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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 성북동 걷기

푸른하늘김 2010. 5. 23. 20:49

혜화동, 성북동 걷기 
김수환 추기경, 여운형 선생,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다

 

 

          


지난 4월 말, 서울 종로, 중구 걷기모임은 혜화동과 성북동을 걸어서 돌았다. 그 출발점을 어디로 잡을까 생각을 하다가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가까운 동성(東星)중고등학교 정문 앞에 집결하는 것으로 약속을 잡았다.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운영하고 있는 사립학교인 동성중고는 104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강북의 명문학교로 원래 1907년 서울 서소문 밖 조개골에서 지역주민들의 힘으로 설립된 4년제 초등학교인 ‘소의학교'에서 출발을 한다. 이후 1918년 만리동으로 이전하였으며 1920년 ‘소의상업학교’로 개칭하였다.

 

다시 1922년 천주교에서 인수하고 ‘남대문상업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29년 혜화동으로 이전하여 1931년 ‘동성상업학교’로 개칭하였다. 이후 1950년 현재의 ‘동성중고’로 편제되었다. 아침저녁으로 학교 앞을 버스로 지나는 나는 작년에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의 모교인 구 동성상업학교에서 느끼는 감동이 남다르다.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내 친구인 이 형 선생이 이곳에서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올해부터 학교가 자사고로 바뀌어 가르치기 힘들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돈 없는 나는 아들 연우를 이곳에 보낼 수 없을 것 같아 마음이 더 아프다.      

 

동성고 담장 옆에는 오늘 보니 4.19 기념비석이 보인다. 그 옆에는 대한주권수호기념비가 서 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징병된 어린 학생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늘 이곳을 지나면서도 무관심하게 스치다 보니 오늘에야 두 개의 비석을 발견하고 짧은 목례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년 봄에 완공된 대학로 실개천 시작점의 분수가 보인다. 작은 분수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왠지 인공적인 맛이 너무 강해 나에게는 거부감이 더 큰 것 같다. 실제로 대학로에 조성된 인공개울은 위험천만한 것이, 없는 것만 못한 곳이 너무 많아 예산낭비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분수를 끼고 우측으로 돌면 바로 혜화동성당(惠化洞聖堂)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말년에 머물던 곳으로 1927년에 설립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60년 본당이 있던 자리에 건축가 이희태(李喜泰)선생이 설계해 새로 건립한 강당형 건물이다.

 

직사각형의 화강암 석재로 외벽을 마감했으며 입구 앞에 넓은 홀을 설치했다. 성당 정면 현관 위에는,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조각하기도 한 서울대 교수를 지낸 조각가 김세중 선생의 작품인 화강석 부조 ‘최후의 심판도’가 있다. 또 제대 앞 오른쪽 벽면에는 문학진 선생이 그린 ‘103위 순교 성인화’가 103위 성인 각각의 표정을 특색 있게 그린 작품이다.

 

붉은 벽돌로 쌓은 종탑의 대비를 통한 균형미, 비대칭의 구성 등은 당시 고딕양식의 가톨릭 성당 건축의 정형화된 틀을 깬 양식으로 이후 근대적 성당 건축의 모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사와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다. 안쪽에는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이 보인다.

 

동성중고의 뒤 담장과 혜화동성당의 뒤편에 있는 가톨릭대학의 담장은 서울성곽의 동편에 해당하는 곳으로 성곽답사 시에도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혜화동성당을 나오는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혜화동로타리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고가도로가 있어 앞을 가로 막고 있으면서 교통의 흐름도 방해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현재는 고가도로가 철거되어 시원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사실 혜화동로타리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의미가 있는 곳이다. 1947년 7월 19일 해방정국에서 중도파로 좌우합작을 위해 일하다가 암살된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선생이 서거한 곳이기 때문이다.
 
몽양은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1907년 고향집에 ‘광동학교’를 세우고, 1908년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강릉에 ‘초당의숙’을 세워 민족교육을 주도했으며 일제의 침탈로 학교가 폐쇄되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가 간도의 신흥무관학교를 견학하며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학교를 중퇴하고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발기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의원이 되었다. 1920년 고려공산당에 가입 활동하다가 1929년 제령(制令)위반죄로 3년간 복역하고, 1933년 출옥 이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944년에는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다.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했다. 12월 조선인민당을 창당, 1946년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으나 반대하여 탈퇴했다. 또,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극좌 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에 의해 혜화동로타리에서 암살되었다.

