지역의 근대 건축물들을 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기술로 지어진 건물이 많았고, 구한말 우리의 손으로 건축된 건물도 있었지만, 유지와 보존이 당장의 큰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지금은 초라하고 볼품없는 일본식 나가야(長屋)처럼 보존의 가치가 거의 없어 보이는 건물도 있었지만, 나름 존재 가치가 있고 보존에 의미가 있는 건물의 경우에는 정부가 나서서 매입을 하여 보존을 하던가 시민들이 힘과 돈을 모아 구매를 하는 방법인 내셔널트러스트식의 방법도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그것도 아니면 영국의 경우처럼 정부가 근대건축물을 세금으로 구입하여 관리와 운영은 전문단체인 내셔널트러스트에 위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보였다. 관리의 엄격을 위해 그 처분권은 국회에 위임하는 방법도 처분을 쉽게 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또한 최소한이라도 관리가 필요한 근대 건축물의 경우, 건물수리와 철거에 관한 심사를 엄격하게 하여 허가제를 실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집을 지을 때만 허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보수나 수리, 철거 시에도 반드시 허가가 필요한 제도와 법이 있는 건강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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