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망우리공원에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의 영웅 현봉학의 이름이 적인 묘비가 있다. 김수종 작가 daipapa@hanmai.net
서울 망우리공원에 한국전쟁 당시 흥남철수의 영웅 현봉학의 이름이 적인 묘비가 있다.
글:김수종 작가 daipapa@hanma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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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서울 망우리공원에 ‘한국전쟁 흥남철수 영웅 현봉학’ 묘비 있다!
현요한묘비. ©브레이크뉴스현요한 묘비. ©브레이크뉴스현요한 묘비. ©브레이크뉴스현요한 묘비. ©브레이크뉴스 지난4~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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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5월 민간 문화재청+환경부를 합한 성격의 NGO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이은희:이사장)는 서울 중랑구청의 의뢰를 받아, 망우리공원(망우리묘지공원,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대한 묘지 전수조사사업을 수행했다.
6~7명의 연구위원들이 10회 넘게 구역을 나누어 망우리공원 전역을 둘러보았다. 기존에 알고 있고 자료가 남아있는 묘소는 물론, 묘비는 있지만 무덤이 없는 곳도 비석연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 조사를 통해 서예가이며 사진작가인 김00 선생, 독립운동가이며 한글학자였던 신00 선생, 한반도와 만주를 오가며 활동했던 변00 목사, 서울대 교수였던 식물학자 장00 선생과 같은 분의 묘소 혹은 묘비를 새롭게 확인하는 성과를 냈다.
장안에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부터 이름 없는 범인들까지, 독립운동가부터 친일파까지 공생하는 공간인 망우리공원에는 아직 7,000정도의 묘소가 남아 있고 이중 60여분의 유명인사 무덤이나 묘비가 남아있다.
다들 대단한 무덤을 찾아다닐 때 나는 평범하게 살다간 사람들의 무덤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 22일(토) 조사 시에는 망우리공원 초입에 있는 이중섭 화백과 독립운동가 서동일 선생의 묘소 중간쯤에 있는 ‘현요한’의 묘소를 찾았다.
묘비 전면 왼쪽에는 십자가가 보이고, 우측에는 ‘현요한 자는 곳, 1932년 남~1950년 잠’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처음 묘비를 본 사람이면 대부분 한국전쟁 직전에 어렵게 5년제 중학교를 졸업했거나,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 아쉽게 죽었다는 것을 짐작하는 정도로 스치는 무덤이다.
그런데 묘비 뒷면을 보면 갑자기 눈물이 난다. “어여간 나의 마음/가르어간 나의 몸/어이고 가르니/가는 곳 그 어딘가/영화롭다 주 계신 곳/아버지 가신 곳/요한아!/계서 편히 쉬니/설레던 마음 맑아진다/엄마”
현요한의 자당어른이 먼저 간 막내아들을 그리며 쓴 비문이다. 3번째 줄에 ‘어이다’는 ‘에다’라는 말로 ‘칼 따위로 도려내듯 베다.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다’라는 말이다. 참척지변(慘慽之變)을 당한 어머니의 마음은 창자를 도려내는 아픔일 것이다.
나도 글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다. 비문 글을 현대적으로 다시 해석하여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한 마음 같은 내 마음에서 베어지고, 한 몸 같은 내 몸에서 갈라졌구나. 그렇게 하여 네가 떠나간 그곳은 어디인가. 영화롭구나. 주님이 계신 곳, 아버지가 먼저 가 계신 그곳이구나. 요한아!, 그곳에서 편히 쉴 터이니 어수선했던 내 마음이 가라앉는구나. 엄마”
묘비 뒷면 비문은 읽을수록 눈물이 나는 명문이다. 이것이 어미의 마음이요. 진실한 삶의 언어다. 그리고 묘비 좌측에는 ‘아버지 현원국, 어머니 신애균’의 이름이 보인다. 과연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부친 현원국 목사는 함경북도 함흥 영생고녀 교목을 지냈다. 유명 목사로 말씀이 좋아 서울을 오가며 여러 곳에서 자주 설교를 했다고 전한다. 모친 신애균 여사는 독립운동가로 한국 장로교 여전도회장(1946년, 14대)을 역임했다.
