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논란 이후의 기자들
‘조국 논란’ 이후의 기자들/정은령 언론학 박사
“불난 집에 들어가면 앨범부터 챙겨라.” 30년 전 수습기자 시절 선배들에게 들었던 말이다. 희생자가 있을 경우 그 얼굴 사진을 신문에 싣기 위해서였다. 소방수와 검댕이 뒤엉킨 화재현장에서 앨범을 찾아들고 나온 동기도 있었다. 그렇게 모질었던 훈련 과정은 기자들에게는 무용담이지만, 피해자들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일 것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의 후보자 당시 기자간담회를 지켜보며 요즘 같으면 앨범을 들고나오기는커녕 그 비슷한 시도만 해도 동영상에 찍혀 조리돌림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의 감시견 역할을 하던 기자가 오히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취재하는 세상이다.
기자간담회 이튿날은 ‘근조 한국언론’ ‘한국기자 질문수준’이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오르고, 질문했던 기자 56명의 인적 사항이 조롱과 함께 인터넷 공간에 떠돌았다. 메시지를 공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메신저 저격하기(shooting the messenger)’였다.
기자가 치밀한 검증을 거쳐 사실을 제시해도 자신의 소신과 다르면 ‘가짜뉴스’라 하는 이들을 설득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당파성에 기울지 않고 그저 상식에 따라 판단하는 시민들조차 쏟아지는 뉴스들에 고개를 내젓는다면, 기자들은 그 이유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첫째, 기자들끼리만 중요한 사실을 좇고 있지는 않은가? 수사권이 없는 기자들은 눈감고 코끼리 다리 만지듯, 조그만 단서들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큰 그림을 확인해갈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결정적인 사실들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잘못 꿰어 맞춰지는 파편도 있다. 경쟁사가 하나의 조각을 가져오면, 의미가 있든 없든, 또 다른 조각을 들고 와서 ‘단독’이나 ‘특종’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확인하고자 했던 코끼리는 행방이 묘연해진다. 뉴스 이용자들은 혼란에 빠진다. 사건이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쉴 새 없이 속보는 쏟아지는데, 무엇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지, 왜 중요한지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채 헤매다가 종국에는 “세상이 다 틀려먹었다”는 판단중지 상태에 이른다. 기자들은 상사나 경쟁하는 동료기자들에게가 아니라 이런 시민들에게 설명해야 할 책무가 있다.
둘째, 취재 과정은 투명한가? ‘모두가 지켜보는’ 시대의 언론은 취재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도 투명하게 드러내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 취재원 보호라는 의무를 저버려서는 안되지만, 그 뒤에 숨어서도 안된다. 일반인이 쉽게 만날 수 없는 권력자, 출입할 수 없는 구역까지 접근할 수 있는 게 기자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그 특권은 미디어환경 변화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되어가고, 기자가 취재 과정을 말하지 않는 사이 ‘언론이 감춘 것’이라는 유의 음모론이 넘쳐난다. 드러내고 싶지 않아도 사방에서 들여다보는 눈들에 의해 드러날 일이라면, 취재가 어떠한 합리적 과정을 거쳤는지, 증거가 얼마나 믿을 만한지를 선제적으로 보여주는 게 낫다. 기자들에게는 한없이 고단할 일이지만, 그것이 시민들의 신뢰를 얻는 길이자 취재를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셋째, 분초를 다투는 특종 경쟁에 쫓길 때 머리가 아니라 근육이 먼저 기억하는 윤리가 작동하는가?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을 저술한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은 “언론인은 도덕적 나침반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인권을 침해한다면 낙종을 감수하고라도 보도하지 않아야 한다. 쉽지 않은 이 판단은 일선 기자 한 사람이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수십년 경력의 뉴스룸 간부들이야말로 ‘도덕적 나침반’을 작동해야 한다. 법보다 상위에 있는 윤리의 문제를 더 많은 책임을 가진 이들이 고민하지 않는다면, 현장 기자들은 맹목적으로 ‘취재 지시’를 향해 질주하게 된다. 오류에 대한 공개수정과 사과는 언론의 수치가 아니라 시민들에 대한 정직성과 겸허의 표현이다.
“검증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말로 오보를 너그럽게 받아들여주는 시민들은 없다. “국민의 알권리”라는 말로, 취재 과정의 인권의식 부족을 용서받지도 못한다. 가혹해도 그게 ‘모두가 지켜보는’ 시대의 취재 현실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여전히 더 많은 좋은 기자들을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