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조선>에 실린 남시중 박사의 칼럼입니다.
4월 13일 <IT조선>에 실린 남시중 박사의 칼럼입니다.
남시중 박사는 실리콘밸리에서 변호사 및 엔젤 투자자로 20년 넘게 활동했습니다. 최첨단 기술 시대의 윤리 철학 문제에 관심을 두고 미국에서 저술 활동을 해온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원 칼럼이 너무 길어서 일부 요약했습니다.
제가 사는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은 ‘자택대피령'(‘shelter-in-place’)을 현재 4주째 진행합니다. 여타 지역보다 일찍 격리에 들어가 다행히 뉴욕과 같은 대량감염 상태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집에만 머물라는 자택 대피령이 곧 풀리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식품점과 약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업 행위가 이미 중단되었습니다. 치과도 치의사협회 자체 판단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머리를 잘라야 하는데 이발소나 미장원을 이용할 수가 없습니다. 산책이나 외출은 가능하지만, 가족이 아닌 한 두 사람 이상 모이거나 동행할 수 없습니다.
개를 산책시키기 위해 거리에 나가보면 순찰을 하는 경찰차가 부쩍 눈에 많이 띕니다. 모든 학교는 온라인 강좌로 전환했습니다. 아이들도 답답하고 부모들도 피곤합니다. 다들 재택근무를 하다보니 부부 간 갈등도 적지 않습니다. 거리는 쥐죽은 듯 고요합니다.
미국인은 충격과 공포에 빠져 있습니다. 미국민은 2차대전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재난이나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자택 대피령’은 일생 처음 경험해봅니다. 그런 용어가 있었는지 주지사가 그런 권한을 갖고 있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주지사 명령에 반발한 각종 소송이 법원에 몰려듭니다. 하지만 법원도 사실상 폐쇄 상태입니다. 대신 총기가게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법원은 총기가게는 봉쇄중에도 반드시 영업해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상거래’(essential businesses)라고 판단해 문을 닫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혐오 범죄가 폭증하면서 구매자 다수가 아시아계입니다.
미국 본토가 외부의 적에 의해 처음으로 공격받은 9/11 때도 미국 정부와 국민은 이렇게 당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질이 부족한 대통령이 국민보다 더 허둥댑니다. 임기 내내 트럼프는 논리도 없고 사실도 아닌 황당한 말을 매일 쏟아냈지만, 지금은 더더욱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코로나 사태에 우왕좌왕하면서 헛소리하는 걸 보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오히려 그립습니다. 9/11에 겁을 먹은 부시 대통령은 노회한 친 이스라엘계 보수파의 꼬임에 빠져 엉뚱하게도 아무 관계도 없는 이라크로 돈키호테처럼 쳐들어갔습니다. 그 여파로 지금도 미국은 엄청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중동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근 20년간 천문학적 군사비를 낭비하고도 발을 빼지 못합니다.
미국인은 눈앞에 닥친 죽음의 공포와 대량실업으로 두려움을 느낍니다. 미국민의 70%가 격주로 받는 임금을 단 한번이라도 못 받으면 가계가 유지되지 않는 서민들입니다. 경제공황의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지난 2개월 이상 ‘코로나는 독감에 불과하다’라며 대책을 세우지 않았던 트럼프의 허풍도 이제는 보기 어렵습니다. 대통령 눈에도 적잖은 공포감과 피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코로나 사태 발생 이후 최소 2-3개월 이상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미국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보기관은 이미 지난 11월 말부터 코로나 사태의 세계적 위험성과 안보위기를 여러 차례 의회 지도자와 대통령에게 경고했습니다.
트럼프는 대책의 필요성을 여러번 강조한 정보기관의 보고서를 무시했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최측근인 통상 보좌관 피터 나바로가 1월에 작성한 백악관 내부메모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나한테 직접 와서 말하지 않았다”는 트럼프다운 변명을 내놓았죠.
