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의 대전 여행기
놀랍다! 문화도시 대전의 근대건축물
지난 2012년 9월 8일(토) 당일치기로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대전에 다녀왔다. 대전의 근대건축물을 둘러보기 위해 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근대건축은 1876년 개항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를 말하지만, 대전의 경우에는 일제가 만든 철도도시의 성격이 강한 관계로 1904년 대전역 개역(開驛)부터 시작된다.
본격적인 대전의 건축역사는 1928년 세워진 대전역 신축과 1932년 준공된 충남도청을 기점으로 보면 된다. 조선후기까지 회덕현의 작은 마을이었던 대전이 급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일본인 철도원과 상인들이 터를 잡으면서부터이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이루어지고, 일제의 식민정책이 실시됨에 따라 1914년 대전군 대전면을 설치했다. 경부선에 이어 1914년 대전을 기점으로 하는 호남선이 개통되자 1904년 당시 수십 가구에 불과한 외진 마을이었던 한밭은 급속하게 팽창한다.
이후 철도의 물류기지와 기관차 수리공장으로 급성장한 대전은 1931년 대전읍으로 승격했다. 다시 1932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게 되자 충남의 정치 경제 문화의 요충지가 되었다.
이만큼 대전의 발전은 철도를 시작으로 하여 경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지선, 국도가 분기하는 교통과 물류의 중심으로 성장하여 현재는 과학기술단지와 연구소를 다른 한축으로 발달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거의 파손된 대전의 근대건축물 중에서 아직 남아 있는 몇 개의 건물과 전쟁이후에 지어진 시설들을 보기 위해 우선 시내 중심인 은행동에 소재한 ‘대전시립미술관 대전창작센터’로 갔다.
이곳은 등록문화재 제100호로 원래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충청지원’으로 쓰이던 곳으로 지난 1958년 건립되어 1999년까지 원래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충청 지역의 농산물 품질 관리를 위하여 건립된 관공서로 대전에서 활동한 건축가인 배한구가 설계했다.
출입구는 아치형을 이루며 육중한 철제 문짝과 건물 외벽에 돌출된 상자 모양의 창틀은 추상화된 예술작품의 느낌이 든다. 서쪽의 강렬한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창문 앞에 설치한 수직 철제 블라인드가 매우 인상적이다.
1층의 홀과 방은 사무실과 전시장, 세미나실, 응접실 등의 형태로 개조되어 쓰이고 있었고, 화장실도 현대적으로 손질을 하여 아주 깔끔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모습도 오래된 대리석의 느낌과 육중한 창틀이 주는 멋스러움이 좋았다.
2층 전시장의 경우 천정의 목조 트러스(truss)가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어 운치도 있고, 탁 트여 높이가 주는 여유로운 공간의 미학도 아름다운 곳이다.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과 전시공간으로 충분히 가치를 발휘하고 있는 듯 했다.
이곳 세미나실에서 지역의 근대건축에 대한 짧은 설명을 듣고서, 건물도 둘러보았다. 정오를 지나 점심을 먹기 위해 이웃한 대흥동의 올갱이(민물다슬기)국 전문점인 ‘내집’으로 가서 충청인들이 즐겨먹는 올갱이국과 두부두루치기를 안주로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의 명물인 ‘증약막걸리’를 한잔했다.
내 생각에 대전은 특별히 맛있고 유명한 요리가 없는 것 같다. 대전역의 가락국수가 있고, 장소가 어딘지 기억은 안 나지만 도토리묵밥 정도가 생각난다. 대흥동에는 두부요리와 올갱이국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두부두루치기는 매운 맛이 강해 별로였고, 올갱이는 요즘 태풍과 홍수 피해로 값이 비싼지 된장과 아욱 맛만 강했다.
아무튼 약간 실망이다. 그리고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증약막걸리는 주전자에 일방적으로 담아 와서 용기를 볼 수도 없었고, 맛만 보기 위해 우리들처럼 소량만 마시는 경우 남는 것을 어떻게 처리할까하는 의문도 들었다. 버려야 되는데, 재활용하면 안 되는데(?)하는 걱정 말이다.
