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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선생의 대종교 나철 교주 평전. 김수종 작가
푸른하늘김
2021. 6. 20. 12:01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이 직접 쓴 대종교 ‘나철평전’
지난 수년간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을 돌아다녔다. 망우리공원에 잠들어 있는 7,000여기의 묘소 중에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묘소가 많다. 그 중에 문일평, 지석영, 박찬익 같은 분이 단군교(대종교,大倧敎)신자였다.
차츰 대종교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증조모님의 친정 가족인 김좌진 장군이나, 이상설, 이동녕, 신규식, 홍범도 장군, 백산 안희재, 정인보, 홍명희, 김규식, 조소앙, 김승학, 박은식, 신채호, 손기정, 안창남 등등 수많은 애국지사,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 신자임에 놀랐다.
아울러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1918년 무오독립선언은 대종교 인사들이 중심이었고, 대종교 신봉자 조소앙 선생이 집필했다. 이들은 선언문을 통하여 “정의의 칼로 나라를 훔친 적을 도결(屠決-죽이고 갈라놓다)하여 운명을 개척하자”고 ‘육탄혈전’을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대종교의 육탄혈전의 맥을 계승한 북로군정서는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일구었다.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한 세력의 대부분이 대종교신자들이었다. 또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의원 35명 중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일제 강점기 30만 명에 이르던 대종교 신자들은 대부분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싸웠고, 대부분 연해주와 만주에서 산화하여 화장되어 목단강, 두만강, 만주벌판에 뿌려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현재 대종교 신자는 4천여 명 내외로 초라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연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사 4,776명 가운데 종교계는 202명이었으나, 대종교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나철평전’에 따르면 국권이 피탈되고 일제에 강점된 후 무력한 민중 앞에 대종교를 중광(重光)한 나철이 단군의 사상과 철학을 종교의 모습으로 가지고 나타났다.
그가 주창한 철학은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의 정신이다. 홍암 나철은 과거에 급제하여 잠시 관직생활을 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세 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가 궁성 앞에서 단식농성을 했다.
조선침략의 원흉들에게 흉계를 중단할 것을 엄중하게 힐책했다. 귀국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10년 유배형에 처해졌다. 특사로 풀려난 후 도일하여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침략을 규탄하고, 숙소에서 단군교의 영계(靈戒)를 받는다.
서울로 돌아와서 단군교를 대종교로 중광했다. 단군을 숭상하는 전통적인 단군교를 단순히 개명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면서 역사적, 사상적인 이론으로 새롭게 중광한 것이다. 1910년 국치 직전 만주에 대종교 포교활동과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다.
국치 이후에는 망명하여 백두산 기슭 청파호 인근에 교당을 설치, 본격적인 포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대종교 활동을 독립운동과 연계했다. 『신리대전』, 『삼일신고』 등 대종교의 경전을 저술하고, 국학의 뿌리인 한글 사용 등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54세 되는 해(1916년) 음력 8월 15일 단군교의 성지 구월산 삼성사에서 대종교의 제천 의식인 선의식을 올리고 유서를 남긴 채 순명한다. 신채호, 정인보, 문일평 등 민족사학의 뿌리는 대종교의 ‘텃밭’에서 기원하며 김좌진, 홍범도 등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 신자다.
따라서 대종교는 우리 민족사학과 독립운동의 텃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종교의 북로군정서는 육탄혈전을 통해 봉오동전투의 승전과 청산리대첩을 이루어냈다. 뿐만 아니라 국어(임오교변, 말모이운동, 조선어학회), 역사와 국학(신채호, 박은식, 정인보)자가 많다.
또 임시정부(신규식, 이동휘, 조완구, 조소앙, 박찬익), 문화(홍명희, 나운규), 경제(안희제) 등 독립운동의 전 영역에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대종교와 민족사학은 비슷한 시기에 상보관계를 유지하면서 작동한다. 그리고 일란성 쌍둥이처럼 발전한다.
민족사학은 국난기 한민족의 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했다. 출중한 민족사학자 대부분이 대종교 교도이거나 관련된 인사들이다. 박은식, 신채호, 안재홍, 정인보, 문일평 등이 이에 속한다. 대종교 교도인 서일을 단장으로 채오 등이 중심이 되어 무장독립단체 중광단을 조직했다.
우리나라 중국 동북지역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효시가 됐다. 대종교가 간도 각지에 세운 학교는 단군신앙과 민족교육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모태 역할을 했다. 북간도 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은 이렇게 육성된 청년들에 의해 전개됐다.
1919년 만주 지역 만세운동, 1920년 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뒷날 강력한 무장독립운동 단체로 발전한 대한정의단 등은 대종교인들이 중심이었다. 대종교인이었던 주시경은 어느 독립운동가 못지않은 애국자이고 ‘한글’이란 이름을 창안한, 세종대왕의 후계자라 하겠다.
한말 격변기부터 일제강점 초기 민족수난의 시대에 언론인, 계몽운동가, 교육자, 국어학자로서 ‘한글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이 있었기에 한글과 국어가 지켜질 수 있었고, 널리 보급되어 오늘에 이른다.
언론인, 민족사학자, 독립운동지도자로서 큰 역할을 한 박은식은 『한국통사』, 『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저술로도 일가를 이룬 대종교인 박은식은 대종교를 단군의 신교를 받드는 ‘역사적 종교’라고 했다.
〈황성신문〉 논설위원과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날카로운 필치로 항일구국논설을 집필했던 단재 신채호는 1914년 서간도로 망명하기 이전에 이미 대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대종교 계통의 학교인 동창학교에서 한인 청소년들에게 한국사를 교수했다.
또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애국심 고취와 계몽을 겸한 국사교재로 『조선사』를 집필, 간행했다. 대종교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예관 신규식은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손문이 이끄는 중국동맹회에 가입하고 무창봉기에 참가하면서 중국혁명 지도자들과 친교를 맺었다.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조소앙, 여운형 등과 동제사를 조직한데 이어 1915년 대종교의 핵심인물이었던 이상설, 박은식 등과 대동보국단을 조직했다. 나철과는 의형제로 지냈고 대종교 최초 시교사(施敎師)를 역임한다. 일제는 경술년 병탄 이전부터 대종교를 괄시했다.
“대종교는 국조 단군을 숭봉하는 교단으로 민족의식을 환기하고 일정에 반발하며 대중으로 하여금 대일 적개심을 고취하고 민족적 혈통을 고수하야 국권회복의 선봉기수”라고 했다. 나철을 포함한 대종교 신도들은 대단히 검소하고 서민적이었다.
나철의 ‘홍익인간’이념에는 유교의 충효사상이나 인애사상, 불교의 자비사상, 도교의 무위화사상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애, 호혜호조, 인도주의, 평화애호사상이 담겨있다. 대종교도들은 지금도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신봉하면서 민족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철평전(도서출판 꽃자리)’을 쓴 김삼웅 선생은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다. 〈대한매일신보〉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4년여 동안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역사·언론 바로잡기와 민주화·통일운동에 큰 관심을 두고,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 등 이 분야의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저서는 『역사의 절망을 넘어』 『김남주 평전』 『10대와 통하는 독립운동가 이야기』 『3·1혁명과 임시정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