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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선에 서서. 안상학

푸른하늘김 2020. 4. 10. 22:33

생명선에 서서

 

안상학

 

이쯤일까

생명선 어디 이순의 언저리에 나를 세워 본다

앞으로 남은 손금의 길 빤하지만 늘 그랬듯이

한 치 앞을 모르겠다

지나온 길은 내가 너무도 잘 아는 길

오늘은 더듬더듬 그 길을 되돌아가 본다 이쯤에서

딸내미가 환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다행이다 지나간다

송장 같은 내가 독가에 처박혀 있다 지나간다

다 죽어가던 내가 점점 살아나고 나는 지나간다

온갖 말들의 화살을 맞고 피 흘리는 내가 있다 지나간다

딸내미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가 있다 지나간다

나는 나로 살겠다고 다짐하던 몽골초원 자작나무 지나간다

권정생 선생이 살아나고 나는 서울이다 지나간다

우울한 여인이 나타나고 환해지고 사라진다 지나간다

새벽 거리에서 울고 있던 나를 지나가면 이쯤에서

울고 있는 어린 딸내미가 다시 서럽게 혼자서 울고 있다

지나간다 뺑소니가 지나가고 오토바이가 일어나고

아버지가 술배달을 하고 있다 나는 모른 척 지나간다

시를 접고 공사판에서 오비끼를 나르는 나를 지나가고

없는 아내가 있다가 사라진다 지나간다

차마 말하기 힘든 청년을 만났다 지나가고

청년이 알던 처녀의 소녀가 있다 지나간다

시를 쓴다 쓰지 않는 우울한 소년을 지나간다 이쯤에서

새새어머니의 빗자루가 지나가고 새엄마가 칼을 맞고 있다

지나간다 엄마 같던 새엄마가 햇감자를 쪄주던

1974년 생일날, 지나간다

무덤에서 나온 엄마가 병원에 누워 있다 지나간다

어느새 엄마는 훈련소 길목에서 가겟방을 하고 있다

홍역을 지나가고 라면을 먹던 군인들을 지나간다

닭을 잡아 시장에 내다팔던 아버지를 지나간다

크림빵을 훔쳐 먹던 나를 노려보는 엄마를 지나간다

가물가물 연탄가스에 중독된 나를 지나가면 이쯤에서

강원도 탄광에서 야반도주 온 외삼촌네 가족이 있다

식구 많은 밥상이 여러 개 놓여 있다 지나간다

종이 제비를 접어 날려 주던 작은외삼촌을 지나간다

흙을 퍼먹던 네다섯 살 나를 지나간다

월남방망이 사탕에 까무러치던 누이를 지나간다

가물가물, 이쯤에서, 이쯤에서 길은 끝난다 손금의 길은 빤한데

더 이상 어려지지 않는 길 앞에서 길을 잃는다 이쯤에서

분명 지나왔을 과거도 미래처럼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망연하고 자실하여 돌아선다

되짚어 나갈 길이 아득하다

저 길을 다시 어떻게 걸어가나 두 번 다시 못 걸을 길

굽어보는 그 길 오른쪽으론

떠나가는 것들, 눈물 나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 쓰러지는 것들, 절망하는 것들, 그리운 것들, 그늘진 것들이 있고,

굽어보는 그 길 왼쪽으론

돌아오는 것들, 눈물 닦는 것들, 나타나는 것들, 일어서는 것들, 희망하는 것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것들, 햇살 바른 것들이 있다

아직도 그들은 서로 한데 있지 못하고 따로 따로 서 있다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그 길을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서

나는 나를 다시 이순의 언저리에 세워 본다

 

《문장웹진 2020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