심심한 식사와 막걸리까지 마신 우리들은 다시 인근에 1977년부터 30년 가까운 시간동안 여인숙으로 운영이 되다가 문을 닫는 다음, 한동안 도심 속에 폐가가 되어가던 여인숙을 2년 전쯤 임대 개조하여 문화와 예술이 문안(問安)하는 공간으로 탄생시킨 ‘복합문화공간과 여행자를 위한 쉼터인 산호여인숙’으로 갔다.
산호여인숙의 1층은 문화공간으로 전시와 찌라시 도서관으로 운영되는 예술가들의 자유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2층은 예술가들의 숙소는 물론 여행자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로 온돌방과 침대 방을 저렴한 가격에 빌려주고 있다. 물론 간단한 식사도 가능하다고 한다.
대전의 중심인 대흥동에서 산호여인숙은 지역 문화를 리드하는 안내자이자 예술가는 물론 여행자간의 교류의 장으로 역할이 크다고 한다. 나도 서울의 한 모퉁이에서 돈도 모으고 사람들을 모아서 이런 집을 한번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도 한잔 하면서 그림도 논하고 시도 쓰고 책도 읽고 여행자도 받고 길 안내도 하고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공간으로 말이다. 단체로 기념촬영까지 마친 우리들은 바로 이웃에 있는 1944년에 지어진 목원대 전희철 초대 학장의 옛집으로 갔다.
지금은 ‘초록지붕’이라는 작은 레스토랑으로 오래된 집을 개조하여 식당을 하는 모습이 유럽의 시골 레스토랑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입구와 정원에 나무를 좀 더 심었으면 더 분위기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오래된 집이 기분 좋게 바뀌어 있어 음식도 무척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길을 건너 옛 ‘우남도서관’이 있던 자리와 ‘대전 중구청’이 있던 자리 등을 살펴본 다음, 대전여중 옛터로 갔다. 현재는 ‘대전평생학습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곳 본관 앞에서 지난 2007년 5월부터 매달 대전에서 발간되고 있는 문화잡지 ‘월간 토마토’를 만드는 사람들이 주관하는 책 판매 행사장을 잠시 둘러보았다.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매달 문화잡지를 만들고 있는 전사들의 모습도 대단했지만, 여러 책을 팔고 전시하는 행사 또한 발상이 무척 좋아보였다. 난 친구가 대전의 명물인 57년 전통의 ‘성심당’제과점에서 방금 사온 따뜻한 ‘튀김소보로’를 간식으로 너무 맛있게 먹으면서 책들을 살펴보았다.
대전 대흥동 성당에서 만난 강렬한 오방색 벽화
대전에서 발행되는 문화잡지 '월간 토마토‘를 만드는 사람들의 책 전시 및 판매 행사를 둘러 본 다음, 우리들은 대전여중 옛터에 있는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46호인 ‘대전여중 강당’을 살펴보았다.
100평이 조금 넘는 크기인 강당은 현재는 갤러리로 쓰이고 있었다. 1937년에 준공된 박공지붕 건물이다.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작지만 멋스러움이 있는 강당이다.
한국 고유의 초가지붕을 연상하게 하는 아르누보풍의 부드러운 지붕선이 보기에 좋았다. 처마 아래는 고전주의적인 수법인 치형(齒形) 돌려쌓기로 벽돌을 장식하여 처마선을 받쳐주면서도 부드러운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다.
붉은 벽돌로 쌓은 앞쪽과 뒤쪽 벽면에는 정사각형의 넓은 창을 3개씩 마련하여 자연채광을 실내에 끌어들이고 있어 벽돌 건물의 답답한 느낌을 크게 줄였다. 창문 주변의 인방은 벽면보다 들어가게 처리한 뒤 콘크리트로 마감하여 건물이 견고하고 짜임새 있어 보인다.
사방 모서리에는 벽돌을 내어쌓기로 쌓아올려 입체감을 느낄 수 있는 변화를 주었다. 양쪽 측면의 넓은 상부 벽면에는 각각 아치형 창을 설치하여 부드러운 지붕곡선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환기창 역할을 한다. 지붕은 녹색 마름모꼴의 망형 슬레이트로 마감하여 박진감이 넘친다.
