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장모님의 사랑

푸른하늘김 2004. 10. 6. 22:05
장모님의 사랑
글 : 김 수종

외국생활 탓에 일 년에 두어 번 정도밖에 못 가지만, 경상도 문경에 있는 처가집에 가는 일은 언제나 나에게 큰 즐거움이다.
사위가 처가집에 가는 즐거움은 뭐니뭐니해도 장모님 때문일 것이다. 나의 처가 형제는 무려 칠남매다. 아들 셋에 딸이 넷. 내가 막내사위다 보니 자연 장인장모 연세는 이미 칠십에 가깝다. 장인 어른은 아직도 독서와 집필로 바쁘시고, 장모님은 요즘 관절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자식 손자들 뒷바라지에 농사 일까지 하고 계시니 건강하신 편이다.
막내딸에다 좀 극성인 아내는 일주일에 두세 번 국제전화로 처가의 안부를 묻고 형제 자매들과 수다를 떠느라 수십만 원의 전화세를 물어가며 가족애를 다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난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잔정이 없어 전화는 물론 편지를 하는 경우도 드물다. 일본에 산다는 핑계로 이것저것 잘 챙기지도 못하고 산다. 그래도 가끔 전화를 드리면 장모님은 언제나 막내사위 착한 놈이라고 기뻐하신다.


장모님의 사랑은 정말 놀라울 때가 많다. 특히 올해는 두 번이나 눈물나도록 놀라운 기쁨을 주셨다. 올 봄, 아들 연우의 백일을 위해 처가에 갔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가난하고 어겨운 시절, 장인어른은 군대가고 장모님은 가난한 시골살림에 시부모님과 시동생. 시누이와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려운 살림을 꾸려갔지만 남편의 사랑으로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며 50년이 다된 장인어른의 군대시절 편지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아직도 간직하고 계셨다. 눈물이 나려 했다. 그런 장모님의 사랑과 마음씀이 아직도 인생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지켜나가는 밑거름이구나 싶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두 분의 편지를 책으로 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다짐처럼 해 보았다. 물론 장모님은 마음속에 간직하기만 하면 되지 무슨 책이냐고 하시겠지만 말이다.



또 하나의 놀라움은 7월 끝자락, 여름휴가 때 일어났다. 우리 세 식구에 처남 처형네 식구까지 모이다 보니 처가집은 북새통이다. 하루에 두세번 청소며 빨래, 식사 준비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만만치 않았다. 자칭 페미니스트인 나는 빨래와 청소를 처가집에 가서도 하곤 한다. 그런데 처가집은 북향이라 언제나 습기로 가득찬 느낌이 들 정도로 곰팡내가 심하다. 그래서 장인어른의 지청구를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두 세번 빨래를 널고 걷고는 했다.

워낙 빨랫감이 많아 나누어 하다보니 해거름이 다 되었다. 마당에 빨래를 널고 잠시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오니 빨래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다. 이게 웬일인가! 부리나케 달려가 "장모님, 빨래가 없어졌어요!"했더니, 장모님 말씀이 "빨래가 이슬을 맞으면 자손이 머리가 나빠진다고 해서 저녁이면 언제나 창고 안으로 빨랫대를 옮겨두지"하는 것 아닌다. 힘들여 창고 안으로 빨랫대를 집어넣은 것도 그렇지만 자손이 머리가 나빠진다기에 이슬을 맞힐 수 없다는 장모님 말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정성과 사랑이 자식을 모두 훌륭하게 자라게 했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궁무진한 장모님의 사랑에 난 오늘도 감사하며 사랑의 편지를 쓴다.