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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봉현면 노좌 2리 행정(杏亭) 이야기

푸른하늘김 2011. 1. 13. 11:20

 


 

 

 

 

 

 

 

 

 

 

 

 

 

 

 

 

 

명 칭 :  행정(杏亭)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노좌 2리
건 축 주 :  진중길(秦中吉, 1308 ~ ?)
소 유 자 :  진홍섭(관리자 : 진홍섭)

건축 이야기
후학 양성을 위해 건립한 행정

풍기 IC에서 풍기 시내 쪽이 아니라 좌회전하여 예천으로 가는 길, 이 길은 931번 국도이다. 한참 한천리(寒泉里) 오르막길을 오르다보면 오른쪽으로는 소백산의 또 다른 줄기 도솔봉이요, 왼쪽으로는 용암산이다.

양쪽 산 아래의 산비탈에 많지 않은 농가들이 듬성듬성 이어지며, 그 비스듬한 산비탈 도처에 사과나무가 즐비하다. 이 재의 정점에서는 풍기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내리막길을 2, 3km쯤 가다보면 봉현면 노좌 1리, 노좌 2리가 높다란 산자락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산골짜기에 터를 잡은 마을임에도 남향의 양지 바른 중턱인지라 하늘 햇살이 더욱 가깝다. 국도를 살짝 벗어나 사잇길로 조금 올라가다가 ‘노계서원’ 팻말을 보고 작은 길로 들어서면 봉현면 노좌 1리 ‘농업인 건강관리실’ 건물 뒤로 공터 안쪽에 어진 사람을 맞이한다는 뜻의 아현문(迓賢門)이 보이고, 그 담장 안에 고풍스런 건물 몇 채가 있다. 노계서원(魯溪書院)이다.

행정(杏亭)은 그 노계서원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아현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있다.

행정은 진중길이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하기 위해 지은 정자로서 잘 보전되어 오다가, 6·25사변 시절 미군이 주둔했다가 후퇴하면서 불을 지르는 바람에 서원은 다 타버리고, 다행스럽게도 정자는 일부만 손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지난 2004년 본래 정자가 있었던 곳에 노계서원을 옮겨 복원하면서, 행정도 부분적으로 다시 보수했다.

 건축 배경
고려 후기 이 마을의 큰 선비 진중길(秦中吉)이 은행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어 행정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호도 행정으로 삼았다. 행정이라는 이름에서 주인이 후학을 가르치는데 뜻을 두고 지은 정자임을 알 수 있다.

 건축 구성
행정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좌우에는 온돌방을 들여 놓고 가운데 칸은 대청으로 꾸몄으며, 사방의 마루는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둘러놓았다.

행정의 뒤쪽, 노계서원 본채 옆에는 사당인 상현사(尙賢祠)를 복원해서 행정 진중길과 추월당(秋月堂) 한산두(韓山斗)의 위패를 모셔 놓고 매년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린다.

현판
행정(杏亭)
행정기(杏亭記)
권연하(權璉夏)가 썼다.
행정중수기(杏亭重修記)
이상호(李祥鎬)가 썼다.

 

누정 이야기
- 노좌리에 자리 잡은 풍기진씨


노좌리는 풍기진씨의 시조인 진중길(秦中吉)이 고려 충숙왕·충혜왕 때 터를 잡았다고 전해온다. 당시 이곳에는 봉황대(鳳凰臺)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아래 은행나무를 심고(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어 나무 아래에 단을 쌓고 틈나면 소요하였다) 행정(杏亭)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자신의 호도 행정이라 했다. 은행나무를 심은 뜻은 성현인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 행단(杏壇)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뜻을 본받아, 진중길 역시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하고자 함이었다.


노좌리는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가구가 풍기진씨인 집성촌을 유지하고 있다. 마을을 에워싼 나직한 산비탈에는 사과농원이나 포도농원이 펼쳐져 있고, 앞산과 마을 사이에는 많지 않은 논밭들이 펼쳐져 있어 안온한 느낌을 주는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산이 깊은 느낌보다는 낮은 구릉으로 이어지되 가파르지 않게 양지에 돋움한 마을이라 오랜 세월을 이어 내려오며 둥글둥글해진 듯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행정 진중길은 그 당시에 은둔해 사는 군자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햇살이 가까운 이곳은 숨어 살았다기보다는, 햇살과 바람과 산을 벗 삼아 초연하게 자연을 가까이 즐기며 살았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돋움한 마을이다. 하기야 뛰어난 학문적 소양과 빼어난 문장 실력, 반듯한 행실을 갖추었으니 당연히 관직에 나가 이 나라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지식인으로서 의무를 다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진중길은 그 의무를 행하지 않고 권리도 누리지 않으려고 초야에 묻혀 산 은둔 군자인 셈이다. 이는 어쩌면 고려 말 당시의 혼란했던 상황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주위 선비들의 칭찬과 우러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달에 초연했던 행정의 주인 진중길. 번다한 수레의 왕래를 마다하고 마을 안에 깊숙이 숨어 글 읽으며 수양하고 후진을 가르치는 것으로 즐거움으로 삼은 깊은 뜻은 당시 사대부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임은 짐작이 가는 일이다.


초여름 한 낮, 마을 한 가운데 자리 잡은 행정을 찾노라면, 농사일을 나가 텅 빈 고요 속에서는 간혹 낮선 이를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와 매미소리가 마을의 정적을 깨곤 한다. 그런데 문득 그 소리가 옛날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처럼 귓가에 맴도는 것 같기도 한 것은 이 정자의 주인인 옛사람이 그리워서일까?