국가안보 사안이라도 5분 이상 주의집중이 안된다고 알려진 원맨쇼 대통령을 뽑은 미국이 지금 그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CIA 비밀보고를 받은 상원 정보위 소속의 두 공화당 의원은 재빠르게 대량으로 주식을 투매했습니다. 심지어 펜데믹 발생시 이득을 볼 회사 주식을 미리 사들이기까지 해 공분을 샀습니다. 이는 공화당 계열 미국 정치인들이 얼마나 썩었는지 보여줍니다.
미국 실업자는 자택 대피령 3주 만에 2000만명을 육박합니다. 서울 부산 대구 인구만큼이나 많은 일자리가 일시에 사라졌습니다. 미국 경제의 심장 뉴욕이 멈추면서 그 경제적 파장이 미국 전역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갑니다. 코로나 감염으로 사람이 죽어나가도 경제활동은 재개해야 한다는 공화당 정치인과 논객의 목소리도 커집니다.
미국의 고용주는 언제든 아무 이유 없이 해고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말하는 ‘정규직’이란 그 개념조차 미국 사람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특히 프리랜서 계열의 직업이 많은 미국에서는 실업이 확대되면 신용카드나 주택융자금 부실로 이어집니다.
미국 금융시장을 받치고 있는 주택융자(모기지) 시장이 흔들리면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습니다. 금융위기가 발생합니다. 2007년 발생한 모기지 금융위기가 이번에 다시 터지면 이제는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경제 전문가들은 공식 석상에서는 말을 조심합니다. 하지만 사석에서는 세계적 대공황의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감추지 않습니다.
미국 중앙은행과 의회는 현금을 대량으로 살포하고 있습니다. 2조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부양책을 여야 합의로 일시에 통과시켰죠. 그 돈이 실제 풀리기도 전에 추가로 더 큰 규모의 부양책을 다시 논의 중입니다.
이 모든 현금은 어디서 나올까요? 미국 재무부가 그냥 찍어내는 돈입니다.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를 자기들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는 미국만이 할 수 있는 유일무이의 특권입니다. 직접적으로는 미국 납세자가, 간접적으로는 무역을 위해 반드시 미국 달러를 보유해야만 하는 전세계 국가들이 차후 이 부담을 안게 됩니다.
미국의 의료보험과 의료체계는 사보험 위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약 900개가 넘는 보험회사들이 난립하고 있는 미국 의료체계의 난맥상은 일생을 연구한 학자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만큼 복잡하고 비효율적입니다.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4인 가구가 한달에 약 200만원에서 300만원의 보험료를 내도 치료받을 때마다 본인 현금 납부액이 부담스럽습니다.
미국인은 보험회사만 배를 불리는 정글식 의료보험 체계에서 신음합니다. 로비와 금권정치로 타락한 미국 의회는 이를 조정하지 못합니다. 전국민 의료보험을 내세운 샌더스가 꿈꾼 ‘정치 혁명’은 경선 탈락으로 물건너 갔습니다. 상위 1% 부자는 현금만 받는 최상위 의사로 구성된 회원제 클럽식 의료 시스템을 별도로 활용합니다.
코로나 확진검사는 표준 의료시스템에서 여전히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 유명 연예인이나 백만장자들은 사설 의료서비스를 통해 확진검사를 취미삼아 받아서 공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민중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걸 고마워해야 합니다.
미국 병원은 보험회사가 소유하거나 운영과 환자 치료방법까지 통제합니다. 비용 절감을 위해 이런 비상사태에 대비한 여유 병상이나 산소호흡기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의사와 환자가 다 미국식 카우보이 자본주의의 희생양입니다.
왜 미국은 한국을 포함한 모든 선진국이 실시하는 전국민 의료보험을 시행하지 못할까요? 왜 미국은 세계 최대 경제시장이자 군사강국이면서도 사회복지는 선진국에서 최하위 수준일까요?
가난한 백인 서민층의 몰표로 집권해 온 미국 공화당은 일단 집권만 하면 안면몰수하고 부자와 대기업을 위한 경제정책에 몰입해왔습니다. 그런데 공화당의 반복지정책, 친 대기업 자유무역 정책, 반노조 정책으로 실제 가장 피해를 받는 백인 서민들은 왜 줄기차게 공화당만 지지할까요? 미국 정치 경제 사회학자들이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입니다.