단층 건물로 아기자기하면서 독특한 느낌을 주며, 중간에 기둥이 하나도 없어 갤러리로 쓰기에 무척 좋은 곳으로 보였다. 탁 트인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 자유로워 다양한 변화가 가능해 보인다. 방문 당일에는 지역 화가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멋진 그림으로 눈요기를 하는 행운도 얻을 수 있었다.
강당의 외부와 내부의 그림 전시회를 본 우리들은 이웃한 천주교 ‘대흥동 성당’으로 갔다. 1919년에 설립된 대흥동 성당은 1952년 새롭게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1953년 봉헌한 건물이다.
정면에서 보면 키가 무척 큰 키다리 아저씨 같은 형상의 본당 건물은 입구의 철문이 육중하여 하부가 튼실해 보인다. 정면으로 난 크고 작은 창이 좋고, 좌우측 상단 외벽에는 최종태 선생의 12사도 부조상이 있다.
여기에 본당 내부에는 상성규 선생이 만든 14개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예수의 생애를 조각해 놓은 이남규 작가의 14처가 돋보인다.
아울러 프랑스인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통(Andre Bouton, 1914~1980) 신부가 1969년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를 그린 두 개의 대형벽화가 있어 교회미술품이 많은 대전 원도심의 명소로 터를 잡고 있다.
부통 신부가 그린 벽화는 야수파적인 오방색의 강렬한 색채를 주로 사용하여 흰 벽면에 그려진 강렬한 색상은 성당 내부를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원래 10개를 제작했던 벽화는 색이 원색적이고 화려하며 강렬하고 사실적이며 파격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이에 기법상의 문제로 내부 신도들의 논란을 걱정하여 자의반 타의반으로 부통 신부 스스로가 8개는 지워버리고 2개만을 남겨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났다.
시간이 많았으면 차근차근 유리벽의 스테인드글라스와 14처, 12사도 부조상등을 하루 종일이라도 보고 왔으면 좋으련만, 아쉬움을 달래면서 큰 벽화 두 점만을 자세하게 살펴보고는 성당을 나와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대전공회당과 대전시청 건물로 쓰이다가 현재는 외부를 전부 개조하여 그 맛을 잃은 삼성화재 충청본부 건물과 사거리 건너편의 문화원 건물로 쓰이던 갤러리아 백화점을 보고는 중앙시장 방향으로 향했다.
길을 가면서 예전에 은행 건물로 쓰인 듯한 한국투자증권 건물과 목척교를 지나 우리은행 건물 등을 살펴본다. 모두 50년 이상은 되어 보였다. 아울러 최근에 생긴 듯한 목척교의 상층 아치부분도 모양이 특이하여 자세하게 한 번 더 보고는 강을 건너갔다.
이어서 등장한 건물은 대전 지역을 대표하는 근대 건축물로 현재는 안경점으로 쓰이고 있는 등록문화재 제19호인 ‘구 산업은행 대전지점’이다.
일제의 대표적 경제 수탈기구였던 산업은행 건물은 동구 중동에 자리고 있으며 1937년에 1층으로 준공하였으나 1989년 개축하면서 은행건물의 특징인 층고가 높은 영업장을 2개 층으로 분할하여 사용하고 있다.
화강석 기단 위에 상부는 타일, 테라코타로 수평 띠를 둘러 견고하면서 미적인 감각을 살려 마감했다. 그 밑으로 팔각형 기둥을 설치하여 강인함을 강조하였다. 외벽에는 나무줄기 문양의 만주와 독일에서 수입한 화강석과 테라코타 등을 사용하여 간결하면서도 장중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주었다.
건물 전면은 일제강점기 관청 건물의 보편적인 형태인 르네상스풍의 견고하고 근엄한 분위기를 나타내지만 유리창을 더욱 크게 설치했으며 부분적인 장식이 세밀하고 유별나게 화려하다.
나는 언듯 보기에 외부벽면이 전부 화강석으로만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테라코타를 일일이 석회를 발라 부착한 것이 건물의 정갈한 맛을 더하고 있어 무척 좋았다. 측면 일부를 부분 보수를 하면서 색깔이 맞지 않는 곳이 있기는 했지만, 외관상으로는 80년이 다 된 건물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깨끗하여 보기에 좋았다.
