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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남춘역/이종모

푸른하늘김 2021. 6. 14. 17:53




가수이자 배우였던 남춘역(南春驛)의 본명은 이종모(李鐘模)다. 1923년 군산시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군산 흥남동과 선양동의 움막집에서 가난 속에 성장했다. 1941년 봄. 태평레코드사는 신인가수를 선발하기 위한 가요대회를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태평레코드사 문예부 선전담당인 천아토(미술을 전공한 작사가)씨는, 이러한 내용의 선전포스터를 만들어 전국 배포했다. “그늘에 숨은 인재들아 참된 예술은 천재들이 가져갈 권리가 있다. 여기 진정한 가수의 등용문이 열리고 있으니 나오라! 등용하라! 그리고 목격자가 되라!”. 

당시 가수지망생은 태평레코드에서 취입된 노래 중에 지정곡 한 곡, 임의 자유곡 한 곡을 선택하여 참가를 준비했다. 군산예선을 준비하던 태평레코드사 직원 숙소였던 군산 금학여관에 이종모라는 18세 소년이 찾아왔다. 

문예부장이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니 그 소년이 하는 말이 “나는 철공소에서 선반공 일을 하고 있는데, 가요대회에 참가할 돈이 없어 극장에는 못가니 여기서 제 노래를 좀 들어 달라”고 애원했다. 

하도 사정이 딱해서 “그래 그럼 한번 불러보라”고 했더니 그때 유행했던 일본가수 기리지마 노보루(霧島 昇)가 부른 ‘니이즈마 가가미(新妻 鏡)’란 노래를 너무 잘 불러 일행은 그날 밤 극장 무대에 출연시켜 그 소년에게 군산예선 1등상을 주었다. 

당시 가요콩쿠르 심사는 엄격했다. 박자, 음정, 발성, 태도, 마이크, 적성 등 14가지나 되는 까다로운 기준이 있어 통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명의 선반공이 1등을 한 것이다. 얼마 후 신인가수 30명 후보들의 최종 결선 무대가 서울에서 열렸다. 

이곳에서 이종모는 1등인 '레코드예술상'을 차지했다. 정식가수가 된 이종모는 일본으로 건너가 첫 데뷔곡인 이재호 작곡 <그림자 고향> <왕모래 선창>을 취입한다. 그때 가수 진방남 씨가 이종모에게 남춘역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남씨에게 가수 진출의 기회를 제공해준 작곡가 반야월씨는 훗날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1등을 차지하고 군산에서 낯익었던 심사위원들 앞으로 다가와 '꾸뻑' 큰절을 하고는 씩 웃는 폼이 꼭 연극배우 같았다"며 "아니나 다를까 그는 결국 가수로는 크게 빛을 못 보고 연극을 하다가 배우가 되어 구수한 서민역을 잘해냈다"며 추억을 더듬는다. 

남춘역의 가수인생은 시작부터 쉽지는 않았다. 전국 1등상을 들고 군산에 내려오니 와병 중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쟁이놈'이라며 멸시했다. 남춘역은 아버지의 홀대 속에 고향을 찾은 떠돌이악단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극단 황금좌에 가수로 정식 입단했다. 

그곳에서 천생배필도 만난다. 세 살 아래 소녀(김용희)와 사랑을 속삭이다 결혼했다. 일제 말엽에는 만주 신경의 <신태양악극단>에서 활약하는 등 가수로 전전했다. 1947년 4월 스스로 악극단을 조직해서 창립공연도 하고 단장으로 활동했다. 

악극단 이름은 자신의 예명을 따른 <南春驛>. 이후 기록이 없고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일찍 흥행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황금좌 이외에도 약초악극단, 대중극회, 상록극회 등을 거치며 배우로서 무대생활을 시작했다. 

민경식 감독의 <태양의 거리>(1952)를 통해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1952년부터 1963년까지 단역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노인 역할로 명성을 얻었지만, 주로 뱃사공, 웨이터 등 단역을 전전해야 했다. 

하지만 연기의 꿈은 버릴 수 없어 이해랑, 김승호 등 당대의 연극인들과 함께 ‘극단 신협’에서 활동했다. 이해랑은 남씨의 연기스승이었다. 1959년 정치깡패 임화수가 희극배우 김희갑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주먹과 발길로 짓이겨 늑골 세 대가 나가는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옆에는 당시 잘 나가는 배우가 여럿 있었으나 누구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고, 남춘역과 주선태가 꼬꾸라지는 김희갑을 부축해서 병원으로 옮겼다. 이를 항상 감사하게 생각했던 김희갑은 훗날 자서전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남춘역은 암울했던 시대에 태어나 불혹을 막 넘긴 아까운 나이에 이승을 하직했다. '쟁이놈'은 안 된다며 강력하게 반대하던 아버지와 따뜻하게 감싸주던 누님과 형제들을 뒤로하고 상경하여 연예인이 되고, 예명을 사용한 것에 자괴감을 느껴서일까. 남씨는 숨을 거두기 전 간호사에게 "내 본명이 이종모네!"를 세 번이나 되뇌었다 한다. 

1963년 8월 24일 자 <동아일보>에 영화배우 남춘역씨가 요독증과 기관지천식으로 성모병원에 입원치료 중 그날 상오 11시 50분경 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사망당시 나이는 마흔한 살이었다. 

신문은 "남씨는 18세 때 연예계에 들어가 23년 동안 가수와 영화배우 생활을 해왔으며, 유가족은 부인과 5남매가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세상을 뜨기 1년 전 극단 신협 재기공연 <갈매기떼>에 19세 소년으로 출연하는 등 열정이 대단했다. 

그는 <울고 간 사랑 5백 리> <상해의 밤> <구두닦이> <다시는 놓지 않으련다> <청춘 12열차> <두만강아 잘 있거라> <초립동> <어느 여대생의 고백> <현해탄은 알고 있다> <마부> <지게꾼> 등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비록 단역, 조연배우였지만, 죽음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연기를 지도해준 이해랑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배우들이 빈소를 찾아 애도했다. 장례식은 배우협회장으로 치러졌고, 요절을 슬퍼하는 행렬이 종로거리를 메웠다고 전한다. 

김수용 감독은 신문 칼럼에서 "지난여름 남춘역씨와 같은 선량하고 진실한 연기인을 잃은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고 회고했다. 사망 전 촬영을 끝낸 10여 편의 영화가 사후에도 하나씩 개봉되어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악극단출신 영화배우로 불우한 환경에서 도전과 실패를 거듭했고, 무명가수로 조연배우로 연예인 생활을 마감했지만, '이름 없는 명배우'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사후 1963년 12월 제1회 청룡영화제에서 특별연기상을 수상했다. 

1964년 3월에는 <부산일보>가 주관하는 제7회 부일영화상에서는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묘소는 망우리공원 건너편인 딸기원 안쪽 남향 터에 자리하고 있다. 



참고자료: <디지털군산문화대전> <오마이뉴스> <스포츠동아> <한국영화데이타베이스> <통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