 

그는 광복 직후 대한체육회의 전신인 조선체육회 제11대(1946∼1947)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2005년 3. 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된 데 이어 2008년 2월 2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다.

 

혜화동로타리에서 잠시 여운형 선생을 생각하다가 길을 돌아 혜화동 초입으로 들어갔다. ‘임금의 은혜를 넓힌다’는 의미의 혜화동(惠化洞)은 원래 서울성곽의 동북쪽 끝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성균관이 있어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학생들을 위해 일하던 백성들이 주로 거주하던 곳이다. 

 

혜화동이라는 이름은 서울 성곽 8문의 하나인 혜화문(惠化門)의 명칭을 따서 지은 것이다. 우리 일행은 혜화동 초입 우측에 있는 ‘혜화동주민센터’ 앞에 섰다. 국내 최초의 한옥주민센터로 유명한 곳으로 토요일이라 문이 잠겨있었지만, 가끔 화장실이 급한 경우 방문을 몇 차례 한 적이 있는 나는 이곳이 정말 운치 있고 좋아서 이런 특색 있는 주민센터가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어 길을 좀 더 가면 혜화동에서도 생각보다 많은 외국인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를 많이 발견하게 된다. 인사동과 북촌, 성북동에 이어 혜화동에도 성균관대에 외국인 유학생들과 대학로 등지를 찾는 관광객들이 많아서 인지 외국인 전용의 게스트 하우스가 작지만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그리고 골목 안에 한 동짜리 작은 ‘건양 하늘터 아파트’가 보인다. 작년에 서거한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직전에 살던 빌라를 중심으로 재건축이 이루어져 ‘최상의 자리인 청와대 대통령직에 올랐다’는 의미에서 ‘하늘터’라는 이름을 달아 인기리에 분양된 아파트다.

 

작은 아파트지만 햇살을 잘 받는 남동향이라 터가 무척 좋아 보였다. 역시 대통령을 배출한 곳이라 남다른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감이 드는 곳이다. 비록 노무현 대통령은 세상을 버렸지만, 그 집터만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하늘터로 오랫동안 남길 바래본다.

 

그리고 길을 돌아서 나오면 개량한복 전문점인 ‘돌실나이’의 본사와 본점이다. 이런 곳에 한복을 만드는 회사의 본사가 있을 것을 예상도 못했는데, 작은 건물이 아름답다. 그리고 바로 옆에 ‘경주이씨 중앙종친회’ 건물이 있고 우측 입구에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 회장의 작은 흉상이 보인다. 이병철 회장이 경주이씨라는 사실을 이번에 알게 되어 기쁘다.

 

그리고 우측에 ‘혜화초등학교’다 학교 보다는 학교 앞에 조성된 꽃과 나무, 화초들의 식물 터널이 남다른 곳이다. 아직 봄이라 볼품이 없지만, 녹음이 넘치는 여름이 되면 참 아름답다. 작년 여름 이곳을 지나면서 나는 가족과 이곳으로 산책을 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어서 왼쪽 길을 따라 오르면 제2대 국무총리를 지낸 운석(雲石) 장면(張勉) 박사의 가옥이다. 1937년에 건립된 대지 403.3㎡에 단층 건물 4개 동으로 구성된 이집은 안채, 사랑채, 경호원실, 수행원실로 사용되던 건물들이 한식과 일식 그리고 서양식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형식으로 지어져 있다.  

 

대한민국 건국에 일익을 담당하였던 장면 총리의 발자취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1930년대의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원래 개인 소유였으나 서울시에서 매입하였다. 2007년 등록문화재 제357호로 지정되었다.

 

               


일부러 동북향 집을 지어 저항의 삶을 살았던 만해

 

혜화동의 장면 가옥을 지나 길을 따라 오르면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이다. 이곳은 원래 조선 후기의 문신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살던 집터’이다. 건물 뒤편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57호로 그가 직접 쓴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글자가 암벽에 새겨져 있다.

 

우암은 서인의 지도자로 노론(老論)의 영수였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율곡 선생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은 인물이었다. 청나라를 정벌하려한 효종 임금의 뜻을 받아 북벌을 주창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의 좌측으로 길을 잡아 조금 길을 오르면 ‘흥덕사터(興德寺址)’다. 이 지역은 태조 이성계의 서울집이 있던 곳으로 태종 1년(1401년)에 집터 일대를 희사하여 흥덕사를 창건한 곳이다. 이후 세종 때 불교를 선종과 교종의 두 종파로 통합할 때 교종의 도회소가 되는 등 불교사에 크게 공헌한 절이었으나, 연산군 때 폐사된 후 그 흔적조차 사라진 절이다.

