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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통역사

푸른하늘김 2019. 7. 3. 06:59

#오바마 대통령의 추억

 

#어메이징 그레이스

 

#분노의 통역사

 

- 2015.7.1일자 내일신문 민병욱 칼럼 중에서

 

2015년 6월 26일 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열린 총기난사 희생자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노래를 불렀다.

오바마의 연설 노래는 분노와 거리가 먼 은총을 기리는 영상이다.

 

그는 장례추모사 서두부터 신의 은총을 언급했다.

"이번 주 내내 저는 은총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이 말하는 은총, 제가 가장 좋아하고 우리 모두가 아는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에 묘사된 그 은총 말입니다…"

 

연설 도중 그는 잠깐 침묵했다. 울음을 삼키는 듯 고개를 숙이나 싶었는데 '어메이징 그레이스', 그 노래 첫 소절이 대통령 입에서 흘러나왔다.

 

"놀라운 은총, 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린가. 그 은총 나처럼 불쌍한 이를 구원했네." 청중들이 하나둘 일어서고 장례식장엔 어느새 우레 같은 합창이 가득 찼다.

 

백인우월주의 청년 총에 애꿎게 진 흑인 9명. 한없이 무거운 흑백갈등 암운에, 분노로 터질듯하던 장례식장은 지상 모든 이의 화합을, 또 신의 은총을 갈구하는 희망의 장소로 거듭났다.

미국언론들은 이 장면이, 연임해 8년 임기를 채울 오바마 재직 중 최고의 순간이 될 것이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4월 25일 그는 백악관 출입기자단과 연례만찬을 하는 자리에 '분노 통역사'(anger translater)를 대동했다. 그날 보인 오바마의 코미디언 적 속내 표출은 탁월, 그 자체였다.

 

오바마 대통령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기자단 만찬과 같은 전통이 중요하다"고 하자 통역사는 "도대체 이따위 만찬은 왜 하는 거야. 내가 왜 이런 자리에 있어야 되지?"라고 풀이했다.

그러니까 대통령의 의례적 말 뒤에 숨은 속내를 분노로 버무려 전달해 웃음을 자아내는 상황코미디였다.

 

오바마는 언론에 대해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중요한 이슈를 비춰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통역사는 버럭 화를 내는 표정으로 "온갖 허튼 소리로 백인 노인들 겁을 주는 건 보수언론의 일 아닌가"라고 풀었다. 신랄한 비판이었지만 누구도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깔깔대며 즐거워했다.

 

대통령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다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 상황극은 보여줬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거리낌 없이 뿜고 싶어도 그래선 안되는 게 대통령 자리라는 걸 웅변해줬다.

 

그날 만찬 이후 오바마는 국회를 찾아 야당 지도자들을 만나 추진하고 있는 법안을 설득했다고 한다. 그 결과 오바마케어니 TPP협상권 등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거나 합헌판정을 받았다.

 

이러니 차기 대권주자들의 이어지는 출마선언에도 퇴임을 1년 반 남긴 오바마의 국정 장악력은 더 커지고 있다는 게 미국정가의 일치된 견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