대전의 일제 강점기 철도관사촌을 어떻게 유지보존하지?
외부경관이 멋진 등록문화재 제19호인 ‘구 산업은행 대전지점’을 둘러 본 우리들은 인근의 중앙시장으로 이동하여 먹자골목을 잠시 걸었다. 돼지머리와 순대를 파는 가게, 시계 등을 수리하는 노점의 모습, 구제 옷을 파는 가게 등을 재미나게 살펴보았다.
대전의 중심임에도 불구하고, 서울보다는 오래된 미래를 다시 보는 느낌이 좋았다. 특히 다양한 옛날식 순대를 발견하고는 잠시 쉬면서 한 점 먹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마음만 남겨두고 몸은 대전역 동쪽의 ‘철도청 대전지역사무소 재무과 보급창고’를 보러 갔다.
지난 2005년 등록문화재 제168호로 지정된 이 창고는 원래 4동이 있었는데, 작년에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3동을 헐어버린 관계로 현재는 1동만 남아있는 상태라고 한다. 너무도 안타까운 순간이다.
폭이 6~7미터 정도 되고 길이가 25미터는 되어 보이는 100평이 조금 넘는 크기의 창고는 한국전쟁 직후인 지난 1956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 창고는 철도 교통의 중심인 대전의 역사를 잘 말해주는 건물로 철도청의 필요 물자를 이동 보관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현재 외부도 특별히 정비되어 있지 않고, 내부도 텅 비어있는 것으로 보아 사용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 창고는 전후에 지어지기는 했지만 일본과 미국의 기술을 적용한 목조 건물이다. 현재 한국에는 근대 목조 건축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희소가치가 높으며 1950년대 창고 건축물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정면에 문과 창이 각3개 뒤편에 창이 6개, 좌우측에 창이 각1개씩 나있는 건물로 특히 상부와 외부 하중을 분산하고 힘을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는 정비되지 않은(?) 목재 트러스 지붕구조를 가지고 있어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았고 사용이 가능했다.
건물 내부 중간에 기둥을 설치하지 않아 다양한 공간 활용성이 높아 넓고 크게 쓸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보였다. 아울러 외부 마감은 목재 널판을 사용하여 통풍성이 뛰어나다. 아쉽게도 지붕은 석면이 많은 슬레이트로 되어있어 환경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였다.
목조 건물이라 수리하여 다른 용도로 사용이 쉽지 않아 보였다. 지역의 건축가 및 예술가들이 이번 겨울에 노래와 음악 공연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운치는 있을 것 같아 보였지만 공연장으로 적당해 보이지는 않았다.
손방의 어설픈 판단이기는 하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면 석면이 많은 지붕의 슬레이트를 걷어내고, 무겁지 않은 불투명 내연 플라스틱으로 지붕을 교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보였다.
물론 내벽을 따라 철근 골조를 사방에 설치하여 안전성을 더 보강한 다음, 대전의 철도 역사를 알리는 철도박물관 같은 것으로 예스러운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창고를 둘러 본 다음, 우리들은 이웃한 ‘소제동 철도관사촌’을 둘러보기 위해 이동했다. 소제동은 원래 우암 송시열의 고택은 물론 기국정 정자, 솔랑산 등과 소제호수가 있던 작은 마을이었다. 풍광이 좋아 중국 소주의 호수들에 버금간다고 하여 소제호(蘇堤湖)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소제동의 모습이 크게 바뀐 것은 지난 1907년 일본이 이곳 솔랑산 중턱에 태신궁이라는 일본신사를 건립하고부터다. 경부선 철도가 생긴 이후 대전에 터를 잡은 일본인들은 대전역 주변과 지금의 인동과 대동부근에 집단거주를 시작했다.
이들의 거주가 시작되면서 경관이 좋고 일본들이 많이 사는 소제동에 일본신사가 들어온 것이다. 이후 1914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대전은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철도원은 물론 기술자들의 거주가 늘어났다.
