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와 히피
집시와 히피에 대하여/조용헌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 산에서 자급자족하는 삶 조명/사회생활 시달리는 중년 남성에 대리만족과 안도감 선사/서양의 집시 또는 히피와 비슷 동양에선 ‘도가(道家)’와 통해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부도나서 돈 한푼 없고, 아니면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됐거나, 파탄 난 인생들이 산에 들어가 사는 내용이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맨몸으로 산에 들어갔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더러는 도시생활이 싫어 입산한 경우도 있다. 마당에는 닭이나 염소를 키우고, 뒷산에 올라가 약초도 캐고, 도라지 캐 계곡물에 씻어 먹는 장면도 나온다. 화덕에 장작으로 불 지펴놓고 그 위에다 계곡에서 잡은 민물고기와 채소 몇가지 넣은 냄비를 올려놓고 끓이는 장면. 여자들보다는 남자들, 특히 중장년층 남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것 같다. ‘돈 없어도 저렇게 살 수 있구나!’를 눈으로 보는 셈이다. 중장년 남자들은 사회생활에 시달리면서 돈·조직, 그리고 인간관계망으로부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면서 돈·조직·부양의무로부터의 탈출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셈이다. 이걸 눈으로 보기만 해도 삶을 짓누르는 무게감으로부터 약간이나마 해방감을 얻는다. 직접 실천하지는 못해도 최소한의 대리만족을 얻는 것이다. ‘아, 이게 가능하구나!’다. 대리만족과 함께 안도감을 준다는 의미에서 이 프로는 중년 남자의 강박감을 치료해주는 정신치료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나는 자연인이다>는 한국판 ‘집시’ 내지는 ‘히피’ 프로그램이 아닐까.
집시와 히피를 꼭 나쁘게만 볼 일도 아니다. 문명이 고도화되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너무 ‘와꾸(틀)’에 짜인 사회는 정신병을 양산한다. 어딘가에 비상구 하나는 있어야 한다. 동양에서는 그게 도가(道家)였다. 도가는 산으로 튄 사람들이다. 세간에서 한몫 챙겨서 산으로 튀면 더 좋다. 빈손으로 가면 고생하니까. 그러나 한몫 챙길 상황이 안되면 무조건 산으로 튀는 것도 방법이다. ‘궁즉통’이기 때문이다. 한·중·일의 산세는 물이 있고, 수목이 우거지고, 농사도 지을 수 있고, 약초도 있고, 동물도 있다. 산에서 최소한의 자급자족이 되는 환경이다. 여기에서 도가가 탄생한 것이다. 동양 전통 산수화는 거의 이런 도가적 환경을 동경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계곡·바위·소나무·구름·초당이 등장하지 않던가! 몽골에 가보니 일상생활이 집시적인 삶이다. 소와 염소 떼 데리고 풀 있는 곳을 찾아 텐트를 짊어지고 계속 이동하는 삶이다. 유목민의 삶이라는 게 집시의 삶이다.
서양문명의 종가인 그리스에 가보니 산이 너무 척박했다. 비가 잘 안 오고 나무도 별로 없는 황량한 산이다. 먹을 것도 없다. 이런 데서는 산에 살기 어렵다. 산에서 숨어 살 수가 없는 셈이다. 그 대신 그리스는 배 타고 이 섬 저 섬을 돌아다니면서 생계를 해결하는 해적질이 더 맞는 환경이었다. 20세기부터 아시아가 산업기지화되면서 무협지의 개방파는 씨가 말랐고, 유럽도 문명이 너무 고도화되면서 여백이 없어졌다. 남미대륙이 집시와 히피들이 돌아다니기에 좋은 환경이다. 아직 물가가 싸고, 대륙이 넓어 돌아다닐 만하고, 아직 자연풍광이 남아 있고, 상대적으로 남미는 낙천적 인생관이 지배하는 대륙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 2년반 동안 남미를 집시들과 함께 돌아다니면서 생활해본 노동효 작가가 쓴 <남미히피로드>가 읽어볼 만하다. 돈 없이 남미를 돌아다니려면 악기를 하나 다루거나, 아니면 접시돌리기나 외발자전거 타는 묘기를 익히거나, 혹은 반지나 팔찌 같은 수공예품을 만들어 길거리에서 팔아야 한다. 자급자족 기술이다. 숙박비도 하룻밤 자는 데 5000원 미만인 곳도 있는 모양이다. 이 책에 의하면 유럽 집시의 원조는 루마니아라고 한다. 1000년쯤 전에 인도 서북부 라자스탄지역 유랑민들, 로마니라고 부르던 족속들이 메소포타미아를 넘어 루마니아로 들어왔다고 한다. 처음에 유럽인들은 이들을 이집트사람으로 오해했다. 이집션(Egyptian)이라고 부르다가 앞의 ‘E’가 떨어지고 집시언(Gyptian)으로 불리었다. 이게 현재의 집시(Gypsy)가 됐다는 것이다. 히피는 미국 중산층 백인 자식들에서 비롯되었다. 보호받고 크다 보면 방랑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고, 이게 1960년대 월남전과 맞붙으면서 히피라는 하나의 시대조류를 형성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한국도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산 밑으로 들어가 사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집시문화를 연구해볼 타이밍이 도래했다고 본다.
조용헌은 ▲강호동양학자, 불교학자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석좌교수 ▲저서 <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휴휴명당>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