 

절터를 알리는 표지 석 앞에 ‘이곳부터는 누구든 말에서 내려서 걸어서 입장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은 ‘하마비(下馬碑)’가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큰절이었음에 틀림없는 것 같지만, 연산군의 횡포 앞에 절은 사라지고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것이 초라하기도 했다. 하지만 표지 석 만은 또렷하게 남아 손님들을 반기고 있었다.

 

다시 길을 돌아 경신중고교, 서울과학고를 지나면 서울성곽 길에 닿는다. 이곳부터 성북동이 된다. 성북구와 종로구가 이곳에서 갈리고 유명한 ‘서울왕 돈까스’집도 보이고, 좌측으로는 북악산을 오르는 성곽길이 보인다.

 

이제부터 성북동으로 접어든다. 바로 길 앞에 ‘실상선원’이다. 절이기는 한데 인적이 없고 너무 조용하다. 입구에 실상선원이라는 간판과 ‘무의탁노인상담’이라는 간판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스님들의 수도도량만이 아니라 절에서 운영하는 양로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구에서부터 장독이 상당히 많이 있고, 안으로 들어서니 범종도 있고 불상도 있는데, 동전을 잔뜩 부치고 있는 바위가 놀라워 보였다. 무슨 기운이 있는지 아니면 바위에 자기(磁氣)라도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나도 동전을 하나 부쳐볼까 하다가 그냥 사진만 한 장 찍고 나온다.

 

이어 ‘덕수교회’다. 원래 1946년 정동 서학재에서 출발한 덕수교회는 1984년 성북동으로 이전하여 ‘복음의 메아리가 울리고 사랑의 나눔이 풍성하며 화목함이 있는 신앙공동체’ 형성을 위해 힘쓰며 지역사회에서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당일은 결혼식이 있어서 야외에는 식사가 준비되고 있었고, 드레스를 곱게 입은 신부와 턱시도를 입은 신랑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과 하객들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가운데 우리들 일행도 결혼식 직전의 모습을 신기한 듯 사진을 찍으며 살펴보았다.

 

교회를 둘러 본 다음, 교회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이종석 별장’으로 갔다. 별장은 1900년경에 지어진 30평 규모의 작은 한옥으로 사랑채와 안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동북쪽에 안채가, 북쪽에는 행랑채가 위치하고 있으며,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남향집이다.

 

대청 옆 마루에 ‘일관정’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고, 추녀에는 풍경을 달았으며 회색벽돌로 영롱담을 쌓아 집 터 주위를 둘러막았다. 특히 안채로 드나드는 일각대문과 바깥마당의 우물가는 집터 주위의 수목, 마당의 소나무 등과 어울려 예스러운 멋을 풍긴다. 가옥 뒤편으로는 소나무와 전나무로 숲을 이루는 낮은 언덕이 펼쳐져 있고, 안마당에는 소박한 정원이 가꾸어져 있다.

 

지을 당시부터 뱃사공을 시작으로 젓갈장사, 한강에서 오는 목재,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양곡과 해산물 장사 등으로 돈을 모아 마포에서 가장 많은 상선을 소유했던 거상 이종석이 여름 별장용으로 지은 한옥이다. 이 건물은 조선말 거상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하며, 개화기 개량한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한옥양식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서울시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한옥은 ‘소설가 이재준’이 거주하기도 하여 ‘이재준가’라고도 불리기도 하며, 지난 100여 년 동안 여러 명사들의 교육처가 되었고, 여러 문인들이 창작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85년 덕수교회가 인수하여 20년 동안 목사관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덕수교회를 나오면 이웃에 ‘피정의 집 복자사랑’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등의 건물이 보인다. 건물이 참 아름답고 김대건 신부 등의 조각상도 멋있다. 성북동에는 의외로 교회와 절이 많다. 고급주택들만 즐비한 곳으로만 생각을 했던 성북동에 장애인학교도 있고, 수도회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이어서 ‘성북다문화빌리지센터’ ‘성북구립미술관’이다. 돈이 많은 성북동이라 구립미술관도 있구나! 건물도 리폼을 아주 잘했다. 이곳은 작년 11월 옛 성북2동 주민센터를 개조하여 만든 것이다. 