풍기와 예천, 문경을 잇는 도로가 마을 앞을 지나고 있어 옛날과는 달리 그리 외진 느낌도 없고 찾아가기도 쉽지만, 그래도 산골 마을의 안온함은 간직하고 있어 더욱 정겹다.
행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 노좌 1리에 500년 마을 느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어 그 오랜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느티나무 아래에 간단한 운동기구와 긴 의자가 놓여 있어 잠시 쉬어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누대나 정자 같은 건물이 묵묵히 오랜 세월을 이어져 내려왔다면, 마을의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땅 속 깊이에서 뿜어 올린 물줄기로 숨을 내쉬며 끊임없이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가며 자란다.


마을의 나무는 하늘을 향해 자라고, 행정 진중길의 후손들은 세상으로 나가 그 줄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관련인물
- 배출 인물

진중길(秦中吉)
- 학문과 덕망이 뛰어난 진중길


행정의 주인인 진중길(秦中吉, 1308~?)은 학문·문장·행실로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태평통재(太平通載)』·『목은집(牧隱集)』의 기록에 행정의 주인인 진중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진중길은 고려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 때 사람으로 뛰어난 문장과 반듯한 행실로 선비들에게 널리 알려져 존경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함께 공부하여 매우 친한 사이였으며, 과거를 멀리하다가 40세의 늦은 나이에 과거를 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가 그의 어릴 적 친구인 이곡이었다.


그러자 진중길은 “이곡은 어린 시절 나와 같이 공부한 친구 사이이니 내가 설령 요행으로 이번 과거에 급제한다 하더라도, 남들이 이곡이 내가 친구라고 봐 주어 급제했을 것이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과거에 급제하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응시하여 이곡에게 누를 끼칠 수는 없는 일이다.” 하고는 응시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조상의 음덕에 학행(學行)으로 판도정랑(版圖正郞)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했고, 다시 계림판관(鷄林判官)에 제수되어 취임했다가 이듬해에 물러났다. 오품(五品) 벼슬을 지냈으나, 나중에는 벼슬길에 더 큰 욕심을 내지 않고 물러나서 후진양성에 힘써서 그의 문하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본래 옛날에 선비들이 글을 읽고 자기 수양을 하는 것은 대부분 과거라는 제도를 통해 출세를 하고 관직에 나감으로써 자신의 정치적인 뜻을 펴고, 개인적으로는 영달을 하고 가문을 빛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런데 친구에게 폐를 끼칠까봐 그 기회를 과감히 버릴 줄 알았으니, 진중길은 참으로 고결한 성품을 지닌 선비였던 것이다.


훗날 이 고을의 선비들이 진중길의 덕망을 추모하여 1754년(영조 30) 진사 김여필(金汝弼) 등의 상소로 노좌리에 노계사(魯溪祠)를 세워 제사를 올렸다. 정조 때 후손 진영(秦泳)이 임금께 청하여 건물을 증축하고 노계서원(魯溪書院)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던 것이 고종 초에 나라의 국령으로 철폐되었다가, 2004년 풍기진씨 후손들이 조상을 추모하는 뜻에서 정성을 모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 당시 문중에서는 고유제를 올리고, 그 동안의 기록들을 모아 『노계서원지(魯溪書院誌)』를 발간하여 그간의 사정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영주 > 안정봉헌권 > 노좌리

- 진중길의 행정이 남아있는 곳, 노좌리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는 조선시대 풍기군 노좌면 지역으로, 그곳에 노좌면이 있었으므로 노좌·노성·노재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월성·백산돌·대천동·하촌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노좌동이라 하고, 영주군 봉현면에 편입하였다. 노좌리는 1·2·3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1리는 노재이, 2리는 사리미·새말이고 3리는 다리목·추월당·중말이다.


노재이는 노좌라고도 한다. 약 800년 전 마을이 개척되었는데 누구에 의해 개척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앞산 주마산 밑에 마부가 살아 이 마을 이름이 노자(奴子)로 전해져 왔는데, 약 250년 전 이경활이라는 선비가 마을 이름이 상스럽다 하여 노좌로 바꾸었다.


사리미는 고려 말 한추월(한산두, 호가 추월)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당시 뒷산의 형세가 백(白)자 모양이어서 백산동이라 불리다가 조선 말 김경업이라는 선비가 사리미(士林)라 불렀다 한다.


새말은 사리미에서 디리목 마을로 가는 우측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는데, 약 100년 전에 마을이 개척되었다 하여 새말이라 불리고 있다. 추월당은 조선 중기 추월 한산두가 마을을 개척하고 추월당을 짓고 훈학을 하였다 하여 얻은 이름이다.


중말은 상말과 추월당과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로 동네를 양쪽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가 있어 전란 때 피난지로 적합하였다.


다리목은 옛날 자구산과 천부산 골짜기에 약초 캐는 사람들이 산삼을 캐러 왔다가 마을 골 안이 다래끼 같이 생겼다고 다래골이라 했다. 처음 이골을 개척할 당시 다래가 많은 골이라 하여 다래골이라 했다고 하기도 한다.


상말은 옛날 산행길에 가마를 타고 가다 죽은 새댁이 있어 이 길로 가마를 타고 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는 소복재 아래 마을이다. 100여 년 전 산적들이 출몰할 때 이를 피하기 위해 정착한 사람들이 마을이 추월당 위 동네라 해서 상월동이라고도 하였다.
현재 노좌리에는 노계서원과 진중길이 건립한 행정이 남아 있다.

 

출처 : 豊友會
글쓴이 : 시보네/54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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