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 출신 도사들
이북(以北)출신의 도사(道士)들/조용헌
이남보다는 이북에 도사들이 많았다. 유명한 도사들은 대개 이북에서 나왔다. 여기에서 도사라고 하는 사람들은 한의학·풍수·사주팔자의 대가들을 가리킨다. 한의학을 꼽아보면 ‘사상체질’을 창안하고 <동의수세보원>이란 한의학 책을 쓴 동무 이제마를 들 수 있다. 한의원에 가면 태음인이니 소양인이니 하면서 체질을 나누고 무슨 체질이냐에 따라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이 있으니 음식을 조절하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독창적인 사상체질론을 창안한 이가 이북 출신의 도사 이제마다.
<사주첩경(四柱捷徑)>이라고 하는 사주명리학의 ‘바이블’을 저술했던 자강 이석영도 이북 출신이다. 필자도 사주를 공부할 때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던 책이 바로 이 <사주첩경>이었다. 실전에서 사주를 볼 때 필요한 부분이 ‘통변(通變)’인데, 이 통변에 대한 노하우가 이 책에 많이 소개돼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미나미 지로가 찾아올 정도로 유명했던 전백인도 이북 사람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조선 총독으로 있던 미나미가 어느 날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점집을 하고 있던 전백인을 찾아왔다. 전백인은 미나미를 보자마자 바로 “사위에 대해 물어보러 오셨군요. 사위는 죽었습니다”라고 단칼에 점사(占辭)를 내뱉었다고 한다.
미나미의 사위가 전쟁터(태평양전쟁)에 나갔는데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딸이 얼마나 안절부절 못했겠는가. 보다 못한 친정아버지 미나미가 당대 최고수라고 소문난 조선의 도사 전백인을 찾아왔던 것이다. 전백인의 실력을 확인하게 된 미나미가 그 자리에서 자필로 ‘사주영업 허가증’을 써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에 이인(異人)이 많구나!’ 총독이 허가해주는 면허증이었다.
이런 고수들은 이북 출신이 많았다. 이 대목에서 ‘왜 이북 출신이 많았던 것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 주된 이유는 이북 사람들이 조선시대에 출세를 못했기 때문이다.
한양에 터를 잡은 조선 정부는 조선시대 내내 이북 사람들을 차별했다. 조선 초기에 이북지역에서 큼직한 반란사건들이 여러건 발생한 탓이다. 이북 사람들은 고구려 후예들이라 기질이 이남 사람보다 훨씬 강하다. 이북 산세가 이남보다 세다. 이북 산의 바윗돌들도 아주 단단한 차돌이 많다. 산의 암질이 이렇게 단단하면 거기에서 태어나고 사는 사람들도 단단하다.
게다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출신들은 과거시험 보는 것을 봉쇄당했다. 개성 사람들은 실력이 있어도 합격을 잘 안 시켰던 것이다. 대과 합격을 통한 벼슬길이 차단되다보니 이북의 머리 좋은 인재들은 중인 과목에 도전했다.
조선시대에 중인들을 등용하기 위해 시험 보는 과목은 사주·풍수·한의학이었다. 한과목당 두세명씩 소수의 인원을 뽑았다. 이 사람들은 궁궐에서 집을 지을 때 풍수지리를 보고 택일을 했다. 또는 왕실의 왕자나 공주의 혼사를 할 때 사주궁합을 봤다.
한의사도 물론 필요했다. 한의사는 생명을 다루는 중요한 직업이지만 중인의 신분에 머물러 있었다. 궁궐에서 근무하던 한의사는 퇴직하면 궐 밖에 나가서 영업을 했다. 궁궐 출신 한의사는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구전에 의하면 궁궐에서 근무하던 사주 전문가는 민간에 나가서 영업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왕실 내부의 사정, 즉 왕족의 일급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으므로 외부에 나가서 발설하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사주 전문가는 퇴직하더라도 민간 영업이 금지되는 불이익이 따랐다. 죽을 때까지 궁궐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북 사람들이 사대부로 가는 벼슬길이 봉쇄되자 그중 머리 좋은 사람들은 실용과목인 사주·풍수·한의학에 몰리는 상황이 발생했던 셈이다. 인재들이 이 분야에 투입되니 자연히 고수가 나오는 게 아닌가.
이 고수들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을 피해 이북에서 이남으로 대거 내려왔다. ‘도사들은 놀고먹는 부르주아계층’으로 분류돼서 숙청 대상이었다. 이들 이북 출신의 ‘선수들’이 피난을 와서 눌러앉은 곳이 부산이다. 부산의 영도다리에 좌판 깔고 사주를 봐주던 게 우리나라 사주명리학 상업화와 대중화의 시초였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사주팔자로 난리 통에 입에 풀칠할 수밖에 없었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한국 사주팔자의 대중화에는 이북 사람들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우리나라 역술계의 메카는 부산이다. 역술계에 데뷔를 하려면 부산의 프로들한테 한번씩 일합을 겨루거나 지도를 받고 데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