묘비 우측에는 ‘1950년 6월 10일 언니 봉학 세움’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여기서 언니는 형의 서울말로 주로 중부지방에서 남자형제들이 사용하던 말이다. 바로 이 묘비를 세운 사람이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던 청년의사 현봉학이다.
현봉학은 함경도의 명문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다. 해방 후 가족과 함께 월남했고, 1947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일했다. 이후 미국 버지니아주립의과대학에 유학, 임상병리학 과정을 수료했다. 1950년 3월 귀국해 모교인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모교에서 청년의사로 살고 있던 현봉학의 막내 동생 요한이 사망한 것이다. 이후 한국전쟁. 1950년 10월부터 의사가 아니라 고급 영어를 잘해 통역 문관이 되어 10군 사령부 민사부 고문으로 일하게 된다. 흥남 철수 작전에서 알몬드 10군 사령관에게 북한주민 승선을 요청해 수만 명을 군함에 태우게 해 한국판 모세의 기적을 이룬 전쟁영웅이다.
좋은 부모의 노력 덕분인지, 현봉학의 살아남은 형제는, 윤치호의 사위로 목사이며 세계적인 민중신학자로 이화여대 교수로 해방신학을 가르쳤고 민주화운동가로 활동했던 형 현영학이 있다. 동생은 1946년 해군병학교 1기로 임관, 6.25전쟁에 참전했고, 해군소장으로 퇴임하여 외교관으로 활동한 전쟁영웅 현시학이다. 그 아래 동생은 미국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현웅(피터 현)이다.
아쉽게도 현요한 무덤은 지난 4월 가족묘가 있는 경기 북부로 이장됐다. 4월 중순 묘지조사를 하던 도중 묘도 비석도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이곳저곳을 수소문했더니, 현웅(피터 현)의 부인이 “최근 막내 시동생 요한님의 묘소를 가족묘로 이장했다”고 알려주었다.
묘를 이장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묘비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관계로 공간에 대한 기억까지 훼손되는 상황이라 정황을 말씀 드렸더니, “묘비는 땅 속에 묻었다”라고 했다. 양해를 구해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비용을 들여 땅 속의 묘비를 다시 올려 세웠다.
22일 오후에 방문하여 다시 세워진 묘비를 확인했고, 나중에 묘터를 새롭게 정비하면 아쉽지만 나름 의미 있는 터의 기억과 묘비에 관한 기록을 되새길 수 있을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사실 유럽에서는 집을 지을 때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철거 시에도 50~60년 이상 오래된 집의 경우에는 허가를 받아야 한다.
집에 관련된 역사와 인물에 대해 조사하고 그와 관련된 일이나 사건이 있으면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철거하지 않고 수리만 허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명 시인의 집이나, 화가 혹은 정치인의 집을 함부로 철거하는 것을 금하지 때문이다. 역사문화적인 자료가 되면 정부차원에서 최대한 보존하고자 하는 이유다.
망우리공원의 수많은 묘소들은 지금도 매년 시나브로 이장되어 사라지고 있다. 이장은 개인의 자유지만, 서울시와 중랑구에서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명칭변경까지 고민하는 마당이라면, 유명인사가 아니더라고, 묘소와 묘비에 의미가 있다면 보존하는 것이 맞는 일이다.
이번에 현요한 묘소 이장과 묘비 매몰 사태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되는 것은 의미가 있는 무덤이나 묘비라면 어떤 형태로든 유지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영웅 현봉학 선생이 동생을 위해 세운 묘비에 ‘언니 봉학’이라는 이름의 역사적 가치는 물론 애절한 모친의 글은 후세에 길이 남겨도 문제가 없을 명문이기 때문이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각종 개발 사업으로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해 있는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시민들의 기부금과 증여를 통해 보존대상지를 매입하거나 확보해 보존하는 활동을 하는 곳으로 바로 이런 작지만 소중한 것을 유지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일하는 NGO단체다.
*김수종 작가는 여행기를 많이 쓰는 여행작가로,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망우리위원 및 문화유산위원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