이에 대전역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 동쪽에 일본의 철도관사촌이 형성되었다. 현재 남북에 있었던 철도관사는 거의 사라지고, 동쪽에 위치한 소제동 관사촌이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남아있다.
소제동의 철도관사촌은 1920년 초반에 형성이 되기 시작했고, 인구가 늘고 철도원이 많아지면서 소제호를 매립하여 그 위에 1939년에 다시 증설되어 건축되었다.
대전의 역사와 함께 관사촌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해방이 되어 도시가 확장되어 가면서 대전의 중심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소제동을 비롯한 원도심은 상대적인 쇠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 소제동 지역은 대전의 대표적인 슬럼으로 남아있는 상태다.
그러나 소제동은 단순한 슬럼지역이 아니라 철도시대 대전의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문화지구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대전 근대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적산가옥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엄연히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는 근대적 경관이다.
우리들은 길을 따라 40~50채 정도 남아있는 철도관사촌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담장이 높아 내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6~7급 정도 되는 하급 철도원들의 집치고는 규모는 크게 보였다.
이곳의 관사들은 두 개의 집을 좌우가 대칭이 되도록 요즘으로 보자면 연립이나 땅콩주택처럼 짓고 중간에 벽을 두고 같이 쓰는 형태로 건축되었다. 각각의 집이 대지는 100평정도 되고 건물은 각각 25평 정도로 방3개와 부엌, 작은 거실과 화장실이 내부에 설치되어 있는 혁신적인 건물이다.
당시로는 화장실과 세면장이 건물 내부에 있던 것은 조선에서는 놀라운 변화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집의 크기와 구조는 직급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대체로 6~7급의 하급철도원용 관사로 마당이 넓은 것이 좋았다.
대부분의 집 마당에는 언제 심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감나무, 향나무, 석류나무 등이 많았다. 아울러 집 내부의 다락과 외부의 창고 건물이 독특하게 보였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도 많았지만, 현재는 비어 있는 곳도 몇 군데 있었다.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많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관사촌 북쪽에 위치한 42호 관사를 대전시와 목원대학이 공동으로 만든 ‘대전 근대 아카이브즈 포럼’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2012 지역문화컨설팅 사업’의 일환으로 임대하여 사용하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대전 근대유산을 활용한 지역 공동체 문화 활성화’사업으로 연구소와 기념관, 모임 장소, 사진관 등의 용도로 쓰고 있어 누구나 방문하면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었다.
건물의 내부는 일부 수리했고 난방시설도 다시 하기도 했지만, 예전의 모습을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고 있었다. 난 다락과 부엌은 물론 화장실이 마음에 들어 두루두루 살펴보았다. 벽도 두껍고 지붕의 기와도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도 약간의 수리만 더 한다면, 충분히 살 수 있는 공간이고, 멋스러움이 남아있는 터전이었다. 곳곳에 나무도 많고 도로에 차도 많지 않아서 조용히 글을 쓰거나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정말 멋진 집이나 작업실이 될 것 같아보였다.
해방이 되고 1970년대 민간에게 불하된 철도관사촌은 지금은 그냥 일반인들이 사는 주택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대전시와 문화인들의 노력으로 적어도 10여 채 이상은 역사문화적인 가치와 의미를 각인하는 마음으로 수리를 하고 연구하고 공부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노력이 절실해 보였다.
몇 년 전 문경시의 은성광업소 자리에 지어진 석탄박물관에서 갔을 때, 안내원이 광업소관사를 철거한 것이 가장 아쉽다는 말을 하길래, 그때는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 와서 보니 철도관사를 철거하거나 재개발하는 것 보다는 어떤 형태로든 활용하는 방안을 조속히 구상하는 것이 절실해 보였다.
교통 물류도시 대전의 근대건축물 답사를 짧은 시간동안 하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시간이 되면 충남도청과 도지사공관 등 아직도 멋스럽게 남아있다는 대전의 근대건축물을 한 번 더 보기 위해 조만간 대전 여행을 다시 떠나고 싶어졌다.
사진 보기 -----------
http://cafe.naver.com/daipapa/1039
http://cafe.naver.com/daipapa/1040
http://cafe.naver.com/daipapa/1041
http://cafe.naver.com/daipapa/1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