 

다민족 다문화 커뮤니티 공간인 성북다문화빌리지센터는 외국인 상담코너, 카페테리아, 다목적실 등이 있으며, 통번역 지원과 종합상담서비스를 제공한다. 또 한국어교실, 어린이 방과 후 다문화교실, 한국전통문화체험, 요리강좌, 서울생활오리엔테이션, 사진교실, 세계문화강좌, 성북구 문화투어, 전통혼례축제, 외국인이 참여하는 요리, 에세이, 한국어 경연대회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나란히 붙어있는 성북구립미술관은 제1전시실, 제2전시실, 수장고, 프로그램 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길을 다니 나서면 성북동에 유명한 식당 가운데 하나인 ‘금왕돈까스’가 보이고 소설가 ‘상허 이태준 선생의 가옥’을 개조한 찻집 ‘수연산방’이다. ‘문장강화’ ‘무서록’ ‘황진이’ ‘호동왕자’ 등을 쓴 월북 작가 이태준 선생이 살던 집으로 그의 손녀가 국내 최초로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전통찻집이다.

 

집의 규모가 작아 많은 손님이 찾을 수 없는 게 아쉽지만, 본채에는 사랑방, 안방, 마루까지 모두 6개의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당일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아서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지만, 안에서 차를 한잔하면서 담장 너머로 북악산 자락을 바라보면 참 좋을 것 같은 곳이다. 이태준 가옥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어 ‘국화정원’ 같은 식당들을 구경하다가 우리 일행은 ‘만해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머물던 서울시 기념물 제7호 ‘심우장(尋牛莊)’으로 갔다. 심우장은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된다고 만해가 1933년 일부러 동북향으로 지어 살던 집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던 만해는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심우장이란 명칭은 선종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방형 평면에 팔작지붕을 올린 민도리 소로수장집으로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그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보존되어 있다. 만해가 죽은 뒤에도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는데 일본 대사관저가 이 곳 건너편에 자리 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만해 사상연구소로 사용되었다.

 

홍성 출신으로 백담사에서 출가한 만해는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심우장은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좌표가 되기에 충분한 가치와 의미를 담고 있는 작은 한옥으로 특히 동북향으로 터를 잡은 것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 시대의 지식인들에게도 자기의 본성을 찾고자 하는 만해와 같은 반골정신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에 잠겨본다.

 

              

 

법정스님은 가고, 번잡해진 길상사
 


만해 한용운 선생이 살던 성북동의 ‘심우장’을 둘러 본 일행들은 인근의 ‘서울명수학교’ 앞을 지난다. 명수학교는 지난 1968년에 개교한 정신지체 학생들을 위한 특수학교로, 나는 성북동에 장애인 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요즘 같으면 이런 부촌에 장애인학교를 세운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지만, 42년 전 설립 당시에는 성북동도 서울 도심을 기준으로 보자면 약간은 변두리에 조용한 농촌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시인 김광섭 선생의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가 이 무렵에 발표되었으니, 명수학교도 성북동 개발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성북동에서 만난 정신지체 특수학교인 명수학교와의 만남은 성북동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게 하는 놀라운 반가움이었다.

 

명수학교 앞에는 작은 ‘수월암(水月庵)’이라는 암자가 보인다. 아직 봄꽃이 좋아서 벚꽃 구경을 위해 잠시 암자로 들어가 사진을 찍고서 돌아 나온다. 작은 암자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좋았다.

 

수월암의 벚꽃을 뒤로 하고 ‘길상사(吉祥寺)’로 간다. 사실 길상사에 가면 시인 백석(白石)과 그의 연인이었던 김영한 여사가 먼저 생각이 난다. 평안도 정주 출신으로 평안도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지방적 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한 백석은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를 많이 발표했다.

 

삼각산 자락인 성북동에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했던 백석의 옛 연인 김영한(법명 길상화)은 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법정(法頂)스님의 ‘무소유’에 감동하여 자신의 전 재산을 송광사에 시주하고 떠났다.

 

승려이자 수필작가인 법정스님은 1997년 12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길상사의 회주(會主)로 주석했다. 지난 3월 법정스님이 이곳 길상사에서 입적한 이후 절은 더욱 붐비는 곳이 되었다. 그의 저서인 ‘무소유’ ‘오두막 편지’ 등의 책이 동날 정도로 팔려나갔고, 절을 찾는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마음으로 종교에 관계없이 많은 것 같다. 
 