백인들은 무조건 사회복지 정책에 반대합니다. 사회복지는 백인들이 낸 돈으로 흑인과 이민자들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보는 착각과 편견이 지금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정작 자신들에게 돌아갈 혜택을 스스로 거부하는 격입니다. 결국은 부자들 좋은 일만 시키는 거죠.
고졸 이하의 학력이 대부분인 남부 백인들은 자신들의 우매함 때문에 지금은 멕시코 불법 체류자들과 허드렛일을 놓고 경쟁하는 지경까지 내몰렸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정작 자신들을 도와줄 민주당에는 투표하지 않습니다. 흑인과 이민자 소수민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유색인종 정당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미국 백인들은 가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난해진 원인이 제조업에서 정보산업으로 이동한 미국의 산업구조 조정 탓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합니다. 모든 이유가 유색인종이 늘어나서라고 믿습니다. 트럼프 같은 공화당의 선동가들이 백인 표를 훔치기 위해 그렇게 믿도록 계속 선전하고 부추깁니다. 백인들은 자신의 무지와 인종혐오가 자신들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악순환은 계속됩니다. 백인들은 반서민 친대기업 정책으로 일관하는 공화당에 무조건 투표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으킨 공화당 대통령의 제국주의식 전쟁을 백인우월주의를 확인하는 미국 카우보이의 용감한 행동이라 믿습니다. 공화당은 아무리 잘못해도 용서합니다. 백인당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위대한 국가로 올라설 수 있었던 동력은 전세계에서 다양한 이민이 모여 경제적 성공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서로를 차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신 국가에서 족쇄가 되었던 출신 계급이나 종교. 민족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과학자. 예술가 등 세계적 인재들이 모여든 나라가 미국입니다. 미국은 유학을 와서도 공부를 마치고 난 후 본인이 원하면 현지에서 취직하고 또 미국시민이 될 수 있는 개방된 나라였습니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북부를 모두 장악한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누구나 로마시민이 될 수 있었던 개방성에 있었습니다. 로마제국 황제의 대다수가 로마 출신 이탈리아인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을 강국으로 만들었고 위대한 나라로 존경받게 해준 가장 중요한 동력은 미국의 개방성, 국제법과 도덕적 이상에 기초한 국제주의였습니다. 그 가장 큰 적이 백인 우월주의에 기초한 인종차별이고 국가 이기주의에 기초한 고립주의입니다. 트럼프의 반이민 반동맹 고립주의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재선을 위한 술책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이 로마의 멸망을 따라가는 수순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민주당 바이든이 대통령에 당선되어도 트럼프 4년간 망가진 유럽과 아시아 동맹관계를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미중 관계를 다시 상호협력과 국제평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하도록 중국을 유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북한과 중동 문제를 해결하면서 추락한 최고 강국의 국제적, 도덕적 신뢰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트럼프는 개인적으로 자신은 인종차별자가 아니라고 늘 강조합니다. 그는 간교한 사업자입니다. 대놓고 하는 인종차별은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종차별을 부추겨 지배자로서의 인종적 지위를 상실하고 있는 백인 표를 모아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올해 말 대선에서 트럼프가 재선된다면 미국의 인종갈등은 봉합되기 어려울 겁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세계 경제와 무역 질서는 조정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경제적 탈중국화, 소위 ‘디커플링’(decoupling)이 가속화할 것입니다. 영국 탈퇴로 이미 충격을 받은 유럽연합도 내부 균열이 커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코로나 팬더믹은 세계가 단합해 싸워야 하는 인류 공통의 적입니다. 어느 때보다 도덕적인 지도력을 발휘해 국제적 공조를 이끌어야 할 미국이 국가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친중 외교를 보이는 국가는 미국이 내놓고 징계하려 할 것입니다. 세계는 다시 거대 블록 체제로 나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전략적 무역전쟁을 치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불황에 빠진 세계는 국제 정치적으로도 더욱 격심한 격랑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리적 군사 충돌도 증대할 확률이 높습니다. 미중 대리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좋든 싫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기치 아래 세계질서를 주도해온 미 제국의 지도력 상실은 당분간 국제적 혼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