우리 일행도 석가탄신일 준비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으로 절 내부를 이곳저곳 살펴보고 내려왔다. 아쉽게도 법정스님에 대한 추모열기로 오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전의 고요함을 한동안 찾아보기 힘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상사를 둘러 본 다음, 길상사 조금 위쪽에 있는 독일대사관저 앞에 위치한 ‘정법사(正法寺)’로 향한다. 성북동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정법사는 예전에 복전암(福田庵)이라 불리던 작은 암자였다. 1960년 석산스님이 가회동에 있던 건봉사(乾鳳寺)의 포교당을 옮겨오며 대웅전을 세우고 정법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 서대문에 있던 황태자궁을 이전하여 온 것으로 2004년에 중수한 것이고, 내부의 석가모니불, 지장보살, 관음 등의 불상과 1918년에 그려진 열반도, 후불탱화, 현왕탱화 등이 있다.

 

지하에는 영구위패를 모시는 극락전이 있다. 미륵신앙을 중히 여기는 사찰임을 잘 드러내주는 석조미륵불입상은 1975년 조성되었다. 사천왕문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범종루와 산신각, 팔상전, 3채의 요사채가 있다. 성북동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너무 고즈넉하여 며칠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법사 인근에는 아직 개관을 준비 중에 있는 ‘한국가구박물관(韓國古家具博物館)’이 있다. 전통 목가구를 중심으로 옹기 유기 등의 전통 살림살이를 전시하는 전문박물관으로 소장품을 안방 사랑방 부엌용품으로 구분한 방과, 먹감나무 은행나무 대나무 소나무 종이 등의 재료별로 구분한 방, 지역별로 분류한 방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이어 ‘성북동 성당’으로 향한다. 1980년대 조성된 성북동 성당은 인근의 혜화동 성당이 규모가 커지자 분리되어 나와 현재에 이르는 곳으로 작지만 참 운치 있고 멋있는 성당이었다. 붉은 벽돌과 마리아상, 소나무, 향나무 등이 인상적이다.   

 

이어 고종의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한 정원인 ‘성락원(城樂苑)’으로 향했다. 현재는 공사 중이라 내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내년 정도에는 다시 개관이 된다고 한다.   
 
성락원은 조선시대 민가의 별장으로는 서울에 남은 유일한 것이다.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있는 전원(前苑), 영벽지(影碧池)와 폭포가 있는 내원(內苑), 송석(松石)과 못이 있는 후원 공간 등 자연지형에 따라 조원된 세 개의 공간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서쪽 암벽에 있는 추사 김정희의 ‘장빙가(樟氷家-겨울에 고드름이 매달려 있는 집)’라는 글씨와 송석정의 지붕을 뚫고 서 있는 노송이 인상적인 곳이라고 한다. 
 
닫혀있는 성락원을 뒤로 하고 ‘선잠단지(先蠶壇址)’로 이동했다. 조선의 왕들이 선농단(先農壇)에서 농사와 인연이 깊은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으로 모시고 풍년을 기원했다면, 왕비들의 소임 중에 하나는 친잠례(親蠶禮)를 지내는 일이었다. 누에를 키워 고치에서 실을 뽑아 방적하는 일은 중요한 생산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양잠을 크게 장려하여 각 도에 뽕나무를 심도록 하는 한편, 잠실(蠶室)을 지어 누에를 키우게 하였다. 그리고 잠사가 생산되면 국가에서 엄밀히 심사하는 것을 제도로 삼았다.

 

농업 국가였던 조선의 왕들이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농사의 소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의식을 행했고, 왕비들은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하여 달라는 기원을 드리고자 선잠단을 지었다.

 

단에는 대를 모으고 중국 황제의 왕비인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의 신위를 배향하였다. 단의 남쪽에는 1단 낮은 댓돌이 있는데 그 앞쪽 뜰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다. 현재는 성북초등학교 옆 길거리에 여러 집들에 둘러싸인 조그만 터전만 남아 있다.
 
선잠단지를 둘러 본 우리들은 나폴레옹제과 방향으로 길을 내려 온 다음,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인근의 칼국수와 수제비를 잘하는 작은 식당